券徧合, 起, 矯命以責賜諸民, 因燒其券, 民稱“萬歲”.
臣竊計, 君宮中積珍寶, 狗馬實外廐, 美人充下陳. 君家所寡有者以義耳.
臣竊矯君命, 以責賜諸民, 因燒其券, 民稱”萬歲“.
於是, 梁王虛上位, 以故相爲上將軍, 遣使者, 黃金千斤, 車百乘, 往聘孟嘗君.
遣太傅賫黃金千斤, 文車二駟, 服劍一, 封書謝孟嘗君曰:
“寡人不祥, 被於宗廟之祟, 沈於諂諛之臣, 開罪於君, 寡人不足爲也.
가난하고 궁핍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가 없어, 사람을 시켜 맹상군孟嘗君에게 문하門下에서 기식寄食하기를 원한다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좌우는 맹상군이 그를 천하게 여긴다고 보았고 거친 음식만 주었다.
얼마 지나자 풍훤은 기둥에 기대어 자신의 칼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생선을 먹여 주고, 문하의 객에 맞추어 대우해 주거라.”
얼마 후, 다시 칼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좌우가 모두 비웃으며 고하자 맹상군이 말하였다.
“수레를 타게 해 주고 수레 타는 식객과 같은 대우를 해 주어라.”
이에 풍훤은 그 수레를 타고 그 장검을 쳐들고는 친구들 옆을 지나며 이렇게 말하였다.
“맹상군이 객客의 예禮로 나를 대우해 주고 있다.”
그러다 얼마 후 다시 장검을 두드리며 노래했다.
식객들은 모두 미워하여 탐욕스럽고 만족할 줄 모르는 놈이라고 여겼다.
맹상군은 사람을 시켜 노모에게 먹을 것과 일용품을 제공하여 궁핍하지 않게 해 주었더니, 그제야 풍훤은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그 후 맹상군이 장부를 내놓고 문하의 제객諸客들에게 물었다.
누가 나를 위해 설薛 땅에 가서 빚을 받아오겠는가?”
“바로 ‘장협아, 돌아가자’라고 노래 부르던 그 자입니다.”
“객客은 과연 유능한데, 내가 잊고 너무 오래 만나지 못했소.”
“저는 사무가 번잡하여 피곤하고, 근심이 많아 마음이 혼란합니다.
성격도 어리석은 데다가 나라 일에 얽매어 선생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수치스럽게 여기지 마시고 저를 위하여 설 땅에 가서 빚을 좀 받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곧 수레를 준비하고 행장을 꾸려 빚문서를 싣고 떠났는데, 하직하며 말하였다.
“빚을 다 받으면 무슨 물건을 사 가지고 돌아올까요?”
도착하자 관리를 시켜 백성 중에 갚아야 할 채무가 있는 자들을 불러 놓고 채권의 내용이 맞는가를 확인하였다.
대조를 전부 마치자 일어서서 맹상군의 명을 가탁假託해 백성들의 빚을 전부 탕감하고는 빚문서를 태워 버리게 하니, 백성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풍훤은 말을 달려 제나라에 도착하자마자, 새벽에 맹상군 뵙기를 청하였다.
맹상군은 그가 이렇게 일찍 돌아온 것을 괴이하게 여기면서 의관을 정제하고 만나 물었다.
“군君께서 말씀하시기를 ‘살펴보아 우리 집에 부족한 것을 사 오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제가 생각해 보니 군君의 집안에는 진보珍寶가 가득 쌓여 있고, 개와 말은 바깥 마구간까지 가득 차 있으며, 미녀들은 후열後列에까지 가득하여 군君의 집안에 부족한 것이라고는 바로 ‘의義’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 끝에 군君을 위하여 그 ‘의’를 사 가지고 왔습니다.”
“지금 군君께서는 하찮은 봉지인 설 땅에서 그곳 백성을 자녀처럼 사랑해 주지는 못하면서 오히려 그들에게 돈놀이를 하여 이익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군의 명령을 가탁하여 백성들에게 그 빚을 전부 탕감해 문서를 태워버리도록 했더니, 백성들이 모두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군君을 위하여 사온 ‘의’라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1년 후, 제왕齊王(湣王)이 맹상군에게 말하였다.
“저는 감히 아버지(宣王)의 신하를 저의 신하로 삼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맹상군은 봉지封地인 설薛 땅으로 가야 했다.
미처 1백 리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설 땅 백성들이 노약자를 부축하고 나와 맹상군을 영접하려 길을 메우고 있었다.
“선생께서 저를 위해 사온 ‘의’라는 것을 오늘에야 보는구려.”
“교활한 토끼는 굴이 세 개[狡兎三窟]이어야 겨우 죽음을 면할 수 있을 뿐입니다.
지금 군君께는 겨우 굴 하나가 있을 뿐이니 아직 베개를 높이 베고 편히 누울 수 있는 처지가 못됩니다.
청컨대 군君을 위하여 두 개의 굴을 더 파 드리겠습니다.”
이리하여 맹상군은 풍훤에게 수레 50 승乘과 금 5백 근을 주어 서쪽 양梁(魏)나라로 유세遊說를 보냈다.
“제齊나라가 그 대신大臣 맹상군을 제후들에게 쫓아냈습니다.
제후들 중에 누구든지 그를 먼저 맞이하는 나라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룩할 것입니다.”
이에 양왕梁王은 상위上位(丞相)의 자리를 더 만들어 비워 놓고 원래 승상은 상장군上將軍을 삼은 후, 사자를 보내 황금 1천 근과 수레 1백 승을 주어 맹상군을 모셔오게 하였다.
풍훤은 먼저 달려와 맹상군에게 경계 말을 하였다.
“1천 근의 황금은 귀중한 빙례聘禮이며, 1백 승은 너무 큰 사절使節입니다.
그래서 양梁나라 사절단이 세 번이나 왕복하였지만 맹상군은 굳이 사양하며 가지 않았다.
제왕齊王이 이런 소식을 듣고 임금과 신하 모두 두려워하였다.
이에 곧 태부太傅를 보내어 황금 1천 근斤과 무늬로 꾸민 수레 2승乘, 패검佩劍 한 자루에다 맹상군에게 사과하는 봉서封書까지 보냈다.
“과인이 선善하지 못하여 종묘宗廟에서 내린 화禍를 입고 아첨하는 신하들에게 빠져 그만 군에게 죄를 지었으니, 이는 과인이 부족하여 저지른 일입니다.
원컨대 군께서는 선왕의 종묘를 생각하시어 우선 돌아와 만민을 다스려 주실 수 없겠습니까?”
“원컨대 이때를 놓치지 말고 먼저 선왕의 제기祭器를 옮겨 설 땅에다가 종묘를 세우겠다고 청하십시오.”
종묘가 완성되자 풍훤이 맹상군에게 보고하였다.
군께서는 어느 정도 베개를 높이 베고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맹상군이 수십 년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작은 재앙조차 당하지 않은 것은 모두 풍훤의 계책計策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