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年國虛民飢, 君不量百姓之力, 求益軍糧以滅趙.
今寡人息民以養士, 蓄積糧食, 三軍之俸有倍於前, 而曰‘不可’, 其說何也?”
秦民之死者厚葬, 傷者厚養, 勞者相饗, 飮食餔餽, 以靡其財;
今王發軍, 雖倍其前, 臣料趙國守備, 亦以十倍矣.
趙自長平已來, 君臣憂懼, 早朝晏退, 卑辭重幣四面, 出嫁結親燕‧魏, 連好齊‧楚,
其國乃實, 其交外成. 當今之時, 趙未可伐也.”
君前率數萬之衆入楚, 拔鄢‧郢, 焚其廟, 東至
, 楚人震恐, 東徙而不敢西向.
韓‧魏相率, 興兵甚衆, 君所將之
不能半之, 而與戰之於
, 大破二國之軍, 流血漂鹵, 斬首二十四萬.
君嘗以寡擊衆, 取勝如神, 況以彊擊弱, 以衆擊寡乎?”
“是時楚王恃其國大, 不恤其政, 而羣臣相妬以功, 諂諛用事,
良臣斥疎, 百姓心離, 城池不修, 旣無良臣, 又無守備.
故起所以得引兵深入, 多倍城邑, 發梁焚舟以專民, 掠於郊野, 以足軍食.
當此之時, 秦中士卒, 以軍中爲家, 將帥爲父母, 不約而親, 不謀而信,
楚人自戰其地, 咸顧其家, 各有散心, 莫有鬪志.
二軍爭便之力不同, 是以臣得設疑兵, 以待韓陣, 專軍幷銳, 觸魏之不意.
魏軍旣敗, 韓軍自潰, 乘勝逐北, 以是之故能立功.
今秦破趙軍於長平, 不遂以時乘其振懼而滅之, 畏而釋之, 使得耕稼以益蓄積, 養孤長幼, 以益其衆, 繕治兵甲以益其强, 增城浚池以益其固.
以
伐之, 趙必固守. 挑其軍戰, 必不肯出. 圍其國都, 必不可剋. 攻其列城, 必未可拔. 掠其郊野, 必無所得.
有功, 寡人之願, 將加重於君. 如君不行, 寡人恨君.”
撫其恐懼, 伐其憍慢, 誅滅無道, 以令諸侯, 天下可定,
大王若不察臣愚計, 必欲快心於趙, 以致臣罪, 此亦所謂勝一臣而爲天下屈者也.
500. 소왕昭王이 백성을 휴식시키고 군대를 정비하다
진秦 소왕昭王이 이미 백성을 충분히 휴식시키고 군대를 다시 정비한 후, 재차 조趙나라를 치고자 하였다.
“지난해 〈장평長平의 전투로〉 나라가 비고 백성은 굶주렸을 때에도 그대는 백성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군대와 식량을 더 요구하면서 조나라를 멸망시키자고 하더니,
지금 과인이 백성을 휴식시키고 군대를 길러 놓았으며 식량과 물자를 충분히 쌓아 삼군三軍이 그때보다 배로 늘었는데 그대는 안 된다 하니 무슨 이유인지 말해보겠소?”
“그 장평 전투 때에는 우리 진나라가 크게 이기고 조나라는 크게 깨졌습니다.
그래서 진나라 백성들은 환희에 찼었고, 조나라는 두려움에 떨었지요.
그리고 진나라 백성으로 싸움에 죽은 자는 후한 장례를 치러 주었고, 다친 자는 충분히 휴양하도록 하였으며 수고한 자에게는 잔치를 베풀어 음식과 먹을 것을 주었고, 그 재물의 손실도 충분히 보조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조나라로서는 죽은 자의 장례도 제대로 치러 주지 못하였을 뿐더러, 다친 자를 제대로 치료도 해 주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서로 붙들고 애통해 하면서 있는 힘을 다해 같은 근심으로 힘을 합치고, 부지런히 농사짓기에 힘써서 재물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지금 왕께서 군대를 발동시키면 비록 옛날보다 배가 된다고 하시지만 저는 헤아리건대 조나라의 수비는 열 배나 될 듯합니다.
조나라는 장평 전투 이래로 군신君臣이 함께 걱정하면서 아침 일찍 조정에 나와 밤늦게 귀가하며 겸손한 말과 중한 보배로 사신을 보내고 사방 제후국 연燕나라‧위魏나라와는 친교를 맺었고, 제齊나라‧초楚나라와도 우호友好를 돈독히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근심이 쌓일수록 마음을 합하여 오로지 우리 진나라 방비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 나라가 안으로는 실實하고 밖으로는 외교를 성취시키고 있어 이런 때에 조나라를 치는 것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오대부五大夫 왕릉王陵을 장수로 삼아 조나라를 치도록 하였다.
결국 왕릉은 전쟁에 졌고 〈조나라는〉 다섯 군영軍營을 잃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소왕은 무안군을 시키고자 하였으나 무안군은 병을 핑계로 나서지 않았다.
왕은 이에 응후應侯(범저范雎)를 무안군에게 보내어 이렇게 질책하였다.
“초楚나라는 그 땅이 방方 5천 리에 창을 든 군사만 1백만이다.
그런데도 그대는 전에는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에 들어가 언鄢‧영郢을 함락하고 그 초나라 종묘까지 불태웠으며 동쪽으로 경릉竟陵에 이르자 초나라 백성은 크게 놀라 서울까지 동쪽으로 옮기고 감히 서쪽으로 우리나라를 항하지 못하였다.
또 한나라‧위나라가 서로 합쳐 심히 많은 군대를 일으켰으나 그대는 그 절반도 되지 않으면서 이궐伊闕에서 싸워 그 두 나라 군대를 크게 깨뜨려 흐른 피에 방패가 떠다닐 정도였으며 그때 참수斬首한 적군이 무려 24만이나 되었었다.
그래서 한韓나라‧위魏나라는 지금까지도 스스로 동쪽의 번속藩屬이라 칭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그대의 공인 줄을 천하에 모르는 자가 없다.
지금 조나라 사졸들 중에 장평 싸움에서 죽은 자가 열에 일곱, 여덟이나 되어, 그 나라가 허약해졌다.
이 때문에 과인이 크게 군대를 일으켰고, 우리 군대는 조나라 군중의 배가 넘는다.
그대를 장수로 삼아 반드시 이 조나라를 멸망시키고자 한다.
그대는 일찍이 적은 숫자로 많은 무리를 쳐부수어 그 승리가 신과 같았는데 하물며 강한 것으로 약한 것을 치고, 많은 무리로 적은 수를 치는 것이겠는가?”
“당시 초나라와 싸울 때는 초왕楚王(경양왕頃襄王)이 나라가 큰 것을 믿고 정치에 힘쓰지 않았으며 신하들도 서로 공을 질투하여, 아첨과 비방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리하여 어진 신하는 배척당하고 백성의 마음은 이반되었으며, 성지城池는 수리修理되지 않아 어진 신하도 없고, 수비도 없는 상태였지요.
그래서 저 백기白起가 군사를 이끌고 깊이 들어가 성을 등진 채 우리가 타고 간 배나 그곳의 다리를 모두 불살라 군사들의 마음은 오로지 교외에서 약탈한 것으로 하여 군량미가 충분하였었습니다.
이때에는 우리 진나라 사졸들은 군중軍中을 곧 집으로 여겼고, 장수를 곧 부모로 여겨 서로 약속하지 않아도 친하였으며, 도모하지 않아도 서로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되어 죽어도 발걸음을 되돌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초나라 군대는 자기들 땅에서 싸워 모두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여 각각 마음이 흩어져 전혀 투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 이궐伊闕의 전투에서는, 한韓나라는 고립된 채, 위魏나라 눈치만 보며 스스로 자신의 군사를 먼저 쓰기를 꺼렸습니다.
위나라는 위나라대로 한나라의 정예 부대를 믿고 그들이 선봉이 되어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두 나라 군대는 서로 각기 타산打算이 있어 힘껏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의병疑兵을 설치하여 한나라 군대와 싸웠으며 우리의 군사력을 집중시켜 위나라 군사를 불의에 습격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나라 군대가 깨지자 한나라 군대는 스스로 무너지져 이 기회를 틈타 계속 북쪽으로 이들을 몰아 끝내 공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는 모두가 형세의 이로운 점을 살핀 자연스러운 이치이지 어찌 신神과 같은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진나라는 지난해에 장평에서 조나라 군대를 쳐부술 때 우리에게 준 승리의 기회를 이용하여 이를 아예 멸망시켰어야 했는 데도 도리어 두려워하면서 그들을 놓아주어, 그들로 하여금 열심히 농사지어 그 축적을 더욱 많게 해 주었고, 지쳤던 백성을 다시 휴양시켜 기를 여유를 주어 무리가 늘어나게 하였으며, 군사를 조련하여 더욱 강하게 해 주었고, 성벽을 더 쌓고 못을 준설하여 더욱 견고하게 해 주었습니다.
게다가 그 임금은 권위를 낮추어 신하보다 더욱 겸손히 굴며, 신하는 신하대로 몸을 낮추어 사토死土를 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평원군平原君의 무리는 모두가 그 처첩까지도 군대 행렬 사이에 달려가 군복을 꿰매고 깁도록 시키고 있습니다.
신하와 백성이 한마음이고 상하가 힘을 모으고 있는 모습은 마치 구천句踐이 저 회계산會稽山에서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패하여 와신상담臥薪嘗膽하던 때와 같습니다.
지금 이를 쳤다가는 그들은 틀림없이 견고히 수비하여 아무리 우리가 싸움을 걸어도 나와서 맞붙으려 하지 않을 것이어서 조나라 도읍을 포위하더라도 반드시 이기지 못할 것이며, 그들의 여러 성을 공격한다 해도 반드시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며, 그들의 교야郊野를 모두 약탈한다 해도 아무런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군대를 출동시켜 놓고 아무런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 다른 제후들은 마음이 달라져 조나라를 구하려고 밖에서 달려들 것입니다.
저는 이번 전쟁은 손해만 보일 뿐 이익은 보이지 않으며, 또 지금 저는 병이 나서 갈 수 없습니다.”
응후는 부끄러워 물러나와 왕에게 그 말을 전하였다.
“백기白起가 없다고 내가 조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하겠느냐?”
그리고는 다시 더욱 많은 군대를 모아 이번에는 왕흘王齕을 왕릉王陵 대신 장군으로 삼아 조나라를 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단邯鄲을 포위한 지 여덟, 아홉 달이 지나도록 사상자만 많이 낸 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조왕趙王은 정예 부대를 내어 진나라 군사의 뒷쪽을 습격하는 통에 진나라는 자주 불리한 경우에만 빠지게 되었다.
“나의 계책을 듣지 않더니 지금 그 결과가 과연 어떤가?”
왕이 이 말을 듣고는 심하게 노하여 무안군을 찾아가 억지로 기용起用하고는 말하였다.
“그대가 지금 비록 병이 들었다지만 나를 위해 억지로라도 누운 채로 군대를 거느리시오.
공을 세우는 것이 내 소원이니, 장차 그대에게 후한 상을 내릴 것이되, 만약 끝까지 못하겠다고 하면 내 그대를 깊이 원망하리라.”
“저는 가서 공을 세우지 못해도 죄는 면할 것이요.
비록 가지 않더라도 죄가 될 것은 없지만 주살誅殺을 면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왕께서 저의 어리석은 생각을 한번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조나라에 대한 전쟁을 풀고 백성들을 휴식시키면서 제후들 사이에 변화가 생기기를 기다리십시오.
그리하여 우리를 겁내는 자들은 어루만져 주고 우리에게 교만하게 구는 자들은 토벌하며, 무도無道한 자는 주멸하여 제후들을 호령하면 천하를 정定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어찌 지금 하필이면 조나라로부터 해야만 하겠습니까?
이것이 소위 한 신하(백기 자신)에게 자신을 굽혀 천하를 이긴다는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저의 어리석은 계책을 듣지 않으시고 반드시 조나라를 쳐서 없애야만 마음이 상쾌하시고, 저에게 반드시 죄를 내려야 시원하시겠다면 이 역시 한 신하(자기 자신)는 이겼지만 천하 제후에게 굴종屈從하는 것입니다.
무릇 신하 하나를 이겨 놓고 위엄을 찾는 것과, 천하를 이겨 위대함을 이루는 것 중 어느 것이 낫겠습니까?
제가 듣건대 ‘명석한 임금은 그 나라를 사랑하고, 충성된 신하는 그 명예를 사랑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나라가 깨어지면 복원하기 어렵고, 병졸이 죽으면 다시 되살릴 수 없는 법입니다.
저는 차라리 무거운 죄를 짓고, 죽음 당할지언정 치욕스런 패배의 장수가 되는 일은 차마 못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