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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策(2)

전국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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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王旣息民繕兵, 復欲伐趙.
武安君曰:
“不可.”
王曰:
“前年國虛民飢, 君不量百姓之力, 求益軍糧以滅趙.
今寡人息民以養士, 蓄積糧食, 三軍之俸有倍於前, 而曰‘不可’, 其說何也?”
武安君曰:
, 秦軍大剋, 趙軍大破;
秦人歡喜, 趙人畏懼.
秦民之死者厚葬, 傷者厚養, 勞者相饗, 飮食餔餽, 以靡其財;
趙人之死者不得收, 傷者不得療,
涕泣相哀, 戮力同憂, 耕田疾作, 以生其財.
今王發軍, 雖倍其前, 臣料趙國守備, 亦以十倍矣.
趙自長平已來, 君臣憂懼, 早朝晏退, 卑辭重幣四面, 出嫁結親燕‧魏, 連好齊‧楚,
積慮幷心, 備秦爲務.
其國乃實, 其交外成. 當今之時, 趙未可伐也.”
王曰:
“寡人旣以興師矣.”
乃使王陵將而伐趙.
陵戰失利, 亡五校.
王欲使武安君, 武安君稱疾不行.
王乃使往見武安君, 責之曰:
“楚, 地方五千里, 持戟百萬.
君前率數萬之衆入楚, 拔鄢‧郢, 焚其廟, 東至, 楚人震恐, 東徙而不敢西向.
韓‧魏相率, 興兵甚衆, 君所將之不能半之, 而與戰之於, 大破二國之軍, 流血漂鹵, 斬首二十四萬.
韓‧魏以故至今稱東藩.
此君之功, 天下莫不聞.
今趙卒之死於長平者已十七‧八, 其國虛弱,
是以寡人大發軍, 人數倍於趙國之衆,
願使君將, 必欲滅之矣.
君嘗以寡擊衆, 取勝如神, 況以彊擊弱, 以衆擊寡乎?”
武安君曰:
“是時楚王恃其國大, 不恤其政, 而羣臣相妬以功, 諂諛用事,
良臣斥疎, 百姓心離, 城池不修, 旣無良臣, 又無守備.
故起所以得引兵深入, 多倍城邑, 發梁焚舟以專民, 掠於郊野, 以足軍食.
當此之時, 秦中士卒, 以軍中爲家, 將帥爲父母, 不約而親, 不謀而信,
一心同功, 死不旋踵;
楚人自戰其地, 咸顧其家, 各有散心, 莫有鬪志.
是以能有功也.
伊闕之戰, 韓孤顧魏, 不欲先用其衆;
魏恃韓之銳, 欲推以爲鋒.
二軍爭便之力不同, 是以臣得設疑兵, 以待韓陣, 專軍幷銳, 觸魏之不意.
魏軍旣敗, 韓軍自潰, 乘勝逐北, 以是之故能立功.
皆計利形勢, 自然之理, 何神之有哉!
今秦破趙軍於長平, 不遂以時乘其振懼而滅之, 畏而釋之, 使得耕稼以益蓄積, 養孤長幼, 以益其衆, 繕治兵甲以益其强, 增城浚池以益其固.
主折節以下其臣, 臣推體以下死士.
至於之屬, 皆令妻妾補縫於行伍之間.
臣人一心, 上下同力, 猶勾踐困於會稽之時也.
伐之, 趙必固守. 挑其軍戰, 必不肯出. 圍其國都, 必不可剋. 攻其列城, 必未可拔. 掠其郊野, 必無所得.
兵出無功, 諸侯生心, 外救必至.
臣見其害, 未覩其利. 又病, 未能行.”
應侯慙而退, 以言於王.
王曰:
“微白起, 吾不能滅趙乎?”
復益發軍, 更使代王陵伐趙.
圍邯鄲八‧九月, 死傷者衆, 而弗下.
趙王出輕銳以寇其後, 秦數不利.
武安君曰:
“不聽臣計, 今果何如?”
王聞之怒, 因見武安君, 彊起之, 曰:
“君雖病, 彊爲寡人臥而將之.
有功, 寡人之願, 將加重於君. 如君不行, 寡人恨君.”
武安君頓首曰:
“臣知行雖無功, 得免於罪;
雖不行無罪, 不免於誅.
然惟願大王覽臣愚計,
釋趙養民, 以諸侯之變.
撫其恐懼, 伐其憍慢, 誅滅無道, 以令諸侯, 天下可定,
何必以趙爲先乎?
此所謂爲一臣屈而勝天下也.
大王若不察臣愚計, 必欲快心於趙, 以致臣罪, 此亦所謂勝一臣而爲天下屈者也.
夫勝一臣之嚴焉, 孰若勝天下之威大耶?
臣聞明主愛其國, 忠臣愛其名.
破國不可復完, 死卒不可復生.
臣寧伏受重誅而死, 不忍爲辱軍之將.
願大王察之.”
王不答而去.


500. 소왕昭王이 백성을 휴식시키고 군대를 정비하다
소왕昭王이 이미 백성을 충분히 휴식시키고 군대를 다시 정비한 후, 재차 나라를 치고자 하였다.
무안군武安君(백기白起)이 말하였다.
“안 됩니다.”
왕이 말하였다.
“지난해 〈장평長平의 전투로〉 나라가 비고 백성은 굶주렸을 때에도 그대는 백성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군대와 식량을 더 요구하면서 조나라를 멸망시키자고 하더니,
지금 과인이 백성을 휴식시키고 군대를 길러 놓았으며 식량과 물자를 충분히 쌓아 삼군三軍이 그때보다 배로 늘었는데 그대는 안 된다 하니 무슨 이유인지 말해보겠소?”
무안군이 말하였다.
“그 장평 전투 때에는 우리 진나라가 크게 이기고 조나라는 크게 깨졌습니다.
그래서 진나라 백성들은 환희에 찼었고, 조나라는 두려움에 떨었지요.
그리고 진나라 백성으로 싸움에 죽은 자는 후한 장례를 치러 주었고, 다친 자는 충분히 휴양하도록 하였으며 수고한 자에게는 잔치를 베풀어 음식과 먹을 것을 주었고, 그 재물의 손실도 충분히 보조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조나라로서는 죽은 자의 장례도 제대로 치러 주지 못하였을 뿐더러, 다친 자를 제대로 치료도 해 주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서로 붙들고 애통해 하면서 있는 힘을 다해 같은 근심으로 힘을 합치고, 부지런히 농사짓기에 힘써서 재물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지금 왕께서 군대를 발동시키면 비록 옛날보다 배가 된다고 하시지만 저는 헤아리건대 조나라의 수비는 열 배나 될 듯합니다.
조나라는 장평 전투 이래로 군신君臣이 함께 걱정하면서 아침 일찍 조정에 나와 밤늦게 귀가하며 겸손한 말과 중한 보배로 사신을 보내고 사방 제후국 나라‧나라와는 친교를 맺었고, 나라‧나라와도 우호友好를 돈독히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근심이 쌓일수록 마음을 합하여 오로지 우리 진나라 방비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 나라가 안으로는 하고 밖으로는 외교를 성취시키고 있어 이런 때에 조나라를 치는 것은 되지 않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과인은 이미 군대를 일으켰소.”
그리고는 오대부五大夫 왕릉王陵을 장수로 삼아 조나라를 치도록 하였다.
결국 왕릉은 전쟁에 졌고 〈조나라는〉 다섯 군영軍營을 잃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소왕은 무안군을 시키고자 하였으나 무안군은 병을 핑계로 나서지 않았다.
왕은 이에 응후應侯(범저范雎)를 무안군에게 보내어 이렇게 질책하였다.
나라는 그 땅이 5천 리에 창을 든 군사만 1백만이다.
그런데도 그대는 전에는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에 들어가 을 함락하고 그 초나라 종묘까지 불태웠으며 동쪽으로 경릉竟陵에 이르자 초나라 백성은 크게 놀라 서울까지 동쪽으로 옮기고 감히 서쪽으로 우리나라를 항하지 못하였다.
또 한나라‧위나라가 서로 합쳐 심히 많은 군대를 일으켰으나 그대는 그 절반도 되지 않으면서 이궐伊闕에서 싸워 그 두 나라 군대를 크게 깨뜨려 흐른 피에 방패가 떠다닐 정도였으며 그때 참수斬首한 적군이 무려 24만이나 되었었다.
그래서 나라‧나라는 지금까지도 스스로 동쪽의 번속藩屬이라 칭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그대의 공인 줄을 천하에 모르는 자가 없다.
지금 조나라 사졸들 중에 장평 싸움에서 죽은 자가 열에 일곱, 여덟이나 되어, 그 나라가 허약해졌다.
이 때문에 과인이 크게 군대를 일으켰고, 우리 군대는 조나라 군중의 배가 넘는다.
그대를 장수로 삼아 반드시 이 조나라를 멸망시키고자 한다.
그대는 일찍이 적은 숫자로 많은 무리를 쳐부수어 그 승리가 신과 같았는데 하물며 강한 것으로 약한 것을 치고, 많은 무리로 적은 수를 치는 것이겠는가?”
무안군이 말하였다.
“당시 초나라와 싸울 때는 초왕楚王(경양왕頃襄王)이 나라가 큰 것을 믿고 정치에 힘쓰지 않았으며 신하들도 서로 공을 질투하여, 아첨과 비방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리하여 어진 신하는 배척당하고 백성의 마음은 이반되었으며, 성지城池수리修理되지 않아 어진 신하도 없고, 수비도 없는 상태였지요.
그래서 저 백기白起가 군사를 이끌고 깊이 들어가 성을 등진 채 우리가 타고 간 배나 그곳의 다리를 모두 불살라 군사들의 마음은 오로지 교외에서 약탈한 것으로 하여 군량미가 충분하였었습니다.
이때에는 우리 진나라 사졸들은 군중軍中을 곧 집으로 여겼고, 장수를 곧 부모로 여겨 서로 약속하지 않아도 친하였으며, 도모하지 않아도 서로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되어 죽어도 발걸음을 되돌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초나라 군대는 자기들 땅에서 싸워 모두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여 각각 마음이 흩어져 전혀 투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 이궐伊闕의 전투에서는, 나라는 고립된 채, 나라 눈치만 보며 스스로 자신의 군사를 먼저 쓰기를 꺼렸습니다.
위나라는 위나라대로 한나라의 정예 부대를 믿고 그들이 선봉이 되어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두 나라 군대는 서로 각기 타산打算이 있어 힘껏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의병疑兵을 설치하여 한나라 군대와 싸웠으며 우리의 군사력을 집중시켜 위나라 군사를 불의에 습격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나라 군대가 깨지자 한나라 군대는 스스로 무너지져 이 기회를 틈타 계속 북쪽으로 이들을 몰아 끝내 공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는 모두가 형세의 이로운 점을 살핀 자연스러운 이치이지 어찌 과 같은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진나라는 지난해에 장평에서 조나라 군대를 쳐부술 때 우리에게 준 승리의 기회를 이용하여 이를 아예 멸망시켰어야 했는 데도 도리어 두려워하면서 그들을 놓아주어, 그들로 하여금 열심히 농사지어 그 축적을 더욱 많게 해 주었고, 지쳤던 백성을 다시 휴양시켜 기를 여유를 주어 무리가 늘어나게 하였으며, 군사를 조련하여 더욱 강하게 해 주었고, 성벽을 더 쌓고 못을 준설하여 더욱 견고하게 해 주었습니다.
게다가 그 임금은 권위를 낮추어 신하보다 더욱 겸손히 굴며, 신하는 신하대로 몸을 낮추어 사토死土를 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평원군平原君의 무리는 모두가 그 처첩까지도 군대 행렬 사이에 달려가 군복을 꿰매고 깁도록 시키고 있습니다.
신하와 백성이 한마음이고 상하가 힘을 모으고 있는 모습은 마치 구천句踐이 저 회계산會稽山에서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패하여 와신상담臥薪嘗膽하던 때와 같습니다.
지금 이를 쳤다가는 그들은 틀림없이 견고히 수비하여 아무리 우리가 싸움을 걸어도 나와서 맞붙으려 하지 않을 것이어서 조나라 도읍을 포위하더라도 반드시 이기지 못할 것이며, 그들의 여러 성을 공격한다 해도 반드시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며, 그들의 교야郊野를 모두 약탈한다 해도 아무런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군대를 출동시켜 놓고 아무런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 다른 제후들은 마음이 달라져 조나라를 구하려고 밖에서 달려들 것입니다.
저는 이번 전쟁은 손해만 보일 뿐 이익은 보이지 않으며, 또 지금 저는 병이 나서 갈 수 없습니다.”
응후는 부끄러워 물러나와 왕에게 그 말을 전하였다.
왕이 말하였다.
백기白起가 없다고 내가 조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하겠느냐?”
그리고는 다시 더욱 많은 군대를 모아 이번에는 왕흘王齕왕릉王陵 대신 장군으로 삼아 조나라를 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단邯鄲을 포위한 지 여덟, 아홉 달이 지나도록 사상자만 많이 낸 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조왕趙王은 정예 부대를 내어 진나라 군사의 뒷쪽을 습격하는 통에 진나라는 자주 불리한 경우에만 빠지게 되었다.
무안군 백기가 말하였다.
“나의 계책을 듣지 않더니 지금 그 결과가 과연 어떤가?”
왕이 이 말을 듣고는 심하게 노하여 무안군을 찾아가 억지로 기용起用하고는 말하였다.
“그대가 지금 비록 병이 들었다지만 나를 위해 억지로라도 누운 채로 군대를 거느리시오.
공을 세우는 것이 내 소원이니, 장차 그대에게 후한 상을 내릴 것이되, 만약 끝까지 못하겠다고 하면 내 그대를 깊이 원망하리라.”
무안군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저는 가서 공을 세우지 못해도 죄는 면할 것이요.
비록 가지 않더라도 죄가 될 것은 없지만 주살誅殺을 면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왕께서 저의 어리석은 생각을 한번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조나라에 대한 전쟁을 풀고 백성들을 휴식시키면서 제후들 사이에 변화가 생기기를 기다리십시오.
그리하여 우리를 겁내는 자들은 어루만져 주고 우리에게 교만하게 구는 자들은 토벌하며, 무도無道한 자는 주멸하여 제후들을 호령하면 천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어찌 지금 하필이면 조나라로부터 해야만 하겠습니까?
이것이 소위 한 신하(백기 자신)에게 자신을 굽혀 천하를 이긴다는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저의 어리석은 계책을 듣지 않으시고 반드시 조나라를 쳐서 없애야만 마음이 상쾌하시고, 저에게 반드시 죄를 내려야 시원하시겠다면 이 역시 한 신하(자기 자신)는 이겼지만 천하 제후에게 굴종屈從하는 것입니다.
무릇 신하 하나를 이겨 놓고 위엄을 찾는 것과, 천하를 이겨 위대함을 이루는 것 중 어느 것이 낫겠습니까?
제가 듣건대 ‘명석한 임금은 그 나라를 사랑하고, 충성된 신하는 그 명예를 사랑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나라가 깨어지면 복원하기 어렵고, 병졸이 죽으면 다시 되살릴 수 없는 법입니다.
저는 차라리 무거운 죄를 짓고, 죽음 당할지언정 치욕스런 패배의 장수가 되는 일은 차마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잘 살펴 주옵소서.”
이 말에 왕은 아무 대답도 없이 나갔다.


역주
역주1 : 본장의 내용은 中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마땅히 《秦策》에 들어 있어야 할 것 같다.
역주2 長平之事 : B.C.262~260년 사이 趙나라와 싸운 長平之戰을 가리킨다. 089‧134‧232‧255‧257장 참조.
역주3 五[校]大夫 王陵 : 五校는 군대의 편제인 듯하다. 혹은 五大夫의 잘못으로 보기도 한다. ‘校’의 음이 ‘묘’(明孝反)라는 주장도 있다. 王陵은 秦나라의 장군.
역주4 應侯 : 秦나라의 재상. 232‧254‧257‧336장 등 참조.
역주5 竟陵 : 楚나라 지명. 지금의 湖北省 天門縣 서북.
역주6 〈卒〉 : 鮑彪本에 의하여 보충하였다.
역주7 伊闕 : 韓나라 지명. 지금의 河南省 洛陽縣 서남.
역주8 平原君 : 趙勝. 戰國 四公子의 하나. 孝成王의 叔父이며 長平之戰을 치렀다.
역주9 合(今) : 鮑彪本에 의하여 ‘今’으로 고쳤다.
역주10 王齕 : 秦나라 장군 이름.

전국책(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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