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昔
去夏入殷, 殷王而夏亡. 管仲去魯入齊, 魯弱而齊强.
夫人主年少而矜材, 無法術以知奸, 則大臣主斷國私, 以禁誅於己也,
春秋戒之曰:‘楚
聘於鄭, 未出竟, 聞王病, 反問疾, 遂以冠纓絞王, 殺之, 因自立也.
欲自刃於廟, 崔杼不許. 莊公走出, 踰於外牆, 射中其股, 遂殺之, 而立其弟
.’
近代所見:
用趙, 餓主父於沙丘, 百日而殺之;
, 擢閔王之筋, 縣於其廟梁, 宿夕而死.
夫癘雖
, 上比前世, 未至絞纓射股; 下比近代, 未至擢筋而餓死也.
夫劫弑死亡之主也, 心之憂勞, 形之困苦, 必甚於癘矣.
“탕湯은 박亳에서, 무왕武王은 호鄗(鎬)에서, 불과 1백 리도 되지 않은 땅을 근거로 천하를 차지하였습니다.
지금 순자荀子는 천하의 현인賢人이어서 군君께서 1백 리의 땅을 봉封해 주어 세력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군에게 편리하지 않을 것이라 여기는데 어떻습니까?”
순자가 조趙나라로 가자 조왕趙王은 그를 상경上卿으로 삼았다.
“옛날에 이윤伊尹이 하夏나라를 버리고 은殷나라로 가자 은나라는 흥하고 하나라는 멸망하였으며, 관중管仲이 노魯나라를 떠나 제齊나라로 가자 노나라는 약해지고 제나라는 강해졌습니다.
무릇 현자賢者가 있는 곳은 그 나라 임금이 높아지지 않은 곳이 없고, 나라가 번영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지금 순자는 천하의 현인인데 귀하는 어찌 이를 사절하였습니까?”
이에 사람을 보내어 순자를 조나라에서 모셔 오게 하니, 순자는 글을 써서 사절謝絶하였다.
“여병癘病을 앓는 사람이 임금을 자신보다 더 불쌍하다고 여긴다[癘人憐王]는 말은 공손하지 못한 말이기는 합니다.
그렇기는 하나 잘 살피지 않을 수 없으니, 이는 위협을 받아 시해弑害당한 임금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무릇 임금이 어리면서 자기 재주만 믿고 간신奸臣을 가려낼 방법을 모르면, 대신大臣이 주권을 독단獨斷하여 나라를 사사롭게 여겨 자기에게는 주살誅殺이 금지되도록 계책을 세워 놓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어진 어른을 죽이고 유약한 자를 세우며 적자嫡子를 폐하고 불의한 자를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춘추春秋》에서는 이를 경계하기를 ‘초楚나라 왕자王子 위圍가 정鄭나라에 빙문聘問 가는 길에 국경을 미처 넘지 않았을 때 고국의 왕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문병하고는 마침내 갓끈으로 왕을 교살絞殺하고 자립하였다’ 하였고,
‘제齊나라의 최저崔杼는 아내가 미인이었는데 장공莊公이 사통하니, 자기 당黨을 몰아 임금을 공격하였다.
장공이 나라를 반씩 나누자고 청하였지만 최저는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또 묘廟에서 자살하겠다고 하였지만 이 역시 최저가 허락하지 않아, 장공은 도망가려고 담을 넘자 활로 넓적다리를 쏘아 죽인 후, 그 동생 경공景公을 세웠다’라고 하였습니다.
근대에 보아도 이태李兌가 조趙나라에서 용사用事할 때 주보主父 영왕靈王을 사구沙丘에서 굶게 했다가 1백일 만에 죽게 한 일이 있고, 요치淖齒가 제齊나라에서 용사用事할 때 민왕閔王의 힘줄을 뽑아 사당 대들보에 달아매어 밤 사이 죽게 하였습니다.
무릇 여병癘病은 비록 옹종포질癰腫胞疾이지만 위로 전세前世에 비해 보면 갓끈으로 교살당하는 것이나, 넓적다리에 활을 맞고 죽는 왕에 비할 바 못되며, 아래로 근대에 비추어 보아도 힘줄이 뽑혀 대들보에 매달려 죽거나, 굶어 죽는 것에는 이르지 않습니다.
위협을 당하여 시해당한 임금이야말로 마음의 고통과 신체의 괴로움은 틀림없이 여병癘病보다 심할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보면 여병을 앓는 자가 시해당한 임금을 불쌍히 여기는 일은 있을 수 있습니다.”
진보珍寶와 수주隋珠를 사람들은 찰 줄을 모르고
여주閭姝와 자사子奢 같은 미인도 중매할 줄 모르고
장님에게 눈 밝다 하고 귀머거리에게 귀 밝다 하네
바른 것을 틀리다 하고 길吉한 것을 흉하다 하네
《시詩》에 이르기를 “하늘은 심히 신명神明하시어 스스로 재화災禍를 초래하지 말지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