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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策(1)

전국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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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책(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書錄
護左都水使者光祿大夫臣向言:
所校中戰國策書, 餘卷, 錯亂相糅莒. 又有國別者八篇, 少不足.
臣向因國別者, 略以時次之, 分別不以序者以相補, 除復重, 得三十三篇.
本字多誤脫爲半字, 以趙爲肖, 以齊爲立, 如此 者多.
中書本號, 或曰國策, 或曰國事, 或曰短長, 或曰事語, 或曰長書, 或曰脩書.
臣向以爲戰國時, 游士輔所用之國, 爲之筴謀, 宜爲 戰國策.
其事繼春秋以後, 訖楚‧漢之起, 二百四十五年間之事, 皆定以殺靑, 書可繕寫.
敍曰
: 周室自文‧武始興, 崇道德, 隆禮義, 設辟雍泮宮庠序之敎, 陳禮樂弦歌移風之化.
敍人倫, 正夫婦, 天下莫不曉然.
論孝悌之義, 惇篤之行, 故仁義之道滿乎天下, 卒致之刑錯四十餘年.
遠方慕義, 莫不賓服, 雅頌歌詠, 以思其德.
下及康‧昭之後, 雖有衰德, 其綱紀尙明.
及春秋時, 已四‧五百載矣, 然其餘業遺烈, 流而未滅.
五伯之起, 尊事周室.
五伯之後, 時君雖無德, 人臣輔其君者, 若鄭之子産‧晉之叔向, 齊之晏嬰, 挾君輔政, 以並立於中國,
猶以義相支持, 歌說以相感, 聘覲以相交, 以相一, 盟誓以相救.
天子之命, 猶有所行. 會享之國, 猶有所恥.
小國得有所依, 百姓得有所息.
故孔子曰: 能以禮讓爲國乎何有? 周之流化, 豈不大哉!
及春秋之後, 衆賢輔國者旣沒, 而禮義衰矣.
孔子雖論詩書, 定禮樂, 王道粲然分明, 以匹夫無勢, 化之者七十二人而已, 皆天下之俊也, 時君莫尙之.
是以王道遂用不興, 故曰: 非威不立, 非勢不行.
仲尼旣沒之後, 田氏取齊, 六卿分晉, 道德大廢, 上下失序.
至秦孝公, 捐禮讓而貴戰爭, 弃仁義而用詐譎, 苟以取强而已矣.
夫簒盜之人, 列爲侯王; 詐譎之國, 興 爲强.
是以 相放效, 後生師之, 遂相呑滅, 幷大兼小, 暴師經歲, 流血滿野,
父子不相親, 兄弟不相安, 夫婦離散, 莫保其命, 湣然道德絶矣.
晩世益甚, 萬乘之國七, 千乘之國五, 敵侔爭權, 蓋爲戰國.
貪饕無恥, 競進無厭; 國異政敎, 各自制斷;
上無天子, 下無方伯; 力功 爭强, 勝者爲右; 兵革不休, 詐僞並起.
當此之時, 雖有道德, 不得施謀; 有設之强, 負阻而恃固;
連與交質, 重約結誓, 以守其國.
故孟子‧孫卿儒術之士, 弃捐於世, 而游說權謀之徒, 見貴於俗.
是以蘇秦‧張儀‧公孫衍‧陳軫‧代‧厲之屬, 生從橫短長之說, 左右傾側.
蘇秦爲從, 張儀爲橫; 橫則秦帝, 從則楚王; 所在國重, 所去國輕.
然當此之時, 秦國最雄, 諸侯方弱, 蘇秦 之, 時六國爲一, 以儐背秦.
秦人恐懼, 不敢闚兵於關中, 天下不交兵者, 二十有九年.
然秦國勢便形利, 權謀之士, 咸先馳之.
蘇秦初欲橫, 秦弗用, 故東合從.
及蘇秦死後, 張儀連橫, 諸侯聽之, 西向事秦.
是故始皇因四塞之固, 據崤‧函之阻, 跨隴‧蜀之饒, 聽衆人之筴, 乘六世之烈, 以蠶食六國, 兼諸 , 幷有天下.
杖於謀詐之弊, 終 信篤之誠, 無道德之敎, 仁義之化, 以綴天下之心. 任刑罰以爲治, 信小術以爲道.
遂燔燒詩書, 坑殺儒士, 上小堯‧舜, 下邈三王.
二世愈甚, 惠不下施, 情不上達; 君臣相疑, 骨肉相疏; 化道淺薄, 綱紀壞敗; 民不見義, 而懸於不寧.
撫天下十四歲, 天下大潰, 詐僞之弊也. 其比王德, 豈不遠哉!
孔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夫使天下有所恥, 故化可致也.
苟以詐僞偸活取容, 自上爲之, 何以率下?
秦之敗也, 不亦宜乎!
戰國之時, 君德淺薄, 爲之謀筴者, 不得不因勢而爲資, 據時而爲□.
故其謀, 扶急持傾, 爲一切之權, 雖不可以臨敎化, 兵革 救急之勢也.
皆高才秀士, 度時君之所能行, 出奇筴異智, 轉危爲安, 運亡爲存, 亦可喜, 皆可觀.
護左都水使者光祿大夫臣向所校戰國策書錄.


서록
호좌도수사자護左都水使者 광록대부光祿大夫 유향劉向은 아뢰옵니다.
교감한 가운데 《전국책戰國策》은 중서中書에 남아 있는 죽간竹簡착란錯亂 혼란混亂하였으며 또 나라별로 된 8이 있었으나 분량이 적어서 불완전한 상태였습니다.
은 나라별로 된 것을 인하여 대략 시대별로 차례를 정하되, 차례에 따라 분별할 수 없는 것은 서로 보충하고, 중복된 것은 삭제하여 33편을 얻었습니다.
글자의 오탈誤脫반자半字로 된 것이 많아 ‘’ 는 ‘’로, ‘’는 ‘’으로 된 것 등 이런 가 많습니다.
중서中書의 본래 서명書名은 혹 《국책國策》, 《국사國事》, 《단장短長》, 《사어事語》, 《장서長書》, 《수서脩書》 등으로 되어 있는데
의 생각으로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유사游士들이 그들을 임용하는 나라의 정사를 보좌하여 책모策謀하였으니, 《전국책戰國策》이라고 해야 마땅할 듯합니다.
그 일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이후를 이어 이 일어나기까지 2백 45년간의 일을 하여 모두 죽간竹簡에다 써 놓았는데 선사繕寫할 만하였습니다.
다음과 같이 합니다.
나라는 문왕文王무왕武王이 처음 흥하면서 도덕道德을 숭상하고 예의禮義를 높여 벽옹辟雍반궁泮宮상서庠序의 학교를 설치하였으며, 예악禮樂현가弦歌로 풍속을 바꾸는 교화를 베풀었습니다.
그리하여 인륜人倫을 펴고 부부夫婦 관계를 바로잡아 천하에 환히 밝혀지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효제孝悌돈독惇篤한 행실을 논하여 그 때문에 인의仁義가 천하에 가득하여 마침내 40여년 동안 형벌刑罰을 쓰지 않아도 되었던 것입니다.
이역異域에서 그 를 사모하여 빈복賓服해 오지 않음이 없었으니, 으로 이것을 노래하고 읊어 그 덕을 사모하였습니다.
그 아래 강왕康王소왕昭王 이후에는 비록 은 쇠하였지만 강기綱紀는 그래도 밝았습니다.
춘추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4‧5백년이 되었는데도 그 여업餘業 유열遺烈이 흘러 아직 사라지지 않았었습니다.
오패五霸가 일어나서는 나라를 높이 섬겼으며
오패五霸 이후에는 당시 군주가 비록 은 없었지만 신하로서 그 임금을 잘 보좌한 자들, 이를테면 나라의 자산子産, 나라의 숙향叔向, 나라의 안영晏嬰은 임금을 끼고 정치를 보필하여 중국中國(中原)에 병립並立하였는데도
오히려 로써 서로 지지支持하고 가설歌說로 서로 교감交感하고 빙근聘覲으로 서로 교제하였으며, 조회朝會하여 서로 하나가 되고, 회맹會盟하여 서로 구제하였습니다.
천자天子은 그런대로 시행되는 바가 있었으며 회향會享하는 나라가 아직도 염치를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작은 나라는 의지할 바를 얻을 수 있었으며 백성은 휴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공자孔子는 “능히 예양禮讓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나라의 유화流化가 어찌 크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춘추시대 이후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보필하던 여러 현인들이 이미 사라지고 예의禮義는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공자孔子가 비록 시서詩書하고, 예악禮樂하여 왕도王道가 찬연히 밝아졌지만 필부匹夫로서 권세가 없어 교화시킨 자가 72인뿐이었고 모두 천하의 준재俊才들이었지만 당시 군주가 숭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도王道가 마침내 중흥中興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위엄威嚴이 아니면 서지 못하고, 세력勢力이 아니면 행할 수가 없다’라고 한 것입니다.
중니仲尼한 후 전씨田氏나라를 취하였고, 육경六卿나라를 분할하여 도덕道德이 크게 무너지고 상하上下의 질서를 잃고 말았습니다.
나라 효공孝公에 이르러서는 예양禮讓을 버리고 전쟁을 숭상하였으며, 인의仁義를 버리고 사휼詐譎을 쓰면서 구차하게 강대强大함만 취하였습니다.
이에 찬탈簒奪하는 자가 후왕侯王이 될 수 있었고, 사휼詐譎한 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강국强國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전해 가며 이를 모방하고 흉내 내어 뒤에 태어난 자들이 스승으로 삼아 드디어 서로를 멸망시켜서 크고 작은 나라를 병탄倂呑하며, 전쟁이 해를 넘기어 유혈流血이 들에 가득하였으며,
부자父子가 서로 친할 수 없고, 형제가 서로 편안할 수 없었으며, 부부가 이산離散하여 목숨을 보전할 수 없게 되어 도덕道德이 아주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만세晩世에는 더욱 심하여 만승萬乘의 나라가 일곱이요, 천승千乘의 나라가 다섯이었는데 서로 세력이 비슷하여 권력을 다투어 전국戰國이 된 것입니다.
탐욕貪慾스럽고 염치가 없었으며 경진競進하기에 싫증 낼 줄을 몰랐으며, 나라마다 정교政敎가 달라 각자 전단專斷하였습니다.
그래서 위로는 천자天子가 없고 아래로는 방백方伯이 없었으며 힘과 속임수로 강자强者가 되기를 다투어, 이긴 자가 우위를 차지하니, 전쟁이 그치지 않고 속임수와 허위가 아울러 일어났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비록 도덕道德이 있다 하더라도 시행할 수가 없었으며, 부강富强하기를 꾀하고 험조險阻함을 자랑하고 믿었습니다.
연달아 인질人質을 교환하고, 거듭 맹약을 맺어 나라를 지켰습니다.
그래서 맹자孟子손경孫卿(荀子) 같은 유술지사儒術之士는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도리어 유세遊說권모權謀의 무리가 세속世俗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소진蘇秦장의張儀공손연公孫衍진진陳軫소대蘇代소려蘇厲의 무리가 합종合從 연횡連橫장단설長短說을 내자 좌우가 거기에 쏠리게 되었습니다.
소진蘇秦합종설合從說을 주장하였고, 장의張儀연횡설連橫說을 내세웠으니, 연횡連橫하면 나라가 가 되는 것이요, 합종合從하면 나라가 이 된다는 것으로 그들이 머물고 있는 나라는 중시重視되고 떠나버리면 경시輕視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나라가 가장 웅강雄强하고 나머지 제후는 바야흐로 약해서 소진蘇秦이 이를 결집시키니, 당시 육국六國이 하나가 되어 나라를 배척하였습니다.
나라 사람들은 이를 두려워하여 감히 관중關中에서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여 천하에 29년 동안이나 교전交戰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형세가 유리해지자 권모權謀의 선비들이 모두 앞다투어 나라로 달려갔습니다.
소진蘇秦이 초기에는 연횡책連橫策을 쓰려고 하였으나 나라에서 써 주지 않자 동쪽으로 가서 합종책合從策을 폈습니다.
소진蘇秦이 죽고 나서 장의張儀연횡설連橫說을 주장하니, 제후들이 이를 듣고 서쪽 나라를 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진시황秦始皇은 사방이 막힌 요새要塞를 이용하여 효산崤山함곡관函谷關의 험고함을 의거하고, 다시 의 풍요함을 차지해서 많은 사람의 모책을 듣고 육대六代공렬功烈에 편승해 육국六國잠식蠶食하고 제후諸侯를 겸병하여 천하天下를 소유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사謀詐의 폐단에 의지하여 끝내 신독信篤의 성실함이 없었으며 도덕道德의 가르침과 인의仁義의 교화로 천하의 마음을 묶지 못하여 형벌刑罰로 다스림을 삼았으며, 소술小術로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시서詩書를 불태우고 유사儒士갱살坑殺하여 위로는 을 하찮게 여기고 아래로는 삼왕三王을 깔보았습니다.
이세二世(胡亥)가 더욱 심하여 아래로 은혜를 베풂이 없고, 아래의 뜻이 위로 통하지 않았으며, 군신君臣이 서로 의심하고 골육骨肉이 서로 소원疎遠해졌으며, 교화敎化도덕道德천박淺薄해지고 강기綱紀가 무너졌으며, 백성들이 를 보지 못하고 불안不安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에 천하天下를 다스린 지 14년 만에 천하가 크게 궤멸하고 말았으니 이는 사위詐僞폐해弊害로, 왕도王道에 비하면 어찌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공자孔子는 “정사政事로 인도하고 형벌刑罰로 가지런하게 하면 백성들이 형벌을 면할 수는 있으나 부끄러워함은 없을 것이다.
으로 인도하고 로써 가지런하게 하면 부끄러워함이 있고 또 에 이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천하로 하여금 부끄러워함이 있게 하기 때문에 교화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거짓되고, 구차히 살기를 꾀하고, 구차히 영합迎合하는 일을 윗사람이 먼저 한다면 어떻게 아랫사람을 통솔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가 망한 것은 마땅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전국시대는 임금의 천박淺薄하여 모책謀策하는 자들이 부득이 그런 형세를 바탕으로 삼고, 시대에 부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책이 위급함을 붙들고, 기우는 것을 부축하는 것이어서 일체一切권변權變을 행하여, 비록 교화敎化에 이르게 하지는 못했지만 전쟁의 급함을 구제하는 힘은 되었습니다.
인물人物들은 모두 재주가 높은 빼어난 선비들로서 당시 임금의 행할 바를 헤아려 기이한 계책과 특이한 지모智謀를 내어 위험을 돌려 안전하게 하고, 망할 것을 돌려 존속하게 해서 재미있고 읽어 볼 만합니다.
호좌도수사자광록대부護左都水使者光祿大夫 유향劉向교정校正전국책戰國策 서록書錄입니다.


역주
역주1 中書 : 帝王의 장서를 보관하던 곳.
역주2 : 어떤 本에는 類로 되어 있다.
역주3 : 集賢院本에는 曰 아래에 夫자가 있다.
역주4 期(朝)會 : 원주에 “集賢院本에는 朝會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여 이를 따랐다.
역주5 立(兵) : 원주에 “錢藻本에는 立, 曾鞏本에는 兵으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曾鞏本을 따라 立을 兵의 誤字로 보았다.
역주6 : 어떤 本에는 轉으로 되어 있다.
역주7 : 曾鞏本에는 巧로 되어 있고, 劉敞本에는 功으로 되어 있다.
역주8 : 錢藻本‧劉敞本에는 結 아래에 從자가 있다.
역주9 : 어떤 本에는 侯 아래에 而자가 있다.
역주10 於(無) : 臺本(四部刊要本)에는 於로 되어 있으나, 無의 誤字로 보이므로 고쳐 번역하였다.
역주11 : 錢藻本에는 革 아래에 亦자가 있다.

전국책(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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