然而使公孫子與徐子鬪, 徐子之狗, 猶時攫公孫子之腓而噬之也.
若乃得去不肖者, 而爲賢者狗, 豈特攫其腓而噬之耳哉?”
王有所幸臣九人之屬, 欲傷安平君, 相與語於王曰:
今國已定, 而社稷已安矣, 何不使使者謝於楚王?”
且其志欲爲不善. 內
百姓, 循撫其心, 振窮補不足, 布德於民;
外懷
‧天下之賢士, 陰結諸侯之雄俊豪英. 其志欲有爲也.
然則周文王得呂尙以爲太公, 齊桓公得管夷吾以爲仲父,
且自天地之闢, 民人之
, 爲人臣之功者, 誰有厚於安平君者哉?
且王不能守先王之社稷, 燕人興師而襲齊墟, 王走而之
之山中.
安平君以惴惴之卽墨, 三里之城, 五里之郭, 敝卒七千, 禽其司馬, 而反千里之齊, 安平君之功也.
故爲棧道木閣, 而迎王與后於城陽山中, 王乃得反, 子臨百姓.
今國已定, 民已安矣, 王乃曰‘單.’ 且嬰兒之計不爲此.
초발貂勃이 항상 전단田單을 미워하여 말하였다.
안평군이 이런 말을 듣고는 짐짓 주연을 차려 놓고 초발을 불러 말하였다.
“제가 선생에게 무슨 죄를 지었기에 왜 항상 조정에서 그대의 칭찬을 듣는지요?”
“도척盜跖 집의 개가 요堯임금을 보고 짖는 것은 도척을 귀히 여기고 요임금을 천하게 여겨 그러한 것이 아니라, 개는 그 본성이 주인이 아니면 짖기 마련이지요.
또 지금 여기에 가령 공손자公孫子란 어진 자와 서자徐子라는 불초한 자가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공손자와 서자가 싸움을 하게 하면 서자 집 개는 때를 보아 공손자의 다리를 걸어서 물을 것입니다.
만약 나쁜 주인을 버리고 어진 자를 구분할 능력이 있는 개라면 어찌 다리를 걸어서 물고 늘어지겠습니까?”
이튿날 전단은 즉시 초발을 제왕齊王에게 추천해서 관직에 임명하였다.
한편 제왕에게는 아홉 명의 총신寵臣이 있었는데, 이들은 항상 전단을 비방하여 서로 입을 모아 왕에게 참소하였다.
“연燕나라가 우리 제齊나라를 쳐들어왔을 때 초왕楚王이 장군(淖齒)을 시켜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제齊나라를 돕게 하였습니다.
지금 나라가 이미 진정되고 사직도 안정되었는데 어째서 사자를 보내어 초왕楚王에게 감사를 표하지 않습니까?”
이리하여 초발은 초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초왕은 제나라의 사의謝意를 받아들이고 초발에게 연회를 베풀어 며칠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무릇 일개 미천한 초발이 만승萬乘의 초楚나라에 머물고 있는 것은 어찌 안평군의 세력을 믿고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안평군은 대왕께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키지 않아 상하의 분별이 없습니다.
또 그는 장차 좋지 않은 일을 벌이고자 안으로 백성을 끌어 모아 민심을 위무慰撫하고, 빈곤한 백성을 구제해 백성에게 은덕을 베풀고 있으며,
밖으로는 융적戎翟과 천하 현사賢士들에게 회유책을 쓰고, 몰래 제후諸侯 중 영웅호걸과 친교를 맺고 무언가 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전단은 관冠을 벗은 채 맨발로 육단肉袒하고 나갔다.
그대는 신하로서의 그대의 예를 다하면 되고, 나는 나대로 임금으로서의 예를 다하면 그뿐이오.”
초발이 초나라에서 돌아오자 왕은 여러 사람 앞에서 그에게 술을 내려 주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 한창 취흥이 오를 때 왕은 이렇게 소리쳤다.
초발은 즉시 자리를 피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대왕께선 어찌 이처럼 나라를 망칠 말씀을 하십니까?
왕께서는 위로 주周 문왕文王과 비교하여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저 역시 왕이 본디 그만 못한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래로 제齊 환공桓公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저도 왕께서 참으로 그만 못한 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 문왕은 여상呂尙(姜太公)을 만나자 그를 높여 태공太公으로 삼았고, 제 환공은 관중管仲(夷吾)를 만나자 그를 높여 중부仲父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께서는 안평군을 얻고서 도리어 그를 그저 단單이라 부르셨습니다.
천지天地가 개벽하고 사람이 생겨난 이후로 남의 신하로서 능히 안평군보다 큰 공을 세운 자가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왕께서는 도리어 단單, 단單하고 부르시니 어찌 이러한 나라를 망칠 말씀을 마구 하실 수 있습니까?
게다가 왕께서는 선왕의 사직社稷을 지켜내지 못하여, 연燕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제나라의 폐허가 된 도읍을 습격해 오자 왕께서는 성양城陽의 산 속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때 안평군은 마음을 태우며 즉묵卽墨에서 겨우 3리의 내성內城과 5리의 외곽外郭에서 패잔병 7천 명으로 연나라의 사마司馬 기겁騎劫을 사로잡아, 1천 리 잃었던 제나라 땅을 되찾았으니, 이 모두가 바로 안평군의 공로입니다.
그 당시 안평군이 왕이 계시던 성양을 포위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면 성양의 일은 천하 아무도 저지시키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도道에 맞는 계획을 세우고, 의義로 돌아가 그와 같은 일은 옳지 않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산 속의 험준한 곳에 잔도棧道와 목각木閣을 놓아 통행로를 만들어 가면서까지 성양 산 속을 찾아가 대왕과 왕후를 맞아 왔기에 임금께서 돌아와 백성에게 군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나라가 이미 안정되고 백성이 평안을 얻자 왕께서는 단單이라고 부르시니, 어린아이의 계책으로도 이렇게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왕께서 어서 이 아홉 명의 무리를 죽여 안평군에게 사죄하십시오.
왕은 이 말을 듣고 아홉 명의 무리를 죽이고 그 집안을 축출해 버렸다.
그리고는 안평군에게 액읍夜邑 1만 호戶를 더 봉封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