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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策(1)

전국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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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책(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 王庭迎, 謂范雎曰:
“寡人宜以身受令久矣.
今者, 急, 寡人日自請太后. 今義渠之事已, 寡人乃得以身受命.
躬竊閔然不敏, 敬執賓主之禮.”
范雎辭讓.
是日見范雎, 見者無不變色易容者.
秦王屛左右, 宮中虛無人, 秦王跪而請曰:
“先生何以幸敎寡人?”
范雎曰:“唯唯.” 有間, 秦王復請, 范雎曰:“唯唯.”
若是者三. 秦王跽曰:
“先生不幸敎寡人乎?”
范雎謝曰:
“非敢然也.
臣聞始時也, 身爲漁父而釣於之濱耳. 若是者, 交疏也.
已一說而立爲太師, 載與俱歸者, 其言深也.
故文王果收功於呂尙, 卒擅天下而身立爲帝王.
卽使文王疏呂望而弗與深言, 是周無天子之德, 而文‧武無與成其王也.
今臣, 羇旅之臣也, 交疏於王,
而所願陳者, 皆, 處人,
願以陳臣之陋忠, 而未知王心也, 所以問而不對者, 是也. 臣非有所畏而不敢言也.
知今日言之於前, 而明日伏誅於後, 然臣弗敢畏也.
大王信行臣之言, 死不足以爲臣患, 亡不足以爲臣憂, 漆身而爲厲, 被髮而爲狂, 不足以爲臣恥.
五帝之聖而死, 三王之仁而死, 五伯之賢而死, 之力而死, 之勇焉而死.
死者, 人之所必不免也.
處必然之勢, 可以少有補於秦, 此臣之所大願也, 臣何患乎?
伍子胥)橐載而出, 夜行而晝伏,
至於, 無以餌其口, 坐行蒲服, ,
卒興吳國, .
使臣得進謀如伍子胥, 加之以幽囚, 終身不復見, 是臣說之行也, 臣何憂乎?
, 而爲厲, 被髮而爲狂, 無益於殷‧楚.
使臣得同行於箕子‧接輿, 漆身可以補所賢之主, 是臣之大榮也, 臣又何恥乎?
臣之所恐者, 獨恐臣死之後, 天下見臣盡忠而身蹶也, 是以杜口裹足, 莫肯卽秦耳.
足下上畏太后之嚴, 下惑姦臣之態; 居深宮之中, 不離保傅之手;
終身闇惑, 無與照姦;
大者宗廟滅覆, 小者身以孤危.
此臣之所恐耳!
若夫窮辱之事, 死亡之患, 臣弗敢畏也.
臣死而秦治, 賢於生也.”
秦王跽曰:
“先生, 是何言也!
夫秦國僻遠, 寡人愚不肖, 先生乃幸至此, 此天以寡人慁先生, 而存先王之廟也.
寡人得受命於先生, 此天所以幸先王而不棄其孤也.
先生奈何而言若此!
事無大小, 上及太后, 下至大臣, 願先生悉以敎寡人, 無疑寡人也.”
范雎再拜, 秦王亦再拜.
范雎曰:
“大王之國, 北有, 南帶, 右, 左, 戰車千乘, 奮擊百萬.
以秦卒之勇, 車騎之多, 以當諸侯, 譬若馳而逐蹇兎也, 霸王之業可致.
今反閉而不敢窺兵於山東者, 是穰侯爲國謀不忠, 而大王之計有所失也.”
王曰:
“願聞所失計.”
雎曰:
“大王越韓‧魏而攻强齊, 非計也.
少出師, 則不足以傷齊; 多之則害於秦. 臣意王之計欲少出師,
而悉韓‧魏之兵則不義矣. 今見與國之不可親,
越人之國而攻, 可乎? 疏於計矣!
昔者,
齊人伐楚, 戰勝, 破軍殺將, 再辟千里, 無得者, 豈齊不欲地哉?
形弗能有也.
諸侯見齊之罷露, 君臣之不親, 擧兵而伐之,
, 爲天下笑.
所以然者, 以其伐楚而肥韓‧魏也.
此所謂藉賊兵而齎盜食者也.
王不如遠交而近攻, 得寸則王之寸, 得尺亦王之尺也.
今舍此而遠攻, 不亦繆乎?
且昔者, 之地, 方五百里, ,
功成‧名立‧利附, 則天下莫能害.
今韓‧魏, 中國之處, 而天下之樞也.
王若欲霸, 必親中國而以爲天下樞, 以威楚‧趙.
趙彊則楚附, 楚彊則趙附.
楚‧趙附則齊必懼, 懼必卑辭重幣以事秦,
齊附而韓‧魏可虛也.”
王曰:
“寡人欲親魏, 魏多變之國也, 寡人不能親.
請問親魏奈何?”
范雎曰:
“卑辭重幣以事之;
不可, 削地而賂之;
不可, 擧兵而伐之.”
於是擧兵而攻邢丘,
拔而魏請附.
“秦‧韓之地形, 相錯如繡.
秦之有韓, 若木之有蠹, 人之病心腹. 天下有變, 爲秦害者莫大於韓.
王不如收韓.”
王曰:
“寡人欲收韓, 不聽, 爲之奈何?”
范雎曰:
“擧兵而攻, 則成睪之路不通; 北斬太行之道, 則上黨之兵不下;
一擧而攻滎陽, 則其國斷而爲三.
魏‧韓見必亡, 焉得不聽?
韓聽而霸事可成也.”
王曰:
“善.”


범저范雎나라에 이르다
범저范雎나라에 이르자 (昭王)이 궁정에서 그를 맞이하여 범저에게 말하였다.
“과인은 일찍이 그대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자 한 지 오래입니다.
요즈음 의거義渠의 일이 급하여 과인은 매일 태후에게 의논을 드려야 하였는데, 이제 그 의거의 일이 끝나 과인이 비로소 그대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생각하건대 어두워 민첩하지 못하오나 우선 빈주賓主의 예로 대하겠습니다.”
범저는 사양하였다.
이날 왕을 접견하는 범저를 보고 누구 하나 놀라 얼굴색을 바꾸지 않는 자가 없었다.
진왕秦王이 좌우를 다 물러가게 하고, 방안이 비어 아무도 없자 진왕秦王은 무릎을 꿇고 청하였다.
“선생께서는 과인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렵니까?”
그러나 범저는 그저 ‘글쎄요, 글쎄요’할 뿐이었고, 잠시 후 진왕이 다시 청하였으나 범저는 역시 ‘글쎄요, 글쎄요’할 뿐이었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왕은 다시 공손히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말하였다.
“선생께서는 불행히도 과인을 가르쳐 주실 수 없다는 뜻입니까?”
그제야 범저가 사양하며 말하였다.
“감히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듣건대 처음에 여상呂尙(太公望)이 문왕文王을 만났을 때 그는 어부로서 위수渭水 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아직 서로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이윽고 문왕은 한두 마디 말을 나누어 보고 곧바로 태사太師로 삼아 수레를 태워 모시고 함께 궁으로 돌아왔으니 이는 여상의 말이 깊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왕은 여상의 힘으로 공을 거두어 마침내 천하를 차지하여 몸이 제왕帝王이 된 것입니다.
만약 문왕文王이 여상을 소홀히 여겼거나, 여상도 깊은 말을 나누지 않았더라면 나라는 천자의 을 세우지 못하였을 것이며, 아무리 문왕文王무왕武王이라 할지라도 왕업王業을 성공시키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저는 기려지신羇旅之臣이요, 게다가 왕과 친한 사이도 아닙니다.
제가 진술陳述하고자 하는 말은 모두 대왕의 정사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기는 하나 대왕의 골육骨肉과 관계된 일입니다.
저의 변변찮은 충정을 진술하고 싶지만 왕의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왕께서 세 번이나 물으시도록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이지, 신이 두려워서 감히 말씀드리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대왕 앞에서 말씀드리면 내일 돌아서서 주살誅殺당하리라는 사실을 알지만, 저는 감히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대왕께서 진실로 제 말을 실행해 주시기만 한다면 죽음도 근심거리가 되기에 부족하며, 도망하는 것도 신의 근심이 되기에 부족하고, 또 몸에 옻칠을 해 문둥병자가 되고 머리를 풀어헤쳐 미치광이가 되어도 저의 치욕恥辱이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오제五帝 같은 성인聖人도 죽었고, 삼왕三王 같은 인자仁者도 죽었으며, 오패五霸 같은 현자賢者도 죽었고, 오획烏獲 같은 힘센 자도 죽었으며, 같은 용사도 죽었습니다.
죽음이란 사람 누구나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필연 속에 살면서 조금이나마 나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 저의 큰 소원인데 무엇을 근심하겠습니까?
오자서伍子胥는 보따리 하나를 들고 나라를 도망쳐 소관昭關을 빠져 나와 밤에는 걷고, 낮이면 숨었습니다.
그러다가 능수蔆水 땅까지 와서는 먹을 게 없어 겨우 앉은뱅이 걸음으로 걷고 기어 오시吳市에서 걸식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나라를 부흥시켜 합려闔廬패자霸者가 되게 했습니다.
가령 제가 오자서처럼 모책을 말씀드렸는데 오히려 저를 가두어 다시는 세상 빛을 보지 못하게 한다 해도 제 의견이 실행만 된다면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기자箕子접여接輿칠신漆身하여 문둥병자처럼 되고, 피발披髮하여 미치광이가 되었지만 나라나 나라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였습니다.
저로 하여금 기자나 접여처럼 몸에 옻칠을 하더라도 어진 임금에게 보탬이 된다면 그것이 바로 저의 큰 영광이 될 텐데 제가 무엇을 부끄러워하겠습니까?
다만 걱정하는 것은 제가 죽은 뒤에 천하 사람들이 충성을 다한 사람이 억울하게 죽은 것을 보고, 이 때문에 입을 다물고 발을 묶은 채 더 이상 나라로 오지 않으려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족하足下께서는 위로 태후太后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간신姦臣들의 태도에 미혹되어 깊은 궁중에 처한 채 보부保傅의 손길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종신토록 암혹闇惑에 파묻혀, 어느 것이 간사한 것인지 알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크게는 종묘가 엎어질 것이요, 작게는 대왕의 몸이 위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걱정하는 것입니다.
궁욕窮辱을 당하는 일이나, 죽음에 대한 걱정 따위는 제가 겁내지 않습니다.
제가 죽고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면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다고 여깁니다.”
소왕이 허리를 구부리며 말하였다.
“선생, 그것이 무슨 말씀이오!
우리 나라는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벽지에 있고 게다가 과인이 우매 불초한데도 다행히 선생 같은 분이 와 주셨으니, 이는 하늘이 과인으로 하여금 선생을 번거롭게 하여 선왕先王사당祠堂을 보존하게 하려 함입니다.
그리고 과인이 선생의 명을 듣도록 함은, 하늘이 선왕을 좋게 여겨 저를 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일의 크고 작은 것에 관계없이 위로는 태후에게 미치고 아래는 대신에 이르는 일까지, 원컨대 선생께서 모든 것을 과인에게 가르쳐 주시어 과인을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범저가 재배再拜하니 진왕 역시 재배하였다.
범저가 말하였다.
“대왕의 나라는 북쪽으로 감천甘泉곡구谷口가 있고, 남쪽은 경수涇水위수渭水에 접해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 왼쪽으로는 이 있으며 전거戰車 1천 분격奮擊하는 군사가 1백만 명이나 됩니다.
이런 나라 군사의 용맹과 많은 거기車騎를 가지고 제후를 대적하는 것은, 비유컨대 마치 명견名犬 한로韓盧가 절름발이 토끼를 쫓는 것과 같아 패왕霸王의 과업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관문을 닫고 감히 동쪽 여러 나라들에게 군사의 위력을 뽐내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지금 재상인 양후穰侯(魏冉)가 대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지 않아 대왕의 계책이 잘못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왕이 말하였다.
“그 잘못된 계책이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범저가 말하였다.
“대왕께서 가까운 나라‧나라를 넘어 멀리 강한 나라를 치고자 하는 것이 실책입니다.
왜냐하면 적은 군사로는 나라에 손상을 주기에 부족하고, 많은 군사를 보내면 나라에 해가 막심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대왕의 계책은 적은 군사를 내어 한나라와 위나라의 군사까지 연합하려 한 모양이나 이는 옳은 계책이 못 됩니다.
지금 보면 동맹국이라고는 하지만 서로 친하지 않은데 남의 나라를 건너뛰어 공격하고자 하면 옳겠습니까?
계책이 너무 소홀합니다.
옛날 나라가 나라를 쳐서 군사를 격파하고 장수를 죽여 강토를 1천 리나 넓혔지만, 그러나 한 치의 땅도 얻지 못하였는데 어찌 제나라가 땅을 갖기 싫어해서 그랬겠습니까?
형세로 보아 소유할 수 없는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제후들이 제나라가 피로해 지치고 군신간에 내분內紛이 일어난 것을 알고는 군대를 일으켜 공격해 왔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욕을 당하고 군대는 깨져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제나라가 그렇게 된 것은 멀리 있는 초나라를 치면서 가까운 한나라와 위나라를 비대하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우를 일러 도적에게 무기를 빌려주고 강도에게 식량을 준다는 것입니다.
왕께서는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을 쓰느니만 못하니, 그렇게 하면 한 치의 땅을 얻으면 왕의 한 치 땅이 될 것이요, 한 자의 땅을 얻으면 한 자의 땅이 왕의 땅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계책을 버리고 원공遠攻을 고집하시니 이 역시 잘못이 아닙니까?
또 지난번 중산中山의 땅만 보더라도 5백 리나 되는 땅을 나라가 혼자 독차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도 이루고 이름도 세웠으며 이익까지 얻었지만 누구 하나 조나라를 비방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나라와 위나라는 중국中國에 위치해 있어 천하의 중추中樞가 되는 곳입니다.
대왕이 만약 천하를 제패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 중국에 있는 나라와 친하게 해서 이를 천하의 중추로 삼고 나라와 나라를 위압하셔야 합니다.
조나라가 강해지면 초나라가 친부親附해 오고 초나라가 강해지면 조나라가 친부해 오게 됩니다.
이렇게 나라와 나라가 나라에 친부해 오면 나라는 틀림없이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며, 두려워하면 반드시 겸손한 말과 많은 보물로 진나라를 섬길 것입니다.
이렇게 제나라까지 나라에 친부하면 나라와 나라는 빈 땅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진왕이 말하였다.
“과인은 나라와 친하고 싶지만 위나라는 변덕이 심한 나라여서 과인은 능히 그들과 친할 수가 없습니다.
청하여 묻건대 위나라와 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범저가 말하였다.
“겸손한 말과 많은 재물로 그들을 섬기십시오.
그것도 안 되면 땅을 떼어서 뇌물로 주십시오.
그것도 안 되겠거든 군대를 일으켜 쳐버리십시오.”
이에 나라는 군대를 일으켜 나라의 형구邢丘 땅을 공격하였다.
형구가 점령당하자 위나라는 진나라에 귀부歸附하기를 청하였다.
범저가 말하였다.
“진나라와 나라와의 지리 형세는 서로 얽힌 것이 마치 비단실들이 얽혀 옷감을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진나라에게 있어서 한나라는 나무에 좀이 있는 것과 같고, 사람의 심복心腹에 병이 있는 것과 같아 천하에 변고가 생기면 나라에게 있어서 나라보다 더 가 될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니 나라도 거두느니만 못합니다.”
왕이 말하였다.
“과인이 나라를 거두어들이려 하나 한나라가 들어주지 않으니 어떻게 하면 되겠소?”
범저가 말하였다.
“군대를 일으켜 형양滎陽 땅을 치면 성고成睪의 길이 막히고, 북쪽 태항太行의 길을 끊어 버리면 상당上黨의 군대들이 내려오지 못합니다.
이렇게 일거에 형양 땅을 공격하면 나라는 셋으로 끊어져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위나라와 한나라는 자기 나라가 곧 망하게 될 것을 보고 어찌 대왕의 말을 듣지 않겠습니까?
나라가 진나라의 말을 듣게 되면 패업霸業을 이룰 수 있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좋소.”


역주
역주1 083. 范雎至秦(上) : 위의 내용에서처럼 范雎는 遠交近攻策을 주장하였고, 《史記》 〈范雎蔡澤列傳〉에도 그대로 실려 있는데 대략 B.C.266년쯤의 일이다.
역주2 范雎至秦 : 《史記》 〈范雎蔡澤列傳〉에 의하면 당시 范雎가 昭王을 만날 때 離宮의 내전에 들어가 宦者가 王이 오고 있다면서 내치자 “秦나라에 왕은 없다. 太后와 穰侯가 있을 뿐이다.”라고 선언한 후였다.
역주3 義渠之事 : 義渠는 고대 西戎國 이름. 당시 宣太后가 義渠戎王과 사통하여 두 아들까지 낳았다. 그 때문에 昭王이 군대를 일으켜 義渠를 쳐 멸망시켜 縣을 설치하였다.
역주4 呂尙之遇文王 : 呂尙은 周나라 때 東海人. 본성은 姜. 그 선조가 呂에 봉해졌기 때문에 呂尙이라 한다. 늙도록 渭水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었는데, 文王이 사냥을 나가서 만나 말을 해보고 “우리 할아버지 太公께서 그대를 기다린 지 오래다.[吾太公望子久矣]”라 하고는 太公望이라 이름 짓고 함께 돌아와 師를 삼았다. 그후 武王 때 폭군 紂를 멸하고 천하를 장악하여 武王이 師尙父로 삼았으며, 齊에 봉해져 齊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史記》 〈齊太公世家〉‧〈周本紀〉 참조.
역주5 渭陽 : 渭水의 북쪽. “강의 북쪽, 산의 남쪽을 陽이라 한다.[江北山南曰陽]” 지금의 陝西省 岐山縣 城南河.
역주6 匡君之[之]事 : 匡君之事의 오기이다.
역주7 骨肉之間 : 宣太后‧穰侯가 모두 昭王의 골육이기 때문에 한 말.
역주8 王三 : 夏(禹)‧商(湯)‧周(文‧武) 등 開國 始祖.
역주9 烏獲 : 戰國 때의 秦나라 力士. 武王과 洛陽에 가서 鼎을 들었던 인물.
역주10 : 力士 孟賁을 가리킴. 일명 孟說. 맨손으로 살아 있는 소의 뿔을 뽑았다고 하는데 烏獲과 함께 武王을 따라 洛陽에 갔다.
역주11 : 夏育. 衛나라 사람으로 1천 鈞을 들 수 있고 소꼬리를 뽑을 수 있었다고 함.
역주12 昭關 : 吳나라와 楚나라 국경에 있는 관문. 安徽省 含山縣에 있었다.
역주13 蔆水 : 《史記》에는 陵水로 되어 있다. 물 이름.
역주14 乞食於吳市 : 吳市는 지금의 江蘇省 溧陽縣. 《史記》 〈伍子胥列傳〉에 “伍員이 吳나라에 채 못 미쳐 병이 나서 중도에서 멈춰 걸식을 하였다.[伍員未至吳而疾 止中道乞食]”라고 하였다.
역주15 闔廬爲霸 : 원래 春秋시대 五霸는 齊 桓公‧宋 襄公‧秦 繆公‧晉 文公‧秦 莊王을 말하지만 《荀子》는 秦 繆公과 宋 襄公 대신 越 勾踐과 吳 闔廬(闔閭)를 넣었다.
역주16 箕子 : 商나라 末의 폭군 紂의 숙부. 이름은 胥餘. 太師였으며 子爵, 箕 땅에 봉해져 기자라 하였다. 紂가 무도하여 忠諫하였으나 듣지 않자 머리를 풀어 헤치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며 숨었다.
역주17 接輿 : 春秋 때 사람으로 孔子와 같은 시기 楚나라 사람. 이름은 陸通. 楚 昭王 때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거짓으로 미친 체하면서 벼슬하지 않았다. 昭王이 雙駟와 百金으로 초빙하였으나 거절하고 부부가 성명을 바꾸고 蜀의 峨嵋山에 숨어 살았다고도 한다. 《論語》 〈微子〉篇에 공자와 마주친 얘기가 나온다.
역주18 원주] 漆身 : 어떤 本에는 漆身 두 글자가 없다.
역주19 甘泉 : 山名. 지금의 陝西省 淳化縣, 속칭 磨石嶺.
역주20 谷口 : 지금의 陝西省 涇陽縣 古寒門.
역주21 涇‧渭 : 황하의 상류. 甘肅省에서 陝西省을 거쳐 흐르는 황하의 지류인 涇水와 渭水. 涇水는 흐리고 渭水는 맑음.
역주22 隴‧蜀 : 隴은 隴坡라고도 하며 甘肅省 동남부. 蜀은 四川省 북부 劍閣 일대 漢中의 험요한 곳.
역주23 關‧阪 : 關은 函谷關, 阪은 지금의 섬서성 商縣 동쪽의 商山.
역주24 韓盧 : 韓나라에서 산출되는 좋은 사냥개. 《漢書》 〈王莽傳〉 註에 “韓盧는 옛 韓나라에서 나는 名犬인데 검은 색을 盧라 한다.[韓盧 古韓國之名犬也 黑色曰盧]”라고 하였다. 韓獹라고도 쓴다.
역주25 膚寸之地 : 아주 작은 땅. 손가락 하나를 1寸이라 하고 손가락 네 개를 膚라 한다.
역주26 主辱軍破 : 燕 昭王 28년에 燕將 樂毅가 秦, 楚, 韓, 魏, 趙와 연합하여 齊의 70여 성을 빼앗고 齊 湣(閔)王을 莒로 도망쳐 죽게 한 일을 말한다.
역주27 中山 : 지금의 하북성 定縣과 唐縣 일대에 있던 나라.
역주28 趙獨擅之 : 趙 武靈王 때 趙나라가 독자적으로 中山國을 멸망시킨 일을 말한다.
역주29 邢丘 : 처음에는 魏나라 땅이었는데 뒤에 秦나라가 빼앗았다. 지금의 河南省 溫縣.
역주30 : 이하의 말은 上文과 이어진 것이 아니고 秦 昭王 39년에 范雎의 말을 듣고 2년 뒤에 魏를 복속시킨 후 范雎가 韓에 대한 책략을 말한 것이다.
역주31 滎陽 : 戰國 때 韓나라의 邑. 지금의 河南省 滎陽縣. 榮陽이라고도 쓴다.

전국책(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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