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侯爵이며 희성姬姓으로, 주周 문왕文王의 아들 필공畢公 고高의 후손이다. 대대로 진晉나라 경卿벼슬을 지냈으며, 주周 열왕烈王 때 조趙와 함께 진晉나라를 과분瓜分한 후(B.C.453) 문후文侯 때 주周 위열왕威烈王으로부터 정식 제후로 승인 받아(B.C.403) 삼진三晉의 하나로 제후의 반열에 올라 전국칠웅戰國七雄이 되었으며 처음 도읍은 안읍安邑(지금의 산서성山西省 하현夏縣)이었다. 초기 문후文侯는 영명한 군주로서 전자방田子方‧서문표西門豹 등 능력 있는 신하를 등용하여 정치의 안정과 생산의 증대를 꾀하였고, 이회李悝의 변법을 실행하여 전국 초기에는 가장 세력이 강한 나라 중에 하나로 국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秦나라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동쪽 여섯 나라 중에 가장 먼저 그들 동진정책東進政策의 예봉銳鋒을 피할 수 없어 혜왕惠王 때 대량大梁(지금의 하남성河南省 개봉시開封市)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 때문에 사서史書에는 위魏나라를 양梁나라로 부르기도 한다. 그 뒤 다시 합종 연횡의 정세를 잘 활용하여 중흥을 꾀하였고 특히 전국 사공자의 하나인 신릉군信陵君 때에는 나라의 지위가 상승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릉전투馬陵戰鬪(B.C.341)에서 제齊나라에게 크게 패한 후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여 결국 179년 만에 진秦나라 천하통일 전투에 휩쓸려 망하고 말았다.(B.C.225) 이 위魏나라의 역사에 대하여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 〈위세가魏世家〉에 그 내용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한편 이 위나라의 영역에 대해 포표鮑彪의 주注에는 “위魏나라는 고릉高陵으로부터 동쪽으로 하동河東‧하내河內를 모두 차지하고 있었으며, 남쪽으로는 진류陳留와 여남汝南의 소릉召陵‧은강隱彊‧신급新汲‧서화西華‧장평長平까지, 그리고 영천潁川의 무양舞陽‧언郾‧허許‧언릉傿陵, 다시 하남河南의 개봉開封‧중모中牟‧양무陽武‧산조酸棗‧권卷의 모든 지역이 그 영토였다.”라 하여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북부 전체와 산서성山西省의 서남부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