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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策(2)

전국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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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책(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人有惡蘇秦於燕王者, 曰:
“武安君, 天下不信人也.
王以萬乘下之, 尊之於廷, 示天下與小人羣也.”
謂燕王曰:
“臣之鄙人也, 見足下身無咫尺之功,
而足下迎臣於郊, 顯臣於廷.
今臣爲足下使, 利得十城, 功存危燕, 足下不聽臣者, 人必有言臣不信, 傷臣於王者.
臣之不信, 是足下之福也.
使臣信如, 廉如伯夷, 孝如曾參,
三者天下之高行, 而以事足下, ?”
燕王曰:
“可.”
曰:
“有此, 臣亦不事足下矣.”
蘇秦曰:
“且夫孝如曾參, 義不離親一夕宿於外, 足下安得使之之齊?
廉如伯夷, 不取素飡, 汙武王之義而不臣焉, 辭孤竹之君, 餓而死於首陽之山.
廉如此者, 何肯步行數千里, 而事弱燕之危主乎?
信如尾生, 期而不來, 抱梁柱而死.
信至如此, 何肯揚燕‧秦之威於齊而取大功乎哉?
且夫信行者, 所以自爲也, 非所以爲人也.
皆自覆之術, 非進取之道也.
且夫代興, 迭盛, 皆不自覆也. 君以自覆爲可乎?
則齊不益於, 足下不踰楚境, 不窺於邊城之外.
且臣有老母於周, 離老母而事足下, 去自覆之術, 而謀進取之道,
臣之趣固不與足下合者. 足下皆自覆之君也, 僕者進取之臣也,
所謂以忠信得罪於君者也.”
燕王曰:
“夫忠信, 又何罪之有也?”
對曰:
“足下不知也.
臣鄰家有遠爲吏者,
其妻私人.
其夫且歸, 其私之者憂之.
其妻曰: ‘公勿憂也,
吾已爲藥酒以待之矣.’
後二日, 夫至.
妻使妾奉巵酒進之.
妾知其藥酒也, 進之則殺主父, 言之則逐主母, 乃陽僵棄酒. 主父大怒而笞之.
故妾一僵而棄酒, 上以活主父, 下以存主母也. 忠至如此, 然不免於笞, 此以忠信得罪者也.
臣之事, 適不幸而有類妾之棄酒也.
且臣之事足下, 亢義益國, 今乃得罪, 臣恐天下後事足下者, 莫敢自必也.
且臣之說齊, 曾不欺之也?
使之說齊者, 莫如臣之言也, 雖堯‧舜之智, 不敢取也.”


446. 어떤 이가 연왕燕王에게 소진蘇秦을 중상하다
어떤 사람이 소진蘇秦을 중상하여 연왕燕王에게 말하였다.
무안군武安君(소진蘇秦)은 천하에 신용이 없는 자입니다.
대왕께서 만승의 임금으로서 스스로 굽혀 그를 조정에서 높여 주었으니, 이는 천하에 임금이 소인과 한 무리가 된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무안군이 나라로부터 돌아오자 연왕은 과연 숙소조차도 마련해 주지 않았다.
〈소진이〉 연왕을 만났다.
“저는 원래 동주東周의 비루한 사람으로 처음 족하足下를 뵈었을 때는 지척의 공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족하가 나를 교외에까지 나와 맞아 주고 조정에서 높여 주었습니다.
지금 제가 족하足下를 위하여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10개 성을 되받아 오고, 위급한 나라를 구해 주는 공을 세웠는데도 족하께서는 제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어떤 사람이 저를 믿지 못할 인물이라고 대왕 앞에서 중상모략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신용이 없는 것은 곧 족하에게 이 됩니다.
제가 만약 미생尾生 같은 믿음이 있고, 백이伯夷처럼 청렴하며, 증자曾子처럼 효성이 있다고 합시다.
이 셋은 천하에 고매한 품행을 갖춘 사람들인데 그래야만 족하를 섬길 수 있다고 보십니까?”
임금이 말하였다.
“그렇소.”
소진이 말하였다.
“그렇게 갖추어졌으면 저는 족하를 섬기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소진은 말을 이었다.
“무릇 증삼 같은 효성이 있었다면 로 보아 단 하룻밤이라도 부모를 떠나 밖에서 잘 수 없었을 텐데 족하가 어찌 저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낼 수 있었겠습니까?
또 백이는 청렴하여 소손素飡도 먹지 아니하고 무왕武王를 더럽다고 여겨 그 신하가 되지 않은 절개에, 고죽국孤竹國의 임금 자리도 버리고 수양산首陽山에서 굶어 죽었습니다.
청렴이 이와 같았다면 어찌 수천 리를 걸어와 약한 나라의 위험한 임금을 섬기겠다고 나서겠습니까?
또 믿음이 미생 같다면 그는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한 애인이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자 물이 불어나는 데도 떠나지 않고 다리 난간을 껴안고 물에 묻혀 죽었습니다.
믿음이 이처럼 지극하다면 어찌 연나라와 나라의 위세를 나라에다 드날려 큰 공을 세우려 하겠습니까?
또 세상에 신용 있게 행동한다고 하는 자는 모두 자기를 위해 하는 것이지, 남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 자기 만족을 위한 일이지 진취적進取的인 길은 아닙니다.
삼왕三王이 차례로 흥기하였고, 오패五霸가 돌고 돌아 흥성한 것은 모두가 자기 만족을 위해서 된 일이 아닌데 임금이 자기 만족을 위해서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제나라는 영구營丘 땅 외에 이익을 두지 않았을 것이며, 족하는 나라의 국경을 넘어 보지 못하였을 것이요, 변방의 성밖을 엿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노모老母나라에 살아 계신 데도 노모를 떠나 족하를 섬겼으니 이는 자기 만족 술책을 버리고 진취의 길을 도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의 이 진취적인 길은 족하와 화합될 수 없으니, 족하는 바로 자기 만족을 삼는 임금인 때문이요, 저는 진취를 앞세우는 신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의 충성과 믿음이 임금에게 죄를 얻게 된 것이라 말한 것입니다.”
연왕이 말하였다.
“무릇 충성과 믿음이 어찌 죄가 된단 말이오?”
소진이 대답하였다.
족하足下는 알지 못합니다.
저의 이웃집에 멀리 외지에 가서 벼슬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 처자는 남편 없는 틈에 외간 남자와 사통私通 하고 있었습니다.
그 남편이 장차 돌아올 때가 되자 그 외간 남자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 여자가 ‘그대는 아무 걱정 마십시오.
내가 이미 술에 독약을 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틀 후, 그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여자는 첩을 시켜 술병을 들고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그 술에 독약이 들어 있는 것을 안 은, 올리자니 남편이 죽게 되겠고 말을 하자니 처가 쫓겨나게 되겠기에, 거짓으로 넘어지는 체하고는 술을 엎어 버리자 남편은 노하여 첩을 매질하였답니다.
그러므로 한 번 넘어져 술을 엎질러 위로는 남편을 살리고 아래로는 처를 살려 주어, 충성이 이와 같이 지극하였건만 매질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충성과 믿음이 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의 일이 마침 불행히도 그 첩이 술 엎지른 것과 같았습니다.
제가 족하를 섬기는 것은 의를 높여 나라를 유익하게 해드리려는 것이었는데 지금 오히려 죄가 되었으니 저는 앞으로 천하에 족하를 섬길 자들이 감히 다시는 무슨 일을 자신있게 꼭 해내겠다고 나서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또 제가 제나라를 설득하면서 그들을 조금도 속이지 않았겠습니까?
제나라에 유세를 맡은 자로서 저만한 언변을 갖지 못했다면 비록 그 임금이 같은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해도 감히 나를 채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역주
역주1 : 이 이야기는 《史記》 〈蘇秦列傳〉에도 들어 있으며, 455장 蘇代의 것과 아주 흡사하다.
역주2 武安君從齊來 : 蘇秦이 齊에 가서 燕이 빼앗겼던 10개 城을 되찾아왔다.
역주3 不館 : 숙소를 준비해 두지 않음. 《史記》에는 不官, 즉 그 원래의 관직을 박탈했다고 되어 있다.
역주4 東周 : 周나라 考烈王 말년에 河南의 惠公이 그 아들 班을 鞏(지금의 河南省 鞏縣)에 封하여 왕으로 받들고 東周라 칭하였다.
역주5 尾生 : 尾生은 複姓, 微生, 혹은 春秋 때의 魯나라 사람 微生高가 아닌가 한다. 《莊子》 〈盜跖篇〉에 의하면 애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는데, 비가 많이 와 물이 불어나는 데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다리 기둥을 붙잡고 죽었다 한다.
역주6 [不]可乎 : 원문의 ‘不’은 鮑彪本에 의하여 衍文으로 처리하였다.
역주7 三王 : 夏‧殷‧周 三代의 開國王인 禹‧湯과 文‧武王.
역주8 五霸 : 齊 桓公‧晉 文公‧宋 襄公‧秦 穆公‧楚 莊王.
역주9 營丘 : 齊나라의 초기 도읍지. 太公望 呂尙이 齊에 封해지자 지금의 山東省 昌樂縣인 營丘에 도읍을 건설하였다. 그 후 獻公 때 臨淄로 옮겨 역시 營丘라 불렀다.

전국책(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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