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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策(2)

전국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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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책(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秦與同俗, 有虎狼之心, 貪戾好利而無信, 不識禮義德行.
苟有利焉, 不顧親戚兄弟, 若禽獸耳.
此天下之所同知也, 非所施厚積德也.
故太后母也, 而以憂死; 穰侯舅也, 功莫大焉, 而竟逐之; 兩弟無罪, 而再奪之國.
, 而又況於仇讎之敵國也?
今大王與秦伐韓而益近秦, 臣甚或之,
而王弗識也, 則不明矣. 羣臣知之, 而莫以此諫, 則不忠矣.
今夫, 內有大亂, 外安能支强秦‧魏之兵, 王以爲不破乎?
韓亡, 秦盡有, 與大梁鄰, 王以爲安乎?
王欲得故地, 而今負强秦之禍也, 王以爲利乎?
秦非無事之國也,
韓亡之後, 必且; 便事, 必就易與利;
就易與利, 必不伐楚與趙矣.
是何也? 夫越山踰河, 絶韓之上黨而攻强趙, 則是復也, 秦必不爲也.
若道河內, 倍, 絶之水, 而以與趙兵決勝於邯鄲之郊, 是受也, 秦又不敢.
伐楚, , 而攻, 所行者甚遠, 而所攻者甚難, 秦又弗爲也.
故曰: 秦必不伐楚與趙矣, 又不攻衛與齊矣.
韓亡之後, 兵出之日, 非魏無攻矣.
秦故有, 而以之臨河內, 河內之莫不危矣.
秦有, 得, , 大梁必亡矣.
王之使者大過矣,
乃惡於秦,
秦之欲之久矣.
然而秦之鄰, 聽使者之惡也,
隨安陵氏而欲亡之.
秦繞舞陽之北, 以東臨, 則南國必危矣.
雖無危, 則魏國豈得安哉?
且夫憎韓, 不受安陵氏, 可也,
未不患秦, 之不愛南國非也.
異日者, 秦乃在, 晉國之去梁也, 千里有餘, 河山以蘭之, 有周‧韓而間之.
以至于今, 秦十攻魏, 五入國中, 邊城盡拔. , 林木伐, 麋鹿盡,
又長驅梁北, 東至之郊, 北至, 所亡乎秦者, 山北‧河外‧河內, 大縣數百, 名都數十.
秦乃在河西, 晉國之去大梁也尙千里, 而禍若是矣.
又況於使秦無韓而有鄭地, 無河山以蘭之, 無周‧韓以間之, 去大梁百里, 禍必百此矣.
異日者, 從之不成矣, 楚‧魏疑而韓不可得而約也.
今韓受兵三年矣, 秦撓之以講, 韓知亡, 猶弗聽,
投質於趙, 而請爲天下.
以臣之觀之, 則楚‧趙必與之攻矣.
此何也?
則皆知秦之無窮也,
非盡亡天下之兵, 而臣海內之民, 必不休矣.
是故臣願以從事乎王,
王速受楚‧趙之約, 而, 以存韓魏務,
因求故地於韓,
韓必效之.
如此則士民不勞而故地得, 其功多於與秦共伐韓,
然而無與强秦鄰之禍.
夫存韓安魏而利天下, 此亦王之.
通韓之上黨於共‧, 使道已通, 因而關之, 出入者賦之, 是魏重質韓以其上黨也.
共有其賦, 足以富國, 韓必德魏‧愛魏‧重魏‧畏魏, 韓必不敢反魏.
韓是魏之縣也.
魏得韓以爲縣, 則衛‧大梁‧河外必安矣.
今不存韓, 則二周必危, 安陵必易. 楚‧趙楚大破, 衛‧齊甚畏, 天下之西鄕而馳秦, 入朝爲臣之日不久.”


340. 나라가 장차 나라와 함께 나라를 공격하려 하다
나라가 장차 나라와 함께 나라를 치려 하자 주기朱己(무기無忌)가 위왕魏王(안희왕安釐王)에게 말하였다.
“진나라는 과 같은 〈야만〉 풍속에다가 호랑지심虎狼之心을 품고 있으며 탐려호리貪戾好利하며 신의信義가 없으며 또한 예의나 덕행 따위는 모릅니다.
이익만 있으면 곧 친척이나 형제도 돌보지 않아 마치 금수와도 같습니다.
이는 천하가 다 아는 바로서 은혜를 베풀어 주거나 덕행을 쌓아 줄 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 태후太后는 왕의 모친이면서도 근심으로 죽었고, 양후穰侯외숙外叔인 데다가 공로가 막대하였건만 결국 축출당하고 말았으며 두 동생은 아무런 죄 없이 두 번이나 봉지封地를 빼앗겼습니다.
친척 형제에게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적국 사이에야 오죽하겠습니까?
지금 대왕께서는 진나라와 더불어 한나라를 공격하여, 진나라에 더욱 친근하려 하시나 저는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왕이 만약 모르고 계셨다면 이는 명석하지 못한 때문이요, 신하들이 이를 알면서도 간언하지 않았다면 이는 충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라의 사정은, 안으로 한 여자가 어린 임금을 보좌하고 있다가 안으로 대란이 일어났는데 밖으로 어찌 강한 진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를 지탱할 수 있어 왕께서는 격파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십니까?
한나라가 망하고 나면 진나라는 곧 나라 옛 땅과 대량大梁 부근까지 다 차지해 버릴 것인데 대왕께서는 평안하리라 여기십니까?
왕께서 옛 땅을 찾으려고 덤볐다가 도리어 강한 진나라의 화를 짊어지게 되는데 왕께서는 이를 이롭게 여기십니까?
진나라는 아무 일없이 평화스럽기를 바라는 나라가 아닙니다.
한나라가 멸망한 후에는 반드시 다시 일을 벌일 것인데 일이 벌어지면 반드시 쉽고 유리한 것을 선택합니다.
즉 쉽고 이로운 일을 벌이되 결코 나라나 나라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험준한 태행산太行山을 넘고 황하를 건너 벽지인 한나라의 상당上黨을 거쳐 강대국인 조나라를 치고자 한다면 지난날 알여閼與 전투에서처럼 참패하기 십상이기 때문에 진나라는 절대로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만약 하내河內를 건너 조가朝歌 땅을 등지고 장수漳水부수滏水를 가로질러 조나라 병사와 한단邯鄲의 교외에서 승부를 경정짓는 방법, 이는 지난날 지백智伯이 입었던 패배이기 때문에 진나라로서 감히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초나라를 치려면 반드시 섭곡涉谷을 넘고 걸어서 3천여 리를 넘어 위애危隘의 요새를 친다는 것은 행로도 멀 뿐 아니라 공격하기도 힘드니, 진나라가 이런 싸움을 할 리가 없습니다.
하외河外를 경과해서 대량大梁을 등지고, 오른쪽으로 상채上蔡소릉召陵을 끼고, 초병楚兵진성陳城의 교외에서 결전決戰하는 것도 진나라는 감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나라는 결코 초나라나 진나라를 공격 대상으로 삼지는 않을 것이며, 나라나 나라도 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나라가 망한 후에 진나라가 출병하는 날은 바로 위나라 이외에는 더 적당한 공격 대상이 없을 것입니다.
진나라는 본래 형구刑丘 등 유리한 통로가 있고, 궤진垝津을 쌓아 이 길을 통해 하내를 죄어들면 우리 하내의 땅과 땅은 위험하지 않은 곳이 없게 됩니다.
진나라가 정지鄭地를 소유하고 원옹垣雍을 얻게 되면 형택熒澤의 물길을 터서 대량大梁으로 부어댈 것인데, 그렇게 되면 우리 대량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왕의 사자들 잘못은 너무나 컸습니다.
진나라에 가서 안릉씨安陵氏를 헐뜯었습니다.
진나라는 땅을 갖고 싶어한 지가 오래됩니다.
그러나 진나라의 엽양葉陽곤양昆陽무양舞陽고릉高陵의 접경 지대 사람들의 요구에 대해 진나라는 사신의 중상中傷하는 말을 듣고 그대로 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안릉씨가 망하자 그 땅도 그대로 잃고 말았습니다.
진나라가 지금 무양霧陽의 북쪽을 감아돌아 동진東進하여 허 땅에 임한다면 남국은 틀림없이 위험해질 것입니다.
남국이 비록 위험이 없다 할지라도 어찌 위나라로서는 안전하다 하겠습니까?
하물며 한나라를 미워하면서 안릉씨를 감싸지 않는 것, 이것은 그럴 만하다고 합시다.
그러나 다만 진나라가 남국을 사랑하지 않는 데 대한 우려를 하지 않는 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옛날 진나라가 하서河西 밖에까지 세력을 뻗치지 못하였을 때는 ()의 서울 대량까지는 1천 리가 넘는 거리였고, 산과 강이 가로막아 주었으며, 그 사이에 나라와 나라가 가로놓여 격리시켜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임향林鄕에 주둔군을 둔 이후 지금까지 진나라가 위나라를 열 차례나 공격하여, 그 중 다섯 번은 변경의 마을은 다 점령당하여 문대文臺가 파괴되고 수도垂都가 불탔으며 숲이 다 베어져 사슴들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뒤이어 나라까지 포위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다시 진나라의 말발굽은 대량의 북쪽을 넘어 동쪽으로 의 교외까지 이르고, 북쪽으로는 까지 뻗쳐 진나라에게 빼앗긴 땅은 산남山南 산북山北하외河外, 하내河內의 모든 곳으로, 대현大縣이 몇 백 개요, 명도名都가 수십 곳입니다.
진나라가 지금 하서에 있어 우리 나라 서울 대량과 1천 리라고 하나 그 화환禍患은 이렇게 절박한 것입니다.
하물며 진나라에 있어 만약 한나라의 중간 차단이 없어지고, 정 땅에 있어서 하산의 장애가 사라지고, 주나라‧한나라의 중간 방비 역할이 없어지게 된다면 대량까지는 1백 리밖에 되지 않아 그 위험은 1백 배 넘을 것입니다.
지난날에는 합종이 이루어지지 않아 초나라와 위나라는 서로 의심을 품고 있는 상태였고, 게다가 한나라 또한 결약結約할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지금 한나라는 진나라로부터 3년에 걸친 공격을 받고 있는데 진나라는 이를 흔들면서 한나라에게 강화를 요구하고 있지만 한나라는 그랬다가는 멸망할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들어주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왕자를 나라에 인질로 보내어 천하 제국이 연합해서 대열을 이루어 진나라 칼날 앞에 대항하기를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초나라‧조나라는 틀림없이 한나라와 공동으로 진나라를 공격할 것으로 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이는 모두가 진나라의 욕망이 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진나라는 천하의 병사를 다 없애고 해내海內의 백성을 모두 자기 신하로 만들기 전에는 절대로 싸움을 그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저는 왕께서는 합종의 방법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왕께서는 속히 초나라‧조나라와 결약하시고 한나라의 인질을 묶어두고, 한나라와 위나라를 보존시키는 일을 급선무로 삼으십시오.
그런 다음 이를 인하여 한나라에게 옛 땅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십시오.
한나라는 틀림없이 요구를 들어 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왕께서는 백성을 조금도 수고롭게 하지 않고 옛 땅을 얻게 되어 그 공로가 진나라와 함께 한나라를 친 것보다 많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결국 진나라와 국경을 맞대는 가 없게 됩니다.
무릇 한나라를 보존시키고 위나라를 안정시키며 천하를 이롭게 할 것이니, 이는 왕의 좋은 기회입니다.
그리고 한나라의 상당上黨, 땅을 통하게 하여 그 길이 소통되기만 하면 그곳에 을 설치하여 부세賦稅하면 이는 우리 위나라가 한나라의 상당을 바탕으로 사는 것이 됩니다.
함께 그 세금을 나눠 가지면 부국富國이 될 수 있으며 한나라는 틀림없이 위나라를 스럽게 여기며 사랑하고 중히 여기면서도 두려워하여, 우리 위나라를 감히 배반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곧 한나라가 위나라의 이 되는 것입니다.
위나라가 한나라를 하나의 현쯤으로 삼고 나면 대량大梁하외河外는 안심해도 됩니다.
한나라를 진나라의 공격으로부터 구출해 주지 않으면 이주二周가 위험해지고 안릉安陵은 쉽게 진나라의 소유가 될 것이요, 초나라와 조나라는 크게 깨어지고 나라와 제나라는 진나라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 천하 제후가 모두 서쪽을 향하여 진나라를 섬기겠다고 달려 갈 것이니, 잘못하다가는 임금께서도 진나라에 입조入朝하여 신하가 되어야 할 날이 결코 멀지 않을 것입니다.”


역주
역주1 : 이 장의 사건은 《史記》 〈魏世家〉에도 실려 있으며, 274장과 연결되어 있다. 시기는 대략 B.C.262년이다. 367장 참조.
역주2 魏將與秦攻韓 : 周 赧王 50년(B.C.265년)에 魏가 먼저 齊‧楚의 공격을 받게 되자 秦이 魏를 도왔다. 마침 秦은 趙와 약정하여 韓을 치려던 참이었는데, 魏는 秦의 고마움을 생각해서 秦‧趙의 연합군에 가담해서 韓을 친 후 잃은 땅을 회복하려 하였다.
역주3 朱己謂魏王 : 본문의 朱己는 《史記》 〈魏世家〉에는 無忌로 되어 있다. 無忌는 魏 昭王의 庶子이며 安釐王의 異母弟. 安釐王이 卽位하자 그를 信陵君에 封해 주었다.
역주4 戎翟 : 翟은 狄과 같다. 西戎北狄.
역주5 故太后母也 而以憂死……親戚兄弟若此 : 秦나라 昭襄王의 生母인 羋氏(楚나라 사람)는 宣太后가 되어 그의 異父同母弟인 穰侯에게 정치 실권을 맡겼다. 권력이 그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자 昭襄王은 크게 근심한 나머지 周 赧王 49년(B.C.226년)에 范雎의 의견에 따라 宣太后를 廢하고, 穰侯를 陶 땅에서 放逐하고, 同母弟인 高陵君(顯)과 涇陽君(悝)을 關外로 추방하였다. 穰侯는 곧 魏冉이다.
역주6 韓氏以一女子承一弱主 : 韓의 桓惠王이 어려서 卽位한 9년 동안 母后가 실권을 잡았다.
역주7 鄭地 : 周烈王 원년(B.C.375년)에 鄭나라는 韓의 침략을 받아 陽翟(河南省 禹縣)에서 新鄭(河南省 新鄭縣)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곳은 위의 도읍인 大梁과 가까웠다.
역주8 便事 : 《史記》에는 ‘更事’로 되어 있다.
역주9 閼與之事 : 閼與는 韓의 地名, 뒤에 趙로 넘어갔다. 지금의 山西省 和順縣 부근. 周 赧王 405년(B.C.270년)에 秦이 韓의 閼與를 공격하자 韓나라가 趙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니, 趙奢를 시켜 구원병을 보냈다. 趙奢는 奇兵을 써 秦軍을 격파했다.
역주10 鄴‧朝歌 : 鄴은 河南省 臨漳縣, 朝歌는 河南省 淇縣.
역주11 漳滏 : 漳水의 옛 물길은 鄴, 邯鄲‧成安 등지였으며, 滏水는 그 支流.
역주12 智伯之禍 : 智伯(荀瑤)이 周 定王 16년(B.C.591년) 韓氏‧魏氏를 대동하고 趙氏를 공격할 때 물길을 터 趙의 都邑 晉陽을 포위하자 趙 襄子가 도리어 韓氏, 魏氏와 密約을 맺고 智伯의 군내로 물길을 돌려 결국 智氏는 망하고 晉은 韓‧魏‧趙의 三晉으로 정립되었다.
역주13 道涉[而]谷行三十(千)里 : 《史記》에 의하여 ‘而’는 衍文, ‘十’은 ‘千’의 誤字로 처리하였다. 涉谷은 楚나라로 통하는 험한 길.
역주14 危隘之塞 : 《史記》에는 ‘冥阨之塞’으로 되어 있다. 冥阨은 地名으로 澠隘, 혹은 冥山, 石城山이라 한다. 지금의 河南省 信陽縣, 東南의 平靖關, 楚의 要塞.
역주15 若道河外 背大梁……決於陳郊 : 陳은 春秋時代 陳國, 지금의 河南省 淮陽縣. 上蔡도 역시 春秋時代 蔡國의 도읍지, 上蔡縣. 召陵은 모두 楚나라 땅.
역주16 懷‧地(茅) 刑(邢)丘‧[之], 城垝津 : 懷는 沁陽縣. 地는 《史記》 〈魏世家〉에 ‘茅’로 獲嘉縣이라 하였으며 刑丘는 《史記》에 邢丘로 沁陽縣이라 하였다. ‘之’는 衍文이며 城垝津은 垝津에 城을 쌓았다는 뜻.
역주17 共ㆍ汲 : 둘 모두 魏의 邑名, 각각 河南省의 輝縣, 汲縣에 있다.
역주18 鄭地 : 成皐, 滎陽을 가리킨다.
역주19 垣雍 : 魏의 邑名, 河南省 原武縣.
역주20 決熒(滎)澤而水大梁 : ‘熒’은 ‘滎의 誤字. 秦 始皇은 장군 王賁을 보내어 魏를 공격할 때 이 滎澤의 물을 터서 魏를 멸망시켰다. 그 터는 지금의 河南省 氾水縣에 있다.
역주21 安陵氏 : 安陵은 河南省 鄢陵縣, 魏 襄王의 동생 成侯의 封地. 뒤에 魏와 安陵君 成侯와 소원해지자 魏는 오히려 그를 秦에 참소하여 치게 하였다.
역주22 : 땅 이름. 《史記》에는 ‘誅’로 되어 있다.
역주23 葉陽ㆍ昆陽 : 秦의 地名. 둘 다 河南省 葉縣에 있다.
역주24 舞陽ㆍ高陵 : 魏의 地名. 舞陽은 河南省 舞陽縣, 《史記》에는 高陵이 없다. 高陵은 陝西省의 高陵縣으로 秦의 땅.
역주25 : 春秋時代 許國. 지금의 河南省 許昌縣.
역주26 南國 : 許 땅의 남쪽. 韓의 땅. 이곳은 魏의 남쪽에 있었으므로 南國이라 칭하였다.
역주27 河西 : 春秋 및 戰國 초기에 秦은 그저 陝西, 甘蕭省의 黃河 以西에 불과한 좁은 땅이었다.
역주28 林軍 : 林鄕의 주둔군. 林鄕(林中)은 지금의 河南省 新鄭縣 부근.
역주29 文臺墮垂道焚 : 文臺는 부서지고 垂都는 불탐. 文臺는 魏의 臺 이름. 지금의 山東省 荷澤縣, 垂都는 《史記》 集解에 “句陽에 垂亭이 있다.”고 하였다.
역주30 國繼以圍 : 國은 國都 大梁, 周 赧王 40년(B.C.275년)에 秦이 魏를 쳐서 大梁을 포위한 일.
역주31 陶‧衛 : 陶는 지금의 山東省 定陶縣. 衛는 春秋時代 衛의 도읍이었던 楚丘, 지금의 河南省 滑縣.
역주32 乎闞 : 平闞, 《史記》에는 平闞으로 되어 있다. 즉 齊나라의 平陸. 지금의 山東省 汶上縣, 闞은 역시 山東省 汶上縣, 西南의 南旺湖.
역주33 〈山南〉 : 《史記》 〈魏世家〉에 의하여 보충하였다.
역주34 雁行頓刃 : 雁行은 기러기가 진을 치고 가는 모습. 頓刃은 칼날을 꺾음. 즉 韓‧趙가 합하여 秦의 공격을 막음.
역주35 挾韓‧[魏]之質 : 《史記》에 의해 ‘魏’를 衍文으로 처리하였다.
역주36 大時己 : 《史記》에는 ‘天時己’로 되어 있다.
역주37 : 《史記》에는 ‘寗’으로 되어 있다. 魏邑. 지금의 河南省 修武縣.

전국책(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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