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慮世事之變, 權甲兵之用, 念
之迹, 計
之利乎?”
“嗣立不忘先德, 君之道也; 錯質務明主之長, 臣之論也.
爲人臣者, 窮有弟長辭讓之節, 通有補民益主之業. 此兩者, 君臣之分也.
今吾欲繼襄主之業, 啓胡‧翟之鄕, 而卒世不見也.
敵弱者, 用力少而功多, 可以無盡百姓之勞, 而享往古之勳.
夫有高世之功者, 必負遺俗之累; 有獨知之慮者, 必被庶人之
.
家聽於親, 國聽於君, 古今之公行也; 子不反親, 臣不逆主, 先王之通誼也.
夫制國有常, 而利民爲本; 從政有經, 而令行爲上.
事有所出, 功有所止. 事成功立, 然後德且見也.
且寡人聞之: 『事利國者行無邪, 因貴戚者名不累.』
臣聞之, 中國者, 聰明叡知之所居也, 萬物財用之所聚也, 賢聖之所敎也, 仁義之所施也, 詩書禮樂之所用也, 異敏技藝之所試也, 遠方之所觀赴也, 蠻夷之所義行也.
今王釋此, 而襲遠方之服, 變古之敎, 易古之道, 逆人之心, 畔學者, 離中國,
是以聖人觀其鄕而順宜, 因其事而制禮, 所以利其民而厚其國也.
是故聖人苟可以利其民, 不一其用; 果可以便其事, 不同其禮.
儒者一師而禮異, 中國同俗而敎離, 又況山谷之便乎?
故去就之變, 知者不能一; 遠近之服, 賢聖不能同.
今卿之所言者, 俗也. 吾之所言者, 所以制俗也.
今吾國東有河‧
, 與齊‧中山同之, 而無舟檝之用.
自常山以至代‧上黨, 東有燕‧
之境, 西有
‧秦‧韓之邊, 而無騎射之備.
故寡人且聚舟檝之用, 求水居之民, 以守河‧薄洛之水; 變服騎射, 以備其參胡‧樓煩‧秦‧韓之邊.
且昔者簡主不塞晉陽, 以及上黨, 而襄王兼戎取代, 以攘諸胡, 此愚知之所明也.
先時中山負齊之强兵, 侵掠吾地, 係累吾民, 引水圍鄗, 非社稷之神靈, 卽鄗幾不守.
今騎射之服, 近可以備上黨之形, 遠可以報中山之怨. 而叔也順中國之俗以逆簡‧襄之意,
“農夫勞而君子養焉, 政之經也. 愚者陳意而知者論焉, 敎之道也;
“當世輔俗, 古之道也; 衣服有常, 禮之制也. 修法無愆, 民之職也. 三者, 先聖之所以敎.
今君釋此, 而襲遠方之服, 變古之敎, 易古之道,
此兩者, 所以成官而順政也, 非所以觀遠而論始也.
知者作敎, 而愚者制焉; 賢者議俗, 不肖者拘焉.
夫制於服之民, 不足與論心; 拘於俗之衆, 不足與致意.
故勢與俗化, 而禮與變俱, 聖人之道也; 承敎而動, 循法無私, 民之職也.
因民而敎者, 不勞而成功; 據俗而動者, 慮徑而易見也.
今王易初不循俗, 胡服不顧世, 非所以敎民而成禮也.
是以莅國者不襲奇辟之服, 中國不近蠻夷之行, 非所以敎民而成禮者也.
“古今不同俗, 何古之法? 帝王不相襲, 何禮之循?
聖人之興也, 不相襲而王; 夏‧殷之衰也, 不易禮而滅.
諺曰: ‘以書爲御者, 不盡於馬之情; 以古制今者, 不達於事之變.’ 故循法之功, 不足以高世;
242. 무령왕武靈王이 낮에 한가하게 있을 때
무령왕武靈王이 한가히 있을 때 비의肥義가 모시고 있다가 말하였다.
“왕께서는 세상 일의 변화를 염려하시고 군대의 효용效用을 저울질하시며, 간자簡子와 양자襄子가 남기신 업적을 염두에 두시고, 호胡‧적狄의 이로움을 따지고 계십니까?”
“왕위를 이어받아 선덕先德을 잊지 않는 것은 임금의 도리이며, 신하로서 임금의 장점을 밝혀 주는 것은 신하의 도리이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는 조용히 있으면서도 백성에게 편리할 일을 가르쳐야 하며, 움직이면 옛날 선세先世의 공적을 밝힘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신하된 자는 궁곤窮困할 때에는 장유長幼에 따른 사양의 예절이 있어야 하며, 현달해서는 백성의 이익을 위해 군주의 사업을 도와야 하니, 이 두 가지가 곧 임금과 신하의 본분이다.
지금 나는 양주襄主의 사업을 계속하여 호적胡翟 땅을 개척하려 하지만 세상을 다 돌아보아도 〈나를 도울 만한 인물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적敵이 약하므로 적은 힘으로 큰 공을 이룰 수 있으며, 백성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도 지난날과 같은 훈업勳業을 누릴 수 있다.
무릇 세상에 뛰어난 공훈을 이룩한 자는 틀림없이 과거의 누습累習에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고, 독특한 지혜를 염려하는 자는 반드시 서인庶人의 원망을 듣게 되는 것이다.
지금 내가 백성들에게 호복胡服을 입히고, 그들의 기사법騎射法을 가르치려고 한다면 틀림없이 세상 사람들은 나를 의논거리로 삼을 것이다.”
“제가 듣건대 ‘의심하면서 일을 하면 공功이 없고, 의심하면서 행동하면 이름을 이루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왕께서 유속遺俗의 염려를 감당하겠다고 하신다면 천하의 의논을 돌아보지 마십시오.
무릇 지덕至德을 논하는 자는 세속과 화합하지 않으며, 큰 공功을 이루려는 자는 군중의 의견에 개의치 않는 법입니다.
옛날 순舜은 유묘有苗 땅에서 그들 풍습대로 〈간무干舞를 추었고〉, 우禹임금은 나국裸國에 옷을 벗고 들어갔습니다.
이는 하고 싶은 대로 하여 즐겁게 놀기 위해서가 아니고, 덕을 논하되 그 공적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일을 성취시키는 데 어둡고, 지혜로운 자는 싹이 나기도 전에 아는 것입니다.
“과인이 호복胡服의 〈장점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천하의 비웃음이 두려워 망설이는 것이다.
미친 자가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슬기로운 자는 슬픔을 느끼고, 어리석은 자가 웃는 것을 보고 어진 자는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세상에 내 뜻을 따르는 자라고 해서 모두 호복이 편리하다고 여길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비록 세상을 다 몰아 나를 비웃는다 해도 나는 호지胡地의 중산中山을 반드시 차지하리라.”
그리고 왕손설王孫緤을 시켜 〈왕의 숙부〉 공자公子 성成에게 이렇게 고하도록 하였다.
“과인은 호복을 입고 장차 조회朝會를 하려고 하니, 숙부께서도 호복을 입어 주십시오.
집에서는 어버이 말을 듣고, 나라에서는 임금 말을 듣는다는 것이 고금의 공행公行이며, 자식은 어버이를 배반할 수 없고, 신하는 임금을 거역할 수 없음은 선왕의 통의通誼입니다.
지금 과인이 호복으로 바꾸어 입도록 하였는데, 숙부께서 만약 입지 않으신다면 천하가 나를 의론거리로 삼을까 두렵습니다.
무릇 나라에는 상법常法이 있으니 이는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해야 하며 정치를 하는 데 벼리가 있으니 이는 실행함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덕을 밝히는 일은 천한 백성부터 논論하여야 하고, 정치를 행하는 데는 귀한 사람에게 믿음을 얻는 데 두어야 합니다.
지금 호복을 입는 뜻은, 하고 싶은 대로 하여 즐기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이란 시작해야 할 바가 있고, 공이란 그 결과가 드러나는 곳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일이 이루어지고 공이 이룩된 후에야 덕행이 장차 나타나 보일 것입니다.
지금 과인은 숙부께서 시정施政의 법칙을 위배하여 다른 공숙公叔들의 의견에 부화附和하여 호복을 입지 않으실까 걱정됩니다.
또 과인이 듣건대 ‘나라를 위하여 이로운 일을 하는 자는 행함에 사악함이 없어야 하고, 귀한 친척에 의지해 일을 벌인 자는 명성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과인은 다른 공숙의 옳은 생각을 모아 호복 착용을 성취하고 싶습니다.
이에 지금 설緤을 보내어 숙부를 뵙게 하오니 청컨대 입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미 대왕께서 호복을 입으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만 저는 병이 있어서 빨리 뛰지 못해서 이 때문에 가서 뵙지 못한 것입니다.
왕께서 지금 명하시니 신이 감히 우충愚忠을 진언하겠습니다.
제가 듣건대 중국中國이라는 곳은 총명과 예지가 거居하는 곳이요, 만물과 재용財用이 모이는 곳이며, 현자와 성인의 가르침이 있는 곳이요, 인의仁義가 베풀어지는 곳이며, 《시詩》‧《서書》‧《예禮》‧《악樂》이 쓰이는 곳이요, 기이하고 영민한 것, 그리고 기예가 시험되는 곳이며, 원방遠方이 우러러보고 찾아오는 곳이며, 만이蠻夷가 의義를 따라 배우는 곳입니다.
지금 왕께서 이를 버리고 오히려 원방의 옷을 입고, 옛날의 가르침을 변혁시키고 옛날의 도道를 바꾸며, 사람의 마음을 거역하고, 학자의 가르침을 배반하여 중국의 본분을 떠나려고 하십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잘 생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사자使者 설緤이 이 말을 왕에게 보고하자 왕이 말하였다.
“내가 실로 숙부께서 병이 깊이 드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는 즉시 직접 숙부 공숙성公叔成의 집을 찾아가서 스스로 청하였다.
“무릇 옷이란 쓰임을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예란 일을 편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은 그 고을을 살펴본 후 그 땅에 마땅한 것을 따르며, 그 일에 따라 예禮를 정하였으니 백성을 이롭게 하고 나라를 돈후하게 함이었습니다.
피발문신被髮文身과 착비좌임錯臂左衽은 구월甌越 백성들의 풍속이며, 흑치조제黑齒雕題와 제관출봉鯷冠秫縫은 대오大吳(태오) 나라의 풍속입니다.
이처럼 예복은 똑같지 않지만 그 편함을 따르는 데는 한결같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이 다르면 쓰임이 달라지고, 일이 다르면 예가 바뀌게 마련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성인이 진실로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한 가지의 쓰임을 고집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그 일의 편함을 위해서 그 예를 달리하였던 것입니다.
유가儒家에서 스승은 〈공자孔子〉 하나로되 예는 다르며, 중국도 같은 풍속이로되 가르침이 다른데, 하물며 산곡山谷에서 편하게 입어야 할 사람들에게 있어서야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거취의 변화에 대하여 지자智者는 하나로 통일하려고 들지 않으며, 원근遠近의 복장服裝은 현자‧성인도 같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궁향窮鄕의 풍속은 기이한 것이 많으며, 고루하고 과문寡聞한 자는 말이 많은 법입니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의심을 하지 말며,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하여 그릇되다고 하지 말고 다만 좋은 것을 구하는 데 공평하면 됩니다.
지금 숙부께서 하시는 말씀은 속습에 얽매인 것이요,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풍속을 제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동쪽으로 하수河水와 박락薄洛의 물을 제齊와 중산中山 등 세 나라가 함께 쓰고 있으면서도 배를 부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상산常山으로부터 대代, 상당上黨의 동쪽은 연燕나라와 동호東胡와 국경이 닿고 있고, 서쪽으로는 누번樓煩과 진秦나라‧한韓나라와 국경이 닿아 있으면서도 전혀 기사騎射의 방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과인이 배를 모으고 물가에 사는 사람을 소집하여, 훈련시켜 하수와 박락을 지키고자 하며, 호복으로 갈아 입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훈련시켜 호胡‧누번樓煩‧진秦‧한韓의 변경을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종전에 간주簡主께서는 진양晉陽과 상당上黨의 요새를 막지 않았었으나 양주襄主께서는 오히려 융戎을 겸탄兼呑해서 대代 땅을 취득하여 여러 호인을 몰아냈으니, 이는 어리석은 사람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밝히 아는 일입니다.
지난날 중산국中山國이 제齊나라의 강한 군대를 믿고 우리를 쳐들어와서 우리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고, 하수를 끌어들여 호성鄗城을 포위하였었는데, 사직의 신령들이 보좌하지 않았더라면 호성은 거의 지켜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선왕들께서 분노를 금치 못하셨는데 아직 그 원한을 갚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기사騎射에 편리한 호복으로 갈아입으면 가까이는 상당上黨의 형세를 수비할 수 있고, 멀리는 중산국中山國에 대한 원한을 갚을 수 있는데, 숙부께서는 중국의 풍속만 따르고자 하여 간주簡主와 양주襄主의 뜻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호복을 입는다는 데 대한 혐오嫌惡의 명분 때문에 국가의 치욕을 잊고 있으니, 이는 과인이 숙부에게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저는 어리석어 왕의 계책을 잘 알지 못하고 감히 세속의 소문을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이제 간주簡主‧양주襄主의 뜻을 이어 선왕先王의 뜻을 따르고자 하시는데, 제가 감히 명령을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다시 재배하니, 왕은 이에 호복을 하사하였다.
“농부가 수고하여 군자君子를 먹여 살리는 것은 정치의 정도正道이며, 어리석은 자가 의견을 진술하여 지자知者의 토론거리가 되는 것이 교화의 도입니다.
그런가 하면 신하로서는 충성된 말을 숨기지 않고 임금으로서는 간언을 막지 않는 것은 나라의 복록福祿입니다.
제가 비록 어리석으나 그 충성을 다하고 싶습니다.”
“생각에 악惡이 없으면 거리낄 것이 없고, 충성에 허물이 없으면 죄가 될 수 없소.
“세태世態에 따라 풍속을 보도輔導하는 것이 옛날의 도道이며 의복에 상규가 있음은 예禮의 제도이며, 법을 잘 지켜 허물이 없어야 하는 것이 백성의 직분이니, 이 세 가지는 바로 선성先聖들의 가르침입니다.
지금 왕께서는 이를 버리고 원방遠方의 복장을 따르려 하시며, 옛날의 가르침을 변혁시키고 옛날의 도를 바꾸려 하십니다.
그래서 신은 다시 한 번 고려하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그대는 세속世俗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민常民은 습속에 빠지고 학자는 소문에 잠긴다고 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는 그저 관직이나 지켜 나가고 정치나 순조롭게 해 나갈 뿐, 먼 앞을 내다보고 일을 시작하는 이의 태도는 아닙니다.
또 삼대(하夏‧은殷‧주周)는 의복이 같지 않았어도 천하를 제패하였고, 오패五伯는 그 교화가 달랐어도 정치가 이루어졌습니다.
지자知者가 가르침을 베풀면 우자愚者는 거기에 제약을 받게 되고, 현자가 풍속을 의론하면 불초한 자들이 거기에 구속을 받는 것입니다.
무릇 복식服飾 때문에 제약을 받는 백성들과 더불어 그들의 심사를 논할 필요가 없고, 습속에 구속받는 무리들과 뜻을 같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세時勢는 풍속을 따라 변화시켜야 하고 예의는 함께 달라지는 것이 성인의 도리이며, 교화를 이어받아 움직이며 법을 지켜 사심이 없어야 하는 것이 백성의 직분인 것입니다.
지혜와 학문이 있는 이는 능히 견문을 따라 변천할 수 있고, 예禮에 통달하면 시세를 따라 변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위해 일하는 자는 반드시 남의 말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니며, 현재를 제약하려는 자는 반드시 고대古代를 법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충심忠心을 숨겨 놓은 채 털어놓지 않는 것은 간신의 무리이며, 사사로운 일로 나라를 무함誣陷하는 것은 반역의 무리들입니다.
간사한 짓을 하는 자는 죽여야 하고, 나라를 해치는 자는 종족을 멸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는 선성先聖들이 형법刑法으로 밝혀 두셨으며, 신하로서는 큰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저는 비록 어리석으나 충성을 다 바칠 것이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뜻을 다하여 거리낌이 없는 것이 충忠이며, 임금으로서 간언을 막지 않는 것이 명明입니다.
충은 위험을 피하지 않으며, 명은 남을 거절하지 않는 법입니다.
“제가 듣기로 성인은 백성을 바꾸지 않으면서 교화하고, 지혜로운 자는 풍속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사람을 움직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백성을 거기에 따라서 교화하게 되면 수고롭지 않으면서 공을 이루고, 풍속을 거기에 의해 움직이면 지름길로 가게 되어 쉽게 효과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금 왕께서 변혁을 시작함에 세속을 따르지 아니하시고, 호복 착용에 세상 의견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니 이는 백성을 가르치고 예禮를 이루는 방법이 아닙니다.
또 이상한 의복을 입히면 뜻이 음일淫佚하게 되고, 풍속을 사벽邪僻하게 하면 백성을 어지럽히게 됩니다.
그 때문에 위정자는 괴상한 의복을 입지 않으며, 중국은 만이蠻夷의 행동을 가까이하지 않으니, 그렇게 해서는 백성을 가르치고 예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법을 따르면 과실이 없고 예를 따르면 사악함이 없게 됩니다.
신은 원컨대 왕께서는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금의 풍속이 같지 않은데, 어떤 고법古法을 따라야 하며, 제왕의 예제禮制가 서로 같게 이어지지 않았는데 어떤 예제를 따르라 합니까?
복희宓戲ㆍ신농神農씨는 백성을 가르치되 주벌誅罰한 적이 없었으며, 황제黃帝‧요堯‧순舜은 사람을 죽였으나 이를 두고 노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어 삼대三代에 이르러서는 때를 보아 법을 정하고, 일에 맞춰 예를 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법도法度와 제령制令이 각각 그 마땅함을 따랐고, 의복衣服과 기계器械가 각각 쓰기에 편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치세治世에는 반드시 한 가지만 고집할 것이 아니요, 나라를 편리하게 하면 꼭 고인을 법받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인이 일어남에 서로 답습하지 않았어도 왕천하王天下하였고, 하夏‧은殷이 쇠퇴함에 예를 바꾸지 않았어도 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고인古人과 반대된다고 하여 꼭 그르다고 할 수 없으며, 고법古法만 준수하였다고 해서 꼭 칭찬할 것도 못 됩니다.
또 옷이 기이하면 지기志氣가 음사淫邪해진다고 하시는데, 그러면 추鄒‧노魯 사람들은 이상한 옷을 한 번도 입는 자가 없었겠습니다.
그리고 풍속이 사벽하면 백성의 성품이 바뀐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오吳‧월越 같은 땅에서는 준수한 인물이 전혀 나올 수 없는 곳이겠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몸을 이롭게 하는 것을 일컬어 복服이라 하였고, 일을 편히 하기 위한 것을 일컬어 교敎라 하였으며, 진퇴進退의 예의를 일컬어 절節이라 한 것입니다.
의복을 제정하는 것은 백성을 평등하게 하기 위한 것이지 어짊의 여부를 논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성인은 세속에 따라 변천하고 현인은 변화에 따라 진퇴進退하는 것입니다.
속담에 ‘책에 쓰인 대로만 수레를 몰면 말의 능력을 완전히 알 수 없고, 옛법의 규정만 따르면 시사時事의 변천을 알 수 없다.’라 하였으니 옛 방법만 지켜 이룩한 공적은 당대에 높게 드러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옛날만 법받는 학설은 현재를 제압하기에 부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