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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策(1)

전국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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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책(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97. 楚襄王爲太子之時
薨, 太子辭於齊王而歸. 齊王隘之:
“予我, 乃歸子; 子不予我, 不得歸.”
太子曰:
“臣有傅, 請而問傅.”
曰:
“獻之地,
所以爲身也.
愛地不送死父, 不義.
臣故曰獻之便.”
太子入, 致命齊王曰:
“敬獻地五百里.”
齊王歸楚太子.
太子歸, 卽位爲王.
齊使車五十乘, 來取東地於楚.
楚王告愼子曰:
“齊使來求東地, 爲之奈何?”
愼子曰:
“王明日朝群臣, 皆令獻其計.”
入見. 王曰:
“寡人之得求反, 王墳墓, 復群臣, 歸社稷也, 以東地五百里許齊.
齊令使來求地, 爲之奈何?”
子良曰:
“王不可不與也.
王身出玉聲, 許强萬乘之齊而不與, 則不信, 後不可以約結諸侯.
請與而復攻之.
與之信, 攻之武.
臣故曰與之.”
子良出, 昭常入見.
王曰:
“齊使來求東地五百里, 爲之奈何?”
昭常曰:
“不可與也.
萬乘者, 以地大爲萬乘.
今去東地五百里, 是去也,
有萬乘之號而無千乘之用也, 不可.
臣故曰勿與.
常請守之.”
昭常出, 景鯉入見.
王曰:
“齊使來求東地五百里, 爲之奈何?”
景鯉曰:
“不可與也.
雖然, 楚不能獨守.
王身出玉聲, 許萬乘之强齊也而不與, 負不義於天下. 楚亦不能獨守.
臣請西索救於秦.”
景鯉出, 愼子入,
王以三大夫計告愼子曰:
“子良見寡人曰:‘不可不與也,
與而復攻之.’ 常見寡人曰:‘不可與也,
常請守之.’ 鯉見寡人曰:‘不可與也,
雖然楚不能獨守也, 臣請索救於秦.’ 寡人誰用於三子之計?”
愼子對曰:
“王皆用之.”
王怫然作色曰:
“何謂也?”
愼子曰:
“臣請效其說,
而王且見其誠然也.
王發上柱國子良車五十乘, 而北獻地五百里於齊.
發子良之明日, 遣昭常爲, 令往守東地.
遣昭常之明日, 遣景鯉車五十乘, 西索救於秦.”
王曰:
“善.”
乃遣子良北獻地於齊. 遣子良之明日, 立昭常爲大司馬, 使守東地.
又遣景鯉西索救於秦.
子良至齊, 齊使人以甲受東地.
昭常應齊使曰:
“我典主東地, 且與死生.
悉五尺至六十, 三十餘萬弊甲鈍兵, 願承下塵.”
齊王謂子良曰:
“大夫來獻地, 今常守之何如?”
子良曰:
“臣身受命弊邑之王,
是常矯也. 王攻之.”
齊王大興兵, 攻東地, 伐昭常.
未涉疆, 秦以五十萬臨齊右壤.
曰:
“夫隘楚太子弗出, 不仁; 又欲奪之東地五百里, 不義.
其縮甲則可, 不然, 則願待戰.”
齊王恐焉. 乃請子良南道楚, 西使秦,
解齊患. 士卒不用, 東地復全.


양왕襄王태자太子였던 때
나라 양왕襄王(頃襄王)이 태자太子였을 때 나라에 인질로 가 있었다.
회왕懷王이 죽자 태자는 제왕齊王(閔王)에게 이별을 고하고 귀국하려는데 제왕齊王이 막았다.
“나에게 나라의 동쪽 땅 5백 리를 주면 그대를 돌려보내 주려니와 그대가 나에게 이를 주지 않으면 돌려보낼 수 없다.”
태자가 말하였다.
“저의 사부師傅가 계시니 물러가 사부에게 여쭈어보겠습니다.”
사부인 신자愼子가 태자에게 일렀다.
“땅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땅을 아낀 나머지 돌아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면 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땅을 떼어 주는 것이 낫다고 여깁니다.”
태자가 들어가 제왕에게 말하였다.
“공경히 5백 리 땅을 바치겠습니다.”
이에 제왕은 태자를 초나라로 귀국시켜 주었다.
태자는 귀국하여 즉위하여 이 되었다.
그러자 제나라는 수레 50승의 사신을 보내어 약속한 동쪽 땅 5백 리를 달라고 요구하였다.
초왕楚王(襄王)이 신자愼子에게 고하였다.
“제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약속한 동쪽 땅을 달라고 하니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신자가 말하였다.
“왕께서 내일 군신들을 조회朝會할 때 모두 계책을 올리라고 하십시오.”
상주국上柱國 자량子良입현入見하니, 왕이 물었다.
“과인이 살아 돌아와 선왕先王을 장사하고 군신群臣을 다시 보고 사직社稷을 지키게 된 것은, 동쪽 5백 리 땅을 제나라에게 주기로 허락한 때문이오.
지금 제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땅을 달라고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소?”
자량이 말하였다.
“대왕께서는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왕께서 스스로 옥음玉音을 내시어 강한 만승지국萬乘之國나라에게 허락해 놓고, 주지 않으면 신의信義가 없어 후에 제후들과 맹약을 맺을 수 없게 됩니다.
청컨대 주었다가 다시 공격해 되찾으면 될 것입니다.
주는 것은 신의를 지키는 것이요, 공략해 되찾는 것은 무용武勇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자고 하는 것입니다.”
자량이 나가자 소상昭常입현入見하였다.
왕이 물었다.
“제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우리의 동쪽 땅 5백 리를 달라고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소?”
소상이 말하였다.
“주어서는 안 됩니다.
만승萬乘의 국가란 땅이 크기 때문에 만승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동쪽 땅 5백 리를 떼어 주면 이는 우리나라의 을 주는 게 됩니다.
만승지국이란 이름만 있을 뿐 천승지국만큼의 실력도 없게 되니, 불가합니다.
그 때문에 저는 주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청컨대 저 소상昭常이 지키겠습니다.”
소상이 나가자 이번에는 경리景鯉입현入見하였다.
왕이 물었다.
“제나라가 사신을 보내 동쪽 땅 5백 리를 요구하는데 어찌하면 좋겠소?”
경리가 말하였다.
“줄 수 없습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우리 초나라 단독으로 지켜낼 수도 없습니다.
왕께서 직접 옥음玉音을 내시어 만승의 강국인 제나라에게 허락해 놓고 주지 않게 되면, 이는 천하에 불의不義를 지게 되며 초나라 역시 단독으로 지켜낼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서쪽 나라에 가서 구원을 모색하겠습니다.”
경리가 나가자 신자愼子가 들어왔다.
왕은 세 대부의 계책을 신자에게 고하였다.
“자량은 과인에게 ‘주지 않을 수 없다.
준 다음 다시 공격하여 되찾자’라 하고 소상은 ‘주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지켜내겠다’라 하고 경리는 ‘줄 수 없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우리 단독으로 지켜 낼 수 없으니 자신이 나라의 도움을 찾아보겠다’고 하니 과인은 이 세 사람의 계책 중에 누구의 말을 들어야 옳겠습니까?”
신자가 대답하였다.
“왕께서는 세 사람의 말을 모두 쓰십시오.”
왕은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신자가 말하였다.
“청컨대 그 설명을 올리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면 왕께서도 참으로 그럴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먼저 대왕께서는 상주국上柱國 자량子良에게 수레 50승을 주어 출발시켜 땅 5백 리를 북쪽으로 제나라에 바치러 보내십시오.
그리고 자량이 출발한 이튿날 소상昭常대사마大司馬로 삼아 가서 동쪽 땅 5백 리를 지키도록 보내십시오.
그리고 다시 그 소상이 떠난 다음날 경리景鯉에게 수레 50승을 주어 서쪽으로 진나라의 구원을 청하러 보내십시오.”
왕이 말하였다.
“좋소.”
왕은 이에 자량에게 땅을 떼어 나라에 바치러 떠나게 하고는, 자량을 보낸 다음날 소상을 대사마로 삼아 동쪽 땅을 지키러 떠나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경리를 진나라에 구원의 사절로 보냈다.
자량이 제나라에 다다르자 제나라는 사람을 시켜 군대를 거느리고 동쪽 땅을 받게 하였다.
소상이 제나라 사신에게 응대하였다.
“내가 이 동쪽 땅을 관할하고 있는데 나는 이 땅과 생사生死를 함께 하겠다.
오척五尺되는 동자童子로부터 60에 이르는 노인까지 모두 30여만 명의 낡고 헌 무기를 지닌 둔병鈍兵이지만 응전하겠다.”
제왕이 자량에게 물었다.
대부大夫께서 와서 땅을 바쳤는데 지금 소상이 이를 지키니 이 무슨 일이오?”
자량이 말하였다.
“신은 직접 저의 나라 왕의 명을 받았습니다.
이는 소상이 왕명을 사칭詐稱한 것이니 왕께서는 공격하십시오.”
제왕齊王은 크게 군대를 일으켜 동쪽 땅을 공격해서 소상을 쳤다.
아직 국경까지 채 이르기도 전에 나라의 50만 대군이 제나라의 오른쪽 국경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리고 제나라에게 말하였다.
“무릇 초나라 태자를 가로막아 내보내지 않은 것은 불인不仁이요, 또 초나라의 동쪽 땅 5백 리를 빼앗고자 한 것은 불의不義이다.
군대를 거두어 철군하면 그냥 두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원컨대 싸움을 기다리겠다.”
제왕齊王은 겁이 나서 자량을 남쪽 나라로 보내어 잘 말해 주기를 청하였고, 서쪽으로 진나라에게 사신을 보내었다.
이렇게 하여 초나라는 제나라에 대한 근심을 해결하게 되었고, 사졸 하나 쓰지 않고 동쪽 땅을 다시 보전하게 되었다.


역주
역주1 楚襄王爲太子之時 質於齊 : 襄王은 頃襄王이라고도 하며, 懷王의 아들로 이름은 橫. 懷王 29년에 秦나라가 楚나라를 공격하여 楚나라가 패배하자 楚나라는 태자를 인질로 齊나라의 구원을 요청하였다.
역주2 懷王 : 襄王의 아버지이며 威王의 아들로 이름은 槐. 《史記》에 의하면 懷王이 秦나라의 꾐에 빠져 秦나라에 들어가자 楚나라 사람들은 齊나라에 있던 태자를 왕으로 맞아들이니, 이가 襄王이며 懷王은 襄王 3년에 秦나라에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역주3 東地五百里 : 楚나라의 동쪽 땅. 지금의 江蘇省 宿遷‧睢寧‧泗陽의 3개 현 일대.
역주4 追(退) : 追는 退의 誤記
역주5 愼子 : 愼到가 아닌가 한다. 신도는 전국 때 趙나라 출신으로 저서 《愼子》 42편이 있다. 또 墨子의 제자 중에 禽滑釐의 字가 愼子였다. 여기서는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역주6 上柱國 : 官職名으로 令尹 다음의 자리.
역주7 子良 : 楚나라 장수 昭陽의 字.
역주8 戰(我)國之半 : 여기서 戰은 我의 誤記, 혹은 衍文으로 보이는데, 우선 我로 번역하였다.
역주9 大司馬 : 관명. 天子를 돕는 六卿의 하나로 春秋時代 이후에는 각국에서 이를 설치, 軍政을 장악하였다.

전국책(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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