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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策(1)

전국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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頃襄王二十年, 秦白起拔楚西陵, 或拔, 燒先王之墓.
王徙東北, 保于. 楚遂削弱, 爲秦所輕.
楚人有者, 游學博聞, 襄王以爲辯, 故使於秦.
曰:
“天下莫强於秦‧楚,
今聞大王欲伐楚, 此猶兩虎相鬪而, 不如善楚.
臣請言其說.
:物至而反, 冬夏是也; 致至而危, 累碁是也.
今大國之地半天下, 有二垂, 此從生民以來, 萬乘之地未嘗有也.
先帝‧莊王, 王之身, 三世而不接地於齊, 以絶從親之要. 守事於韓, 成橋.
是王不用甲, 不伸威, 而, 王可謂能矣.
王又擧甲兵而 , 擧河內, 拔, 楚‧燕之兵不敢校, 王之功亦多矣.
息衆二年, 然後復之, 又取, 以臨‧濟陽嬰城, 而魏氏服矣.
天下五合‧六聚而不敢救也, 王之威亦憚矣.
王若能持功守威, , 使無復後患,
三王不足四, 五伯不足六也.
王若負人徒之衆, 兵甲之强, 毁魏氏之威, 而欲以力臣天下之主, 臣恐有後患.
易曰:. 此言始之易, 終之難也.
何以知其然也? ; 見伐齊之便, 而不知干隧之敗也.
此二國者, 非無大功也. , 而易患於後也.
吳之信越也, 從而伐齊,
旣勝齊人於, 還爲越王禽於)之浦.
智氏信韓‧魏, 從而伐趙, 攻晉陽之城, 勝有日矣, 韓‧魏反之, 殺智伯瑤於之上.
今王妬楚之不毁也, 而忘毁楚之强魏也. 臣爲大王慮而不取.
從此觀之, 楚國, 援也; 鄰國, 敵也.
今王中道而信韓‧魏之善王也, 此正吳信越也.
臣聞:敵不可易, 時不可失.
臣恐韓‧魏之卑辭慮患, 而實欺大國也.
此何也? 王旣無重世之德於韓‧魏, 而有累世之怨矣.
韓‧魏父子兄弟接踵而死於秦者, 百世矣.
本國殘, 社稷壞, 宗廟隳, 刳腹折頤, 首身分離, 暴骨草澤, 頭顱僵仆, 相望於境;
父子老弱係虜, 相隨於路; 鬼神, .
百姓不聊生, 族類離散, 流亡爲臣妾, 滿海內矣.
韓‧魏之不亡, 秦社稷之憂也.
今王之攻楚, 不亦失乎!
王攻楚之日, 則惡出兵?
王將藉路於仇讎之韓‧魏乎?
兵出之日而王憂其不反也,
是王以兵資於仇讎之韓‧魏.
王若不藉路於仇讎之韓‧魏, 必攻陽‧右壤.
, 此皆廣川大水, 山林谿谷不食之地, 王雖有之, 不爲得地. 是王有毁楚之名, 無得地之實也.
且王攻楚之日, 悉起應王.
構而不離, 魏氏將出兵而攻, 故宋必盡.
齊人南面, 必擧. 此皆平原四達, 膏腴之地也, 而王使之獨攻.
王破楚以肥韓‧魏於中國而勁齊, 韓‧魏之强足以校於秦矣.
齊南以泗爲境, 東負海, 北倚河, 而無後患, 天下之國, 莫强於齊.
齊‧魏得地葆利, 而事下吏, 一年之後, 爲帝若未能, 於以禁王之爲帝有餘.
夫以王壤土之博, 人徒之衆, 兵革之强, 一擧而注地於楚, 詘令韓‧魏, 歸帝重於齊, 是王失計也.
臣爲王慮, 莫若善楚.
秦‧楚合而爲一, 臨以韓, 韓必授首.
王襟以山東之險, 帶以之利, 韓必爲關中之.
若是, 王以, 梁氏寒心, 許‧鄢陵嬰城, 上蔡‧召陵不往來也.
如此, 而魏亦矣.
王一善楚, 而關內二萬乘之主注地於齊, 齊之右壤可拱手而取也.
是王之地一任兩海, 要絶天下也.
是燕‧趙無齊‧楚, 無燕‧趙也.
然後危動燕‧趙, 持齊‧楚, 此四國者, 而服矣.”


경양왕頃襄王 이십년二十年
경양왕頃襄王 20년에 나라 장군 백기白起나라 서릉西陵 땅을 점령하고 다시 이릉夷陵을 정복하여 초나라 선왕先王까지 불태웠다.
초왕楚王은 동북쪽으로 옮겨 진성陳城을 지키고 있어 초나라는 마침내 국토가 깎이고 약해져서 나라가 가볍게 여기게 되었다.
이에 백기는 또다시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해 왔다.
초나라 사람 황헐黃歇이란 자는 사방에 유학游學하여 견문이 넓어 경양왕이 그를 능변能辯이라 하여 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가 소왕昭王에게 말하였다.
“천하에 진나라와 초나라보다 강한 나라는 없습니다.
지금 듣건대 대왕께서 초나라를 친다고 하시는데 이는 마치 두 마리의 호랑이가 서로 싸우는 것과 같아 오히려 노둔한 개가 그 지친 틈을 타서 이익을 보게 되니, 초나라와 서로 친하게 지내느니만 못합니다.
이 거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듣건대, 사물이 에 달하면 다시 돌아오는 법이니, 여름과 겨울이 이 경우이며, 지극히 쌓이면 위태로우니 바둑돌을 쌓는 것이 그런 경우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진나라의 국토는 천하의 반이나 되어 세상의 두 귀퉁이를 다 차지하고 있으니, 생민生民이 있은 이래 만승萬乘의 땅을 차지한 자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나라는 선왕先王이신 효문왕孝文王장양왕莊襄王으로부터 대왕에 이르는 3대에 걸쳐 국토를 나라와 연접連接하여 산동제후山東諸侯의 합종책을 끊어보지 못했는데, 지금 대왕께서 세 번이나 성교成橋를 시켜 나라에 주둔駐屯하게 하니, 성교成橋가 한나라 북쪽의 땅을 진나라에 편입시켰습니다.
이는 싸우거나 위세를 펴지 않고 1백 리의 땅을 내놓도록 한 것이니 대왕께서는 정말 능란하다고 하겠습니다.
대왕께서는 또 군대를 일으켜 나라를 공략하실 때 대량大梁성문城門을 막고 하내河內를 공격해 빼앗고 산조酸棗, 도인성桃人城을 점령하여 나라와 나라의 원군援軍을 구름처럼 흩어 진나라와 대적할 수 없도록 만들었으니 왕의 공이 역시 크십니다.
그리고 왕께서는 2년 동안 군대를 휴식시킨 후에, 다시 수원首垣 등을 탈취하고, 군대를 평구平丘소황小黃제양濟陽으로 진격시켜 포위하니 나라가 굴복하고 만 것입니다.
또 왕께서는 마지磨地의 북쪽을 할거割據해서, 나라‧나라 사이의 허리와 나라‧나라 사이의 등뼈를 잘라 버린 셈이 되었습니다.
이에 천하의 제후들이 다섯 차례, 여섯 번씩이나 연합하였지만 구해 줄 수 없었으니, 대왕의 위세가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러나 이제 대왕께서 만약 그 을 유지하고 위세를 지키시려면 공벌攻伐하려는 마음을 줄이고 인의仁義의 도리를 넓혀 후환이 없도록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삼왕三王에 〈대왕을 추가해서〉 사왕四王으로 해도 부족하고, 오패五伯육패六霸로 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왕께서 만약 많은 민중과 강한 군병軍兵, 옛날 단번에 위나라를 무찌르던 위세를 믿고 천하의 제후를 힘으로써 신복臣服시키겠다고 하셨다가는 저는 후환이 있을까 걱정입니다.
시경詩經》에 ‘처음에는 잘하려 하지 않은 이가 없으나, 마지막에 잘하는 이가 적다[靡不有初 鮮克有終]’라 하였습니다.
또 《》에는 ‘여우가 물을 건너다 꼬리를 적신다[狐濡其尾]’라 하였으니, 이는 바로 처음은 쉬우나 끝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를 아느냐 하면 지씨智氏나라를 하여 얻을 이익만 알았지 유차楡次후화後禍를 몰랐고, 나라는 나라를 공격해서 얻을 편익便益만 알았지 뒤에 간수干隧의 패배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 두 나라는 큰 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다만 목전目前의 이익만 생각하느라 뒤에 올 를 쉽게 보았던 것입니다.
나라가 나라를 믿고 그에 따라 나라를 쳤습니다.
그리하여 이미 제나라를 애릉艾陵에서 이기고 돌아오다가 도리어 삼강三江의 포구에서 월나라 왕에게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지씨智氏나라와 나라를 믿고 그에 따라 나라를 진양晉陽에서 포위하여 한동안 승리했으나 한나라‧위나라가 반기를 들어 지백智伯 착대鑿臺에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나라가 아직 망하지 않는 것을 미워할 줄만 알았지 초나라가 망하면 나라가 강해진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시니, 저는 대왕을 위하여 걱정이 되어 옳지 않게 여깁니다.
시경詩經》에 ‘대군大軍은 먼 곳을 건너 공격하지 않는다[大武遠宅不涉]’라고 하였습니다.
이로 보면 초나라는 오히려 진나라의 원국援國이 되고 이웃 나라들이 적국이 됩니다.
시경詩經》에 ‘남이 품은 생각, 내가 헤아리노니 빠르고 빠른 교활한 토끼도 사냥개를 만나면 잡히느니라[他人有心 予忖度之 躍躍毚兎 遇犬獲之]’라 하였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중도中道에서 한나라‧위나라가 잘 받들어 주는 것을 믿고 있으나 이는 마치 나라가 나라를 믿었던 것과 똑같습니다.
제가 듣건대 적국은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되고 시기는 놓쳐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저는 한나라‧위나라가 겸손한 말로 환난을 걱정하는 것은 대국을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왕께서는 한나라‧위나라에 대해서 를 거듭하여 은덕은 베푼 적은 없고 누대累代에 걸쳐 원한만 심어 왔기 때문입니다.
한나라‧위나라의 부자 형제들이 나라 때문에 발끝이 이어지도록 연달아 죽어간 지 이미 1백 가 되었습니다.
그 나라는 잔폐해지고 사직社稷은 파괴되고 종묘宗廟는 허물어졌으며 배가 갈라지고 턱이 깨어지고, 머리와 몸이 각각 떨어지고, 해골이 초택草澤에서 드러나 뒹굴고, 머리는 거꾸로 엎어져 국경까지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부자父子와 노약자들은 서로 묶여 포로가 된 채 길을 메워 끌려가고 귀신과 호상狐祥은 제사 음식을 받아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살아갈 길이 없어 가족이 다 흩어져 유망流亡하다가 남의 종이나 첩이 된 자가 해내海內에 가득 찼습니다.
이런 한나라‧위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나라 사직의 걱정거리입니다.
그런데도 왕께서는 지금 초나라를 치고자 하시니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왕께서 초나라를 치려면 어느 길로 출병出兵하시겠습니까?
왕께서 장차 원한을 품고 있는 한나라‧위나라의 길을 빌리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출병하는 날에는 살아 돌아올 수 없음을 걱정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는 왕께서 원수 나라인 한나라‧위나라에 군대를 대주는 격입니다.
왕께서 만약 원수 사이인 한나라‧위나라의 길을 빌리지 않으면 수수隨水의 남쪽 지방을 공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수수의 남쪽 지방은 모두 넓은 시내와 대천大川, 산림 계곡으로 황무지여서 왕께서 비록 그 땅을 차지하더라도 땅을 얻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니, 이는 왕께서 초나라를 쳤다는 악명만 들을 뿐 땅을 얻은 실리도 없는 것입니다.
또 장차 왕이 나라를 공격하는 날에 나라‧나라‧나라‧나라 네 나라도 반드시 연합해서 대왕에게 응전應戰할 것입니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싸움에 얽혀 풀어지지 않는 동안 나라는 방여方與호릉胡陵 등을 공격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옛날 나라의 고지故地는 모조리 빼앗기게 됩니다.
나라는 남쪽으로 사수泗水 북쪽의 초나라 땅을 빼앗을 것이니, 이곳은 넓은 평원 지대로 사통팔달四通八達하는 비옥한 땅인데 왕께서는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공격하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왕께서는 초나라를 깨뜨림으로써 한나라와 위나라를 중국中國에서 살찌게 해주는 것이며, 그 틈에 제나라의 세력을 더욱 강하게 해 주는 셈이 되어 한나라와 위나라의 강성함이 족히 진나라에 맞설 수 있게 됩니다.
또 제나라는 남으로 사수泗水를 경계로 하고 동으로는 바다를 등지고, 북으로는 황하를 의지하여 후환이 없는 나라가 될 것이며, 천하 여러 나라 중에 제나라보다 막강한 나라가 없게 됩니다.
제나라와 위나라가 땅을 얻어 유리함을 지켜가면서 거짓으로 대왕을 섬기면 1년 후에는 제왕帝王을 칭하기는 어렵겠지만 대왕께 란 칭호를 쓰지 못하게 위압할 정도의 힘은 넉넉히 갖게 될 것입니다.
무릇 대왕께서는 넓은 토지, 많은 백성, 강한 병력을 믿고 일거에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치기에 마음 써서 한나라‧위나라를 굴복시켰다가는 오히려 그 귀한 제업帝業을 모두 나라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이니 이것이 왕의 잘못된 계책입니다.
제가 대왕을 위하여 염려하건대 초나라와 우의를 맺느니만 못합니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하나로 연합하여 나라에 임하면 한나라는 틀림없이 목을 바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대왕께서는 산동山東의 험요함을 옷깃으로 삼고 하곡河曲의 이익을 띠로 삼게 되어 한나라는 진나라의 관중지후關中之侯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신 후에 10만 대군을 땅에 주둔시키면 (梁)나라는 겁을 먹고 언릉鄢陵을 둘러싼 채 나오지 못할 것이며 상채上蔡소릉召陵을 왕래할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나라도 대왕의 관내지후關內之侯로 삼을 수 있습니다.
왕이 한 번만 나라와 선린善隣하면 2만 의 임금이 당신의 관내후關內侯가 되고, 제나라에 주력하면 제나라의 오른쪽 땅은 팔짱을 끼고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는 왕의 영토가 서해西海에서 동해東海까지 통해져 천하 제후의 합종연맹合從聯盟의 허리를 끊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나라‧나라는 제나라‧초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제나라‧초나라는 연나라‧조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연후에 연나라‧조나라를 뒤흔들고 제나라‧초나라를 거머쥐게 되면 이 네 나라는 급히 공격하지 않아도 복종할 것입니다.”


역주
역주1 101. 頃襄王二十年 : 이 장은 《史記》 〈春申君列傳〉 및 《新序》 〈善謀 上〉의 기록과 같다. 시기는 B.C.279년쯤이며, 그 유세는 B.C.276~B.C.273년쯤으로 보인다. 頃襄王은 楚 懷王의 아들. 이름은 橫. 20년은 周 赧王 37년(B.C.278)이다. 이 해에 秦나라 장수 白起가 西陵과 鄢城을 공격하고 이듬해에 郢을 함락하여 楚나라 선왕의 夷陵을 불태웠다.
역주2 : 鄢城. 지금의 호북성 宜城縣.
역주3 : 楚의 도읍. 지금의 胡北省 江陵縣.
역주4 夷陵 : 楚의 선왕 묘가 있는 곳. 胡北省 宜昌縣 동쪽.
역주5 陳城 : 春秋時代 陳의 舊地(宛丘), 지금의 河南省 淮陽縣. 楚가 秦과 싸울 때 이곳으로 피해 잠시 도읍으로 정하였었다.
역주6 白起又將兵來伐 : 頃襄王 22년에 있었던 사건. 《史記》 〈春申君列傳〉에 “秦 昭王이 바야흐로 백기로 하여금 韓나라‧魏나라와 함께 楚나라를 치게 하였는데, 시행하기 전에 초나라 사신 黃歇이 마침 진나라에 도착하였다.[秦昭王方令白起與韓魏共伐楚 未行而楚使黃歇適至於秦]”라고 하였다.
역주7 黃歇 : 楚나라의 春申君. 일찍이 楚의 태자 完과 秦나라에 볼모로 갔었으며, 뒤에 完이 돌아와 즉위하여 考烈王이 되자 그를 도와 春申君이 되었다. 戰國 四公子 중의 하나로 식객 수천을 거느렸다. 뒤에 幽王 때 李園에게 刺殺당하였다. 《史記》 〈春申君列傳〉 참조.
역주8 昭王 : 秦 昭王. 그러나 이 장의 이야기는 모두 秦 始皇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며 뒤에 나오는 文王과 莊王 이하 三世의 代數도 始皇과 맞으므로 昭王은 始皇의 잘못으로 보인다.
역주9 駑犬受其弊 : 두 호랑이가 싸우다가 困弊해진 틈에 둔한 개에게 당한다는 뜻. 여기서 駑犬은 韓나라와 魏나라를 비유하며, 두 호랑이는 秦나라와 楚나라를 말한다.
역주10 臣聞之 : 鮑彪本에는 頃襄王二十年부터 臣聞之까지 110자가 없고 대신 說秦王曰 4자가 있다.
역주11 文王 : 高誘의 註에 “文王은 始皇의 조부이며, 莊王은 始皇의 아버지이다. 그 때문에 三世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史記》에는 ‘先帝文王 莊王之身 三世不忘接地於齊’라고 하였다.
역주12 今王[三]使盛(成)橋 : 대본의 三자는 衍文, 盛은 成의 誤字. 成橋는 秦나라의 신하로 始皇의 동생. 《史記》에는 成蟜로 되어 있다.
역주13 以北入燕 : 《史記》 〈春申君列傳〉에는 “그 땅을 秦나라에 들였다.[以其地入秦]”라고 하였다.
역주14 出(得)百里之地 : 《史記》 〈春申君列傳〉에 出자가 得으로 되어 있어 이를 따랐다.
역주15 攻魏 : 秦 始皇 5년에 장군 蒙驁를 보내 위나라를 공격해 酸棗, 燕, 虛 등 20성을 빼앗아 東郡을 설치하였다.
역주16 원주] 杜大梁之門 : 大梁은 魏 惠王이 都邑한 곳으로 지금의 陳留 浚儀 서쪽 大梁城이 이곳이다.
역주17 : 縣 이름. 즉 南燕으로 지금의 河南省 延津縣.
역주18 酸棗 : 魏나라의 읍. 지금의 河南省 延津縣 북쪽.
역주19 虛‧桃人 : 모두 地名. 《史記》 〈春申君列傳〉 集解에 “燕縣에 桃城이 있다.”라고 하였다.
역주20 云翔 : 《史記》 〈春申君列傳〉에는 雲翔으로 되어 있다.
역주21 : 《史記》 〈春申君列傳〉에는 休甲으로 되어 있다.
역주22 : 魏나라 邑. 지금의 河南省 長垣縣 경내로 山東에 가깝다.
역주23 : 魏나라 땅으로 黃河 이남 鄭州市 북쪽.
역주24 首垣 : 魏나라 邑. 지금의 하남성에 長垣縣이 있다.
역주25 仁‧平兵(丘) 小黃 : 모두 魏나라의 읍 이름. 대본의 平兵은 《史記》 〈春申君列傳〉에 의하여 平丘로 고쳐 번역하였다.
역주26 濮‧磨 : 濮은 水名. 磨는 地名. 磨가 歷으로 된 本도 있다.
역주27 屬之燕 : 《史記》 〈春申君列傳〉에는 이 세 자가 없다.
역주28 齊‧秦(韓)之要 : 要는 腰와 같으며, 秦은 韓의 誤字.
역주29 楚‧魏之脊 : 《史記》 〈春申君列傳〉에는 魏가 趙로 되어 있다.
역주30 省攻伐之心而肥仁義之誡 : 《史記》 〈春申君列傳〉에는 誡가 地로 되어 있는데, 高誘의 註에 “地는 道와 같다.”고 하였다. 원주에는 “어떤 本에는 誡자가 誠자로 되어 있으며 肥는 厚와 같으니, 仁義之道를 두텁게 베풀면 天下가 모두 우러러볼 것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역주31 材(杖) : 材는 杖의 誤字. 《史記》 〈春申君列傳〉에는 仗으로 되어 있다.
역주32 : 《史記》 〈春申君列傳〉에는 乘으로 되어 있다.
역주33 靡不有初 鮮克有終 : 《詩經》 大雅 〈蕩〉에 나오는 구절.
역주34 狐濡其尾 : 《周易》 〈未濟〉卦에 나오는 “새끼 여우가 거의 강을 다 건너다가 꼬리를 적신다.[小狐汔濟 濡其尾]”는 말로, 小才로써는 큰 일을 감당하기 어렵다, 혹은 처음은 쉽고 끝은 어렵다는 비유.
역주35 智氏……不知楡次之禍也 : 智氏는 智伯. 그는 晉陽 땅을 탐낼 줄만 알았을 뿐, 襄子가 韓‧魏와 더불어 陰謀를 꾸미는 것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鑿臺之上에서 죽임을 당하여 楡次에 묻히게 되었다는 뜻.
역주36 : 吳나라 왕 夫差를 말함. 周 元王 元年(B.C.475)에 오왕 부차가 齊나라를 치니, 越王 勾踐이 3천 군사로 吳를 돕는 척하면서 吳를 干隧 땅에서 쳤는데 오왕은 포로로 잡히자 자살하고 말았다. 《史記》 〈吳太伯世家〉‧〈越王勾踐世家〉 등 참조.
역주37 設利於前 : 設이 《史記》에는 沒로 되어 있다. 원주에는 “設은 貪이다. 다만 目前의 이익만 보고 後患을 몰랐기 때문에 易患於後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38 艾陵 : 春秋時代 齊나라 邑. 지금의 山東省 泰安縣.
역주39 三江 : 婁江, 東江, 松江인데 異說이 많다.
역주40 鑿臺 : 지금의 산동성 楡次縣 안에 있었던 臺 이름. 高誘의 註에 “晉陽 아래의 臺名이다. 지백이 땅을 파서 渠를 만들어 이로써 晉陽城에 물을 댄 것이다. 흙을 모아 대를 만들었기 때문에 鑿臺라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41 大武遠宅不涉 : 지금의 《詩經》에 없는 逸詩이다. 張守節은 大武는 大軍, 遠宅은 遠地로 풀이했다.
역주42 他人有心 予忖度之 : 《詩經》 小雅 〈巧言〉의 제 四章이다. 他人이 해치려는 마음을 가지면 자신이 이를 헤아려 알 수 있다는 뜻.
역주43 躍躍毚兎 : 躍躍은 뛰어 도망하는 모양, 毚兎는 교활한 토끼. 잘 뛰어 도망하는 교활한 토끼도 사냥개에게 잡힌다는 뜻. 즉 明主 聖王 앞에는 간신배가 없어진다는 뜻.
역주44 狐祥 : 여우가 부리는 妖怪.
역주45 無所食 : 《史記》 〈春申君列傳〉에는 無所血食으로 되어 있는데, 血食은 祠堂 제사에서 犧牲을 잡아 지내는 제사를 이름.
역주46 : 《史記》 〈春申君列傳〉에는 且로 되어 있다.
역주47 陽‧右壤 : 《史記》 〈春申君列傳〉과 《資治通鑑》 〈周記〉에는 隨水右壤으로 되어 있으며 아래도 같다. 隨水는 지금의 호북성 隨縣에 있다.
역주48 四國 : 趙‧韓‧魏‧齊 네 나라.
역주49 [應] : 衍文으로 보인다.
역주50 秦‧楚之 : 《史記》 〈春申君列傳〉에는 之자 아래에 兵자가 더 있다.
역주51 留‧方與‧銍‧胡陵‧碭‧蕭‧相 : 모두 春秋時代 宋나라의 邑인데 당시 楚나라가 점령하였었다.
역주52 泗北 : 泗水 이북의 땅. 사수는 지금의 산동성 서남부에 있다.
역주53 [於] : 衍文으로 보인다.
역주54 : 거짓으로 꾸민다는 뜻의 佯과 통한다.
역주55 : 《史記》 〈春申君列傳〉에는 事로 되어 있다.
역주56 河曲 : 지금의 山西省 永濟縣.
역주57 候(侯) : 候는 侯의 오자이다.
역주58 十〈萬〉成(戍)鄭 : 원문 十이 鮑彪本에는 十萬으로, 成이 《史記》 〈春申君列傳〉에는 戍로 되어 있어 이를 따랐다. 鄭은 당시 韓나라의 屬地로 지금의 河南省 新鄭縣이다.
역주59 關內候(侯) : 關中이나 關內는 지역 이름으로 시대에 따라 일정하지 않은데, 여기에서는 자신의 服屬 아래에 부릴 수 있는 屬國이 된다는 뜻. 원문 候는 侯의 오자이다.
역주60 不待痛 : 痛은 急의 뜻. 급히 서둘러 공격하지 않아도 服從하게 된다는 뜻.

전국책(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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