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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策(2)

전국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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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책(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爲燕昭王合五國之兵而攻齊, 下七十餘城, 盡郡縣之以屬燕.
未下, 而燕昭王死.
卽位, 用齊人反間, 疑樂毅, 而使代之將.
樂毅奔趙, 趙封以爲.
欺詐騎劫, 卒敗燕軍, 復收七十城以復齊.
燕王悔, 懼趙用樂毅承燕之弊以伐燕.
燕王乃使人讓樂毅, 且謝之曰:
“先王擧國而委將軍, 將軍爲燕破齊, 報先王之讎, 天下莫不振動, 寡人豈敢一日而忘將軍之功哉?
會先王棄羣臣, 寡人新卽位, 左右誤寡人.
寡人之使騎劫代將軍者, 爲將軍久暴露於外, 故召將軍且休計事.
將軍過聽, 以與寡人有郄, 遂捐燕而歸趙.
將軍自爲計則可矣, 而亦何以報先王之所以遇將軍之意乎?”
望諸君乃使人獻書報燕王曰:
“臣不佞, 不能奉承先王之敎, 以順左右之心,
恐抵斧質之罪, 以傷先王之明, 而又害於足下之義, 故遁逃奔趙.
自負以不肖之罪, 故不敢爲辭說.
今王使使者數之罪, 臣恐侍御者之不察先王之所以畜幸臣之理, 而又不白於臣之所以事先王之心, 故敢以書對.
臣聞賢聖之君, 不以祿私其親, 功多者授之; 不以官隨其愛, 能當之者處之.
故察能而授官者, 成功之君也; 論行而結交者, 立名之士也.
臣以所學者觀之, 先王之擧錯, 有高世之心,
, 而以身得察於燕.
先王過擧, 擢之乎賓客之中, 而立之乎羣臣之上,
不謀於父兄, 而使臣爲亞卿.
臣自以爲奉令承敎, 可以幸無罪矣, 故受命而不辭.
先王命之曰: ‘我有積怨深怒於齊,
不量輕弱, 而欲以齊爲事.’
臣對曰: ‘夫齊霸國之餘敎也, 而驟勝之遺事也,
閑於兵甲, 習於戰攻.
王若欲攻之, 則必擧天下而圖之.
擧天下而圖之, 莫徑於結趙矣.
且又, 楚‧魏之所同願也.
趙若許, 約楚‧魏, 宋盡力, 四國攻之, 齊可大破也.’
先王曰: ‘善.’
臣乃口受令, 具符節, 南使臣於趙. 顧反命, 起兵隨而攻齊.
以天之道, 先王之靈, 河北之地, 隨先王擧而有之於.
濟上之軍, 奉令擊齊, 大勝之.
輕卒銳兵, 長驅至國. 齊王逃遁走莒, 僅以身免.
珠玉財寶, 車甲珍器, 盡收入燕. 陳於, 故鼎反於,
齊器設於. 之植, 植於.
自五伯以來, 功未有及先王者也.
先王以爲愜其志, 以臣爲不頓命, 故裂地而封之, 使之得比乎小國諸侯.
臣不佞, 自以爲奉令承敎, 可以幸無罪矣, 故受命而弗辭.
臣聞: 賢明之君, 功立而不廢, 故著於春秋; 蚤知之士, 名成而不毁, 故稱於後世.
若先王之報怨雪恥, 夷萬乘之强國, 收八百歲之蓄積, 及至棄羣臣之日, 餘令詔後嗣之遺義, 執政任事之臣, 所以能循法令, 順庶孽者, 施及萌隷, 皆可以敎於後世.
臣聞: 善作者, 不必善成; 善始者, 不必善終.
昔者, 五子胥說聽乎闔閭, 故吳王遠迹至於郢.
夫差弗是也, 賜之.
故吳王夫差不悟先論之可以立功, 故沉子胥而不悔. 子胥不蚤見主之不同量, 故入江而不改.
夫免身全功, 以明先王之迹者, 臣之上計也.
離毁辱之非, 墮先王之名者, 臣之所大恐也.
臨不測之罪, 以幸爲利者, 義之所不敢出也.
臣聞: 古之君子, 交絶不出惡聲; 忠臣之去也, 不潔其名.
臣雖不佞, 數奉敎於君子矣.
恐侍御者之親左右之說, 而不察疏遠之行也. 故敢以書報, 唯君之留意焉.”


466. 창국군昌國君 악의樂毅
창국군昌國君 악의樂毅 소왕昭王을 위하여 오국五國의 군사를 연합시켜 나라를 공격, 70여 성을 빼앗아 군현郡縣을 모두 나라에 소속시켰다.
아직 나머지 세 개의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을 때 연 소왕이 죽었다.
혜왕惠王이 즉위하자 제나라 사람의 이간책을 믿고 악의를 의심, 기겁騎劫을 대신 장수로 삼았다.
악의는 나라로 도망하였고 조나라에서는 악의를 받아들여 이를 망제군望諸君에 봉하였다.
제나라 전단田單은 기겁을 속여 연나라 군대를 대패시키고 빼앗겼던 70여 성을 도로 찾아 제나라를 수복하였다.
연 혜왕은 크게 후회하여 조나라가 악의를 등용하여 연나라가 피폐해진 틈을 다시 침범해 오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이에 연왕은 사자를 보내 악의를 꾸짖고 아울러 사과의 말을 전하였다.
선왕先王(연소왕燕昭王)께서 그대에게 나라를 들어 장군을 삼자 그대는 연나라를 위하여 제나라를 깨뜨려 선왕의 원수를 갚자 천하가 진동하였으니, 과인이 어찌 하루라도 그대의 공을 잊을 수 있겠소?
마침 선왕께서 죽고 과인이 새로 즉위하자 좌우가 과인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였소.
그러나 과인이 기겁으로 장군을 대신하게 한 것은 장군께서 오랫동안 한데서 비바람에 고생한 것을 생각해 그대를 불러 쉬게 하면서 국사를 의논하려던 의도였소.
그런데 장군께서 잘못 알고 과인과 틈이 생겨 드디어 연나라를 버리고 조나라로 갔소.
장군도 스스로 생각해 보시면 알겠지만 또 어떻게 해야 선왕께서 장군을 대우해 준 뜻을 갚겠소?”
망제군望諸君은 편지로 연왕에게 말하였다.
“제가 총명하지 못해 선왕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좌우의 뜻에 들지 못하였습니다.
부질斧質의 죄를 지어 선왕의 밝으심을 손상시키고 족하足下를 해칠까 두려워 조나라로 도망온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불초한 죄이기 때문에 더 이상 드릴 말씀도 없습니다.
지금 왕께서 사신을 보내어 저의 죄를 따지시는데, 저로서는 좌우의 신하들이 아직도 선왕께서 저를 사랑하신 도리를 알지 못하고 있으며 제가 선왕을 모신 마음도 헤아리고 있지 못한 것 같아 감히 서신으로 답하나이다.
저는 듣건대 현성賢聖한 임금은 친하다고 사사로이 祿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공이 많은 자에게 준다고 하였으며 또 그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관직을 주는 것이 아니며 능력에 맞는 자에게 그 자리를 맡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능력을 살펴 관직을 주는 임금은 성공하는 임금이요, 행실을 살펴 친구를 사귀는 자는 이름을 세운 선비인 것입니다.
제가 배운 바로 보건대 선왕의 신하를 쓰고 버리는 것은 높이 세상에 뛰어나려는 뜻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위왕魏王을 섬길 때 사신使臣의 명목으로 부절符節을 가지고 연나라를 살펴보고는 연나라에 머물렀습니다.
선왕께서 과연 과분하게 저를 거용擧用하여 빈객들 가운데서 발탁하시여 군신群臣들 위에 세우셨습니다.
그리고는 부형父兄들과 의논하지 않고 저를 아경亞卿으로 삼으셨습니다.
저 스스로도 명령을 받들고 가르침을 잘 받아 큰 죄 없이 지내면 요행이라고 여겨 명을 받아 사양을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선왕께서 저에게 분부하시를 ‘나와 제나라와는 깊은 원한이 있소.
우리의 국력이 약함도 따질 것 없이 당장 제나라를 치고 싶소.’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에 제가 대답하기를 ‘무릇 제나라는 패국霸國의 남은 교화敎化가 있으며 여러 차례 이긴 유사遺事도 있습니다.
그래서 군사에 여유가 있으며 전공戰攻도 뛰어납니다.
왕께서 만약 이를 공격하시려면 반드시 천하와 연합해서 도모하셔야 합니다.
또 천하와 연합해 도모하려면 조나라와 결합하는 것보다 첩경은 없습니다.
게다가 회북淮北송지宋地나라와 나라가 같이 노리고 있는 땅입니다.
조나라가 만약 결맹結盟을 허락하면 이어 초나라‧위나라 땅에 힘을 쏟아 이렇게 네 나라가 힘을 합해 공격하면 제나라를 크게 깨뜨릴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선왕께서 ‘좋다.’라 하셨습니다.
저는 이처럼 구두 명령을 받들고 부절符節을 갖추어 남으로 조나라에 사신을 가서 성공시킨 후 돌아와 복명하고 군대를 일으켜 제나라를 공격하였습니다.
하늘의 도움과 선왕의 영험靈驗하심에 힘입어 하북河北 각지는 선왕께서 공격하는 대로 점령되었습니다.
제수濟水 가의 군사들도 명령을 받들어 제나라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날래고 예리한 병졸들이 제나라 도읍까지 밀고 들어가자 민왕閔王로 도망하여 겨우 몸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일체의 주옥과 보물, 거마 병갑과 진기珍器들이 모두 연나라로 들어오게 되어 대려大呂원영궁元英宮에 진열하고, 옛날 제나라에게 빼앗겼던 역실궁歷室宮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또 제나라 보기寶器들은 영대寧臺에 진열되고 계구薊丘의 식물은 제나라 문수汶水 가 대나무로 숲 뒤에 심었습니다.
오패五霸 이래 공과 업적이 선왕처럼 위대하였던 이는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선왕께서는 크게 만족하시어 제가 명령을 거역하지 않았다고 하시며 저에게 토지를 떼어 하셔서 작은 나라의 제후에 비길 만큼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저는 비록 재능은 없지만 명을 받들고 가르침을 이어 받아 다행히 좌를 짓지 않았기에 선왕의 명을 사양하지 못하였었습니다.
저는 듣건대 현명한 군주는 공을 이룬 후에 그것을 폐하지 않기 때문에 춘추春秋에 드러나며, 선각先覺의 선비는 이름을 이룬 후에 이를 허물어뜨리지 않기 때문에 후세에 칭찬을 받는다고 합니다.
선왕 같은 분은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으며 만승의 강대국을 쳐부수어, 그 나라 8백 년 동안의 축적蓄積을 거두셨는데 군신君臣을 버리고 세상을 떠날 때는 후사後嗣에게 를 지니라고 부탁하시고, 정사를 맡고 일을 처리하는 신하들로 하여금 법령을 지키고 서얼庶孽들로 하여금 따라 복종하게 하고, 백성들에게 은혜가 베풀어지도록 좋은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저는 듣건대 일을 잘하는 자라고 해서 꼭 좋은 성과를 얻는다는 법도 없고 시작을 잘한 자가 끝도 좋다는 법은 없다고 합니다.
옛날 오자서伍子胥의 계획이 합려闔閭에게 먹혀 들었기에 오왕吳王은 멀리 까지 발자국이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 부차夫差는 그렇지 못하여 오자서를 가죽부대에 넣어 장강長江에다 띄웠습니다.
그러므로 오왕 부차는 선진先進들의 말을 들으면 업적을 이룬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자서를 강에 빠뜨려 죽이고도 후회할 줄 몰랐으며, 오자서는 합려와 부차가 아량이 같지 않다는 것을 미리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강에 빠져 죽음을 당하고도 자기의 불찰을 고치려 들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몸을 보전하고 업적을 온전히 하여 선왕의 자취를 밝히는 것이 바로 저의 상책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몸이 비방誹謗에 훼욕을 당하여 선왕의 명성을 손상시키는 것은 바로 제가 제일 겁내는 일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죄가 닥쳐 오는데 요행을 이롭게 여기는 행동은 감히 입밖에 낼 수가 없습니다.
저는 듣건대 옛날 군자는 친구와 절교할 때 그의 악담惡談을 늘어놓지 않으며, 충신은 떠날 때는 그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이 비록 우둔하나 자주 군자들에게 들은 바가 있습니다.
임금을 가까이 모시고 있는 한 좌우 대신들의 말만 듣고 소원疎遠한 사람의 행동을 살피지 못할까 염려되어 감히 서신으로 답하오니 임금께서는 유념하시기를 바랍니다.”


역주
역주1 : 아주 뛰어난 편지글로 널리 膾炙되는 문장이다. 《史記》 〈樂毅田單列傳〉과 《新序》 〈雜事三〉에도 실려 있으며, 《史記》 〈燕世家〉에도 관련 기록이 있다.
역주2 昌國君 樂毅 : 앞편의 ‘蘇代自齊使人謂燕昭王’편의 주 참조. 昌國은 원래 제읍이었으나 燕에게 빼앗겼다. 그 땅에 燕 昭王은 樂毅를 봉하였다.
역주3 三城 : 聊莒‧卽墨 세 성.
역주4 惠王 : 燕昭王의 아들. 齊의 反間計에 걸려 악의를 파면하였다.
역주5 騎劫 : 惠王에게 총애를 얻어 樂毅 대신 장군이 되었으나 田單에게 죽었다.
역주6 望諸君 : 樂毅가 燕에서 趙로 도망하여 趙에게 얻은 封號. 望諸는 澤名. 孟諸澤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河南省 商丘縣. 虞城縣界. 원래 齊 땅이나 당시 趙의 소유였다.
역주7 田單 : 원래 齊나라의 疏族. 처음에는 수도 臨淄의 小吏였으나 燕과 전쟁 때 卽墨 싸움에서 火牛陣의 전법으로 燕軍을 대패시키고 齊를 수복, 安平君에 봉해져 相國이 되었다.
역주8 假節於魏王 : 樂毅는 먼저 魏를 섬겼으나 燕 昭王이 賢士를 부른다 하여 魏 昭王과 거짓으로 모의한 후 그 符節을 들고 燕에 와서는 되돌아가지 않았다.
역주9 淮北‧宋地 : 淮北은 淮水의 북쪽. 지금의 江蘇省, 安徽省의 北部, 齊로서는 南部. 宋地는 지금의 河南省 商丘縣과 江蘇省 徐州市 일대. 이때 宋은 아직 망하지 않았고, 樂毅가 齊를 공격하기 2년 전에 齊에게 망하였었다.
역주10 [濟上] : 衍文인 듯하다.
역주11 大呂 : 齊나라의 大鍾 이름.
역주12 元英 : 燕나라의 궁전 이름.
역주13 歷室 : 궁전 이름. 《史記》에는 ‘磨室’로 되어 있다..
역주14 寧臺 : 燕의 樓臺 이름.
역주15 薊丘 : 燕나라의 수도. 지금의 북경 德勝門 서북 土城關이 그 유허지라 한다.
역주16 汶皇 : 皇은 《史記》에는 ‘篁’ 즉, 대나무로 되어 있다. 汶水가의 대나무.
역주17 鴟夷而浮之於江 : 鴟夷는 가죽부대. 夫差는 越의 勾踐을 용서해 주는 일에 적극 반대하는 伍子胥를 죽여 가죽 부대에 넣어 강에 띄워 버렸다.

전국책(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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