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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策(1)

전국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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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책(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 其子變姓名, 爲太史家庸夫.
女, 奇法章之狀貌, 以爲非常人,
憐而常竊衣食之, 與私焉.
莒中及齊亡臣相聚, 求閔王子, 欲立之.
法章乃自言於莒. 共立法章爲.
襄王立, 以太史氏女爲王后, 生子.
太史敫曰:
“女無而嫁者, 非吾種也,
汙吾世矣.”
終身不覩.
君王后賢, 不以不覩之故, 失人子之禮也.
襄王卒, 子建立爲齊王.
君王后事秦謹, 與諸侯信,
以故建立四十有餘年不受兵.
嘗使使者遺君王后, 曰:
“齊多知, 而解此環不?”
君王后以示群臣, 群臣不知解.
君王后引椎, 椎破之, 謝秦使曰:
“謹以解矣.”
及君王后病且卒, 誡建曰:
“群臣之可用者某.”
建曰:
“請書之.”
君王后曰:
“善.”
取筆牘受言. 君王后曰:
君王后死後, 相齊, 多受秦間金玉, 使賓客入秦,
皆爲變辭, 勸王朝秦, 不脩攻戰之備.


민왕閔王이 살해당하다
민왕閔王이 살해당하자 그 아들 법장法章이 성명을 바꾸고 거성莒城태사씨太史氏 집 머슴이 되었다.
태사교太史敫의 딸이 법장의 모습이 특이함을 알아차리고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래서 불쌍히 여겨 항상 몰래 음식과 의복을 챙겨 주곤 하다가 결국 사통私通하게 되었다.
얼마 후 거성莒城의 여러 사람들과 제나라의 망명亡命한 신하들이 서로 모여 민왕의 아들을 찾아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법장이 이에 스스로 거성에 있음을 밝히자, 모두 함께 법장을 옹립하여 양왕襄王을 삼았다.
양왕이 즉위하자 태사씨의 딸을 왕후로 삼아, 아들 을 낳았다.
이때 태사교는 딸에게 말하였다.
“여자가 중매 없이 시집을 갔으니 내 딸이 아니다.
우리 세가世家를 더럽혔다.”
그리고는 종신토록 보지 않았다.
그러나 군왕후君王后는 어진 인물이어서 아버지가 보지 않는다고 해서 자식 된 도리를 잃는 일을 하지 않았다.
양왕이 죽자 그 아들 제왕齊王이 되었다.
군왕후君王后나라를 잘 섬겼고, 다른 제후들과도 믿음으로 사귀었다.
그 때문에 이 재위한 40여 년이 넘도록 병화兵禍를 입지 않았다.
한편 소왕昭王이 사자를 보내어 군왕후에게 옥련환玉連環을 선물하면서 말하였다.
“제나라에는 지혜로운 사람이 많다던데 이 팔찌를 풀 수 있을지 모르겠소?”
이에 군왕후는 여러 신하들에게 보여 주었지만 여러 신하 그 누구도 풀어내지 못하였다.
군왕후는 방망이를 가져다가 깨뜨리고는 진나라 사신에게 말하였다.
“삼가 풀어냈소.”
군왕후가 병들어 죽기에 이르러 을 경계하여 말하였다.
“여러 신하 중에 등용할 만한 이는 누구이다.”
건이 말하였다.
“청컨대 글로 쓰겠습니다.”
군왕후가 말하였다.
“좋다.”
붓과 목간木簡을 받아들고 말을 받아 적으려 하니, 군왕후가 말하였다.
“이 늙은이가 이미 다 잊어버렸구나.”
군왕후가 죽은 후 후승后勝나라 재상이 되어 진나라 간첩으로부터 금‧옥을 많이 받고 제나라 빈객을 진나라로 들여 보냈다.
이 빈객들은 돌아와 모두 말을 바꾸어 왕으로 하여금 진나라에 조회朝會하라고 권유하니, 이로부터 전비戰備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


역주
역주1 167. 齊閔王之遇殺 : 齊 襄王은 B.C.265년, 王后는 B.C.249년에 각각 죽었다. 이 사이 秦나라는 昭襄王(B.C.251년까지), 孝文王(B.C.250년까지), 그 뒤는 莊襄王이었다. 따라서 玉連環 사건은 秦 始皇 때 발생한 것이 아니다. 《史記》 〈田敬仲完世家〉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역주2 閔王之遇殺 : 齊 閔(湣)王은 B.C.284년 淖齒에 의해 鼔里에서 피살되었다. 160장 참조.
역주3 法章 : 閔王의 太子. 襄王이 됨. 160장 참조.
역주4 : 지금의 山東省에 있던 齊나라의 읍 이름.
역주5 太史敫 : 太史는 複姓, 敫는 이름.
역주6 襄王 : 太子 法章. 閔王의 아들이며 建의 아버지.
역주7 : 齊나라 末王. 秦나라에 들어갔다가 共城에서 굶어 죽었다. 그리하여 諡號 없이 齊王建으로 불린다.
역주8 謀(媒) : 謀는 媒의 誤記
역주9 始皇(昭王) : 始皇은 昭王의 誤記.
역주10 玉連環 : 옥으로 만든 고리나 팔찌. 안으로 서로 물려 있어 분리하거나 해체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역주11 老婦已亡(忘)矣 : 彪鮑本에는 亡이 忘으로 되어 있어 이를 따랐다. 글로 남기는 것이 위험하다고 여겨 이렇게 말을 바꾼 것으로, 왕후의 지혜로움을 표현한 것이다.
역주12 后勝 : 당시 齊나라의 재상.

전국책(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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