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王之國, 西有巴‧蜀‧漢中之利, 北有胡貉‧代馬之用,
以大王之賢, 士民之衆, 車騎之用, 兵法之敎, 可以幷諸侯, 呑天下, 稱帝而治.
“寡人聞之:毛羽不豐滿者, 不可以高飛;
不成者, 不可以誅罰. 道德不厚者, 不可以使民, 政敎不順者, 不可以煩大臣.
古者, 使車轂擊馳, 言語相結, 天下爲一, 約從連橫, 兵革不藏, 文士並飭, 諸侯亂惑, 萬端俱起, 不可勝理,
上下相愁, 民無所聊, 明言章理, 兵甲愈起, 辯言偉服, 戰攻不息, 繁稱文辭, 天下不治,
於是, 乃廢文任武, 厚養死士, 綴甲厲兵, 效勝於戰場.
夫徒處而致利, 安坐而廣地, 雖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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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明主賢君, 常欲坐而致之, 其勢不能,
是故兵勝於外, 義强於內, 威立於上, 民服於下.
今欲幷天下, 凌萬乘, 詘敵國, 制海內,
, 臣諸侯,
.
今之嗣主, 忽於至道, 皆惛於敎, 亂於治, 迷於言, 惑於語, 沈於辯, 溺於辭.
羸縢履蹻, 負書擔橐, 形容枯槁, 面目犁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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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妻不以我爲夫, 嫂不以我爲叔, 父母不以我爲子, 是皆秦之罪也.”
“安有說人主不能出其金玉錦繡, 取卿相之尊者乎?”
受相印, 革車百乘, 綿繡千純,
百雙, 黃金
, 以隨其後,
當此之時, 天下之大, 萬民之衆, 王侯之威, 謀臣之權, 皆欲決蘇秦之策.
不費斗糧, 未煩一兵, 未戰一士, 未絶一絃, 未折一矢, 諸侯相親,
.
故曰:式於政, 不式於勇; 式於廊廟之內, 不式於四境之外.
當秦之隆, 黃金萬溢爲用, 轉轂連騎, 炫熿於道,
伏軾撙銜, 橫歷天下, 廷說諸侯之王, 杜左右之口, 天下莫之能伉.
妻側目而視, 傾耳而聽; 嫂蛇行匍伏, 四拜自跪而謝.
소진蘇秦이 처음에 연횡설連橫說을 진秦 혜왕惠王에게 유세하였다.
“대왕의 국가는 서쪽으로는 파巴‧촉蜀‧한중漢中의 이익이 있고, 북쪽으로는 호지胡地에서 나는 맥피貉皮와 대代 땅에서 나는 양마良馬로 군용에 충당할 수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무산巫山과 검중黔中 등 천험天險의 요새가 있으며, 동쪽으로는 효산肴山(崤山)과 함곡관函谷關의 견고한 요새가 있습니다.
농토는 비옥하고 백성은 부유하여 전거戰車 1만 승乘에 분격奮擊 1백 만 명을 모을 수 있습니다.
옥야沃野가 1천 리나 뻗쳐 있고 축적蓄積이 풍부하며 지세地勢 또한 더없이 좋습니다.
이는 이른바 천부天府라는 곳으로 천하의 웅국雄國입니다.
그러니 대왕의 현명함과 많은 백성들에다 군대를 일으켜 훈련만 잘 시키면 제후들을 겸병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제帝를 칭하면서 통치할 수 있습니다.
“과인寡人이 듣기로 ‘깃털이 풍부하지 못한 새는 높이 날 수가 없고, 문장文章을 이루지 못한 자는 주벌誅罰을 마구 베풀 수 없으며, 도덕이 돈후하지 못한 자는 백성을 부릴 수 없고, 정교政敎가 순順하지 못한 자는 대신을 번거롭게 부리지 못한다’고 하였소.
이제 선생은 엄연儼然하게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오셔서 조정에서 나를 가르치려 하시는데, 후일에 가르침 받기를 원합니다.”
“저는 본디 대왕께서 제 말을 쓰지 못하시리라 의심하였었습니다.
옛날, 신농씨神農氏는 보수補遂를 쳤고, 황제黃帝는 탁록涿鹿에서 치우蚩尤를 쳐서 사로잡았으며, 요堯는 환도驩兜를 벌하였고, 순舜은 삼묘三苗를 벌하였으며, 우禹는 공공共工을 쳤습니다.
그리고 탕湯은 유하有夏를 치고, 문왕文王은 숭崇을 쳤으며, 무왕武王은 주紂를 쳤으며, 제齊 환공桓公은 전쟁을 하여 천하를 제패하였습니다.
이렇게 볼진대 어찌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는 사신의 수레가 달리다가 서로 부딪쳐 몇 마디 말로 약속만 하고도 천하가 통일되었는데, 그 후에는 약종約從과 연횡連橫으로도 무기를 수장收藏할 수 없게 되었으며 문사文士들은 서로 문사文辭를 수식하고, 제후들은 난혹亂惑하여 온갖 문제가 일어나 다스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법령 조문條文이 빈틈없이 갖추어질수록 백성은 허위를 짓게 되었으며, 문서가 번거롭고 어지러워져 백성은 풍족을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상하가 서로 근심하나 백성은 생활할 수가 없게 되었고, 말이 명확하고 이론이 뛰어날수록 전쟁은 더욱 일어났으며, 사자使者의 언변이 뛰어나고 복장服裝이 기위奇偉할수록 전공戰攻은 그치지 않았으며, 번거롭고 화려한 문사文辭로도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았습니다.
떠드는 자는 혀가 닳고, 듣는 자는 귀가 먹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성취한 공효는 드러나지 않으며, 설령 의義를 행하고 신信을 약속해도 천하를 서로 친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에 문치文治를 폐하고 무공武功에 맡겨,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勇士를 기르며, 갑옷을 잘 수리하고 병기를 날카롭게 하는 것만이 전장戰場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무릇 대왕께서 하는 일 없이 이익을 구한다거나 편안히 앉아서 국토 확장을 바란다면 비록 오제五帝‧삼왕三王‧오패五伯 같은 명주明主 현군賢君이라 할지라도 항상 앉아서 이를 이루어 내기란 그 형세로 보아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전쟁으로 목적을 이룰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양편 군대가 거리를 두고 있으면 서로 공격하여 접근해야 하고, 마주치면 몽둥이나 창으로 맞닥뜨려 싸운 후에야 대공大功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軍隊는 밖에서 싸워 이기고 임금은 안에서 인의仁義를 행하며, 위에서는 위망威望을 세우고, 백성은 아래에서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천하를 병탄倂呑하여 만승萬乘을 능가하며, 적국을 굴복시켜 해내海內를 제압하고, 백성을 애호하여 제후를 신하臣下로 복종시키려 한다면 전쟁이 아니고는 불가합니다.
그러나 지금 왕위를 이으신 임금께서 지극한 도리를 가벼이 여기시고, 교화에 대해서 전혀 혼암하시어 말에 미혹迷惑되고 변론에 빠져 있으며, 사설邪說에 휘말려 있습니다.
이로써 논하건대 왕께서는 진실로 능히 실행하실 수가 없습니다.”
소진은 진왕秦王에게 10여 차례 글을 지어 올렸으나 유세가 행해지지 않았다.
〈조趙나라로부터 얻은〉 흑초黑貂의 외투가 다 떨어지고, 1백 근의 황금은 바닥이 나고 자용資用은 거덜나고 말아 진秦나라를 떠나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파리한 모습에 다리를 헝겊으로 칭칭 감고 짚신을 신고 책 보따리를 둘러멘 채, 몸은 마를 대로 마르고 얼굴은 까맣게 타서 부끄러운 기색이었다.
집에 다다르니 아내는 베틀에서 내려오지도 않고, 형수는 밥도 지어 주지 않았으며, 부모조차도 말을 하려 들지 않았다.
“처는 나를 지아비로 여기지 않고, 형수는 나를 시동생으로 여기지 아니하며, 부모님은 나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으니 이 모든 게 나의 죄이다.”
그래서 책 궤짝 수십 개를 펼쳐 놓고 태공망太公望의 《음부경陰符經》의 모책謀策을 찾아내어 엎드려 읽고 외고 가려 뽑아 연습하며 열심히 연구하였다.
책을 읽다가 잠이 오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 피가 다리까지 흘러내렸다.
“군주에게 유세遊說하여 금옥, 비단 정도도 내놓게 하지 못하면서 어찌 경상卿相의 높은 지위를 얻겠는가?”
1년 후에 췌마법揣摩法을 터득하자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당세의 군왕을 설득시킬 만하다.”
그리고는 연燕나라 가까이 이르러 오집궐烏集闕이라는 요새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그곳 화옥華屋 아래에서 조왕趙王(肅侯)에게 손뼉을 치며 유세하였다.
조왕趙王은 크게 기뻐하며 소진을 무안군武安君에 봉하였다.
그리고 재상의 부인符印까지 주며, 혁거革車 1백 승乘, 비단 1천 순純, 백벽白璧 1백 쌍, 황금 1만 일鎰을 주어 그 뒤를 따르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합종合從을 맺어 연횡連橫을 흩어버리고, 강한 진秦나라를 억제하게 되었다.
이렇게 소진이 조趙나라의 재상이 되자 〈진秦나라와 통하던〉 함곡관函谷關이 막혀버렸다.
이 당시에 광대한 천하, 수많은 민중, 권위 있는 왕후, 권세 있는 모신謀臣들도 모두 소진을 통하여 정책을 결정하게 되었다.
한 말의 양식도 소비하지 않고, 한 명의 병사도 번거롭게 하지 않고, 한 병사도 싸움에 나가지 않고, 활줄 하나 끊지 않고, 화살 하나 부러뜨리지 않고도 제후가 서로 친하게 되어 형제보다 더 가깝게 되었다.
무릇 어진 사람이 임직任職하니 천하가 복종하고, 한 사람을 등용하자 천하가 따르게 된 셈이었다.
그러므로 정치로써 하였지 무력을 쓸 필요가 없었고, 조정 안에서 일을 처리하였지 변방에서 전쟁을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당시 소진의 극성시기에는 1만 일鎰의 황금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그를 따르는 거마車馬가 서로 이어져 지나는 길이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진秦나라의 효산崤山 동쪽 각국은 순풍에 풀이 눕듯이 되어 조나라를 크게 중함을 받는 위치로 올려놓게 되었다.
게다가 소진은 원래 누항陋巷의 대문이 뒤틀리고 뽕나무 지게문에 나무를 휘어 만든 돌쩌귀로 된 집의 초라한 선비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성공하여 수레에 올라서는 위의를 뽐내며 천하를 횡행橫行하였고, 조정에서 제후의 왕들에게 유세遊說할 때면 좌우 대신의 입을 다 막아 천하에 누구 하나 짝을 이룰 자가 없게 되었다.
소진이 장차 초왕楚王에게 유세하러 떠나던 길에 고향 낙양洛陽을 지나가게 되었다.
부모가 이 소식을 듣고 집을 청소하고 길을 다듬고, 음악을 준비하고 음식을 장만하여 30리 교외까지 나와 맞이하였다.
그때 처는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귀만 기울여 들을 뿐이었고, 형수는 뱀처럼 엉금엉금 기면서 네 번이나 절을 하며 꿇어앉아 잘못을 사죄하는 것이었다.
“형수는 지난번에는 그리 거만하더니 지금은 어찌 이리 겸손하십니까?”
“시숙께서 지위가 높고 돈이 많기 때문입니다.”
빈궁할 때에는 부모조차 자식이라 여기지 않더니 부귀해지자 먼 친척까지 다 두려워하는구나.
그러니 사람이 세상에 나서 권세와 부귀를 가벼이 볼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