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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策(2)

전국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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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王噲旣立, .
蘇秦之在燕也, 與其相爲婚, 而蘇代與子之交.
及蘇秦死, 而復用蘇代.
燕噲三年, 與楚‧三晉攻秦, 不勝而還.
子之相燕, 貴重主斷.
蘇代爲齊使於燕,
燕王問之曰:
“齊宣王何如?”
對曰:
“必不霸.”
燕王曰:
“何也?”
對曰:
“不信其臣.”
蘇代欲以激燕王以厚任子之也.
於是燕王大信子之. 子之因遺蘇代百金, 聽其所使.
謂燕王曰:
“不如以國讓子之.
人謂堯賢者, 以其讓天下於許由,
由必不受, 有讓天下之名, 實不失天下.
今王以國讓相子之, 子之必不敢受,
是王與堯同行也.”
燕王因擧國屬子之, 子之大重.
或曰:
, 及老, 而以啓爲不足任天下, 傳之益也.
啓與支黨攻益而奪之天下,
是禹名傳天下於益, 其實令啓自取之.
今王言屬國子之, 而吏無非太子人者,
是名屬子之, 而太子用事.”
王因收印自三百石吏而效之子之.
子之南面行王事, 而噲老不聽政, 顧爲臣, 國事皆決子之.
子之三年, 燕國大亂, 百姓恫怨.
將軍‧太子平謀, 將攻子之.
謂齊宣王:
“因而仆之, 破燕必矣.”
王因令人謂太子平曰:
“寡人聞太子之義, 將廢私而立公, 飭君臣之義, 正父子之位.
寡人之國小, 不足先後.
雖然, 則唯太子所以令之.”
太子因數黨聚衆, 將軍市被圍公宮, 攻子之,
不克; 將軍市被及百姓乃反攻太子平. 將軍市被死已殉,
國構難數月, 死者數萬衆, 燕人恫怨, 百姓離意.
謂齊宣王曰:
“今伐燕, 此文‧武之時,
不可失也.”
王因令, 以因北地之衆以伐燕.
士卒不戰, 城門不閉, 燕王噲死.
齊大勝燕, 子之亡.
二年, 燕人立, 是爲燕昭王.


450. 연왕 가 즉위하고 나서
연왕燕王 가 즉위하고 나서 소진蘇秦나라에서 죽었다.
소진이 일찍이 연나라에서 활동할 때, 연나라 상국相國 자지子之와는 자녀를 혼인시켜 인척을 맺어 두었었고, 동생 소대蘇代 역시 상국 자지와 친구 사이가 되었다.
소진이 죽자 선왕宣王은 다시 소대를 등용하였다.
연왕 쾌가 즉위한 지 3년, 나라가 삼진三晉과 더불어 나라를 공격하였지만 승리 없이 돌아오고 말았다.
당시 자지는 연나라 재상으로서 권력이 지극하여 일체의 국정을 독단하고 있었다.
소대가 제나라를 위해 연나라에 사신으로 왔다.
연왕이 소대에게 물었다.
“제 선왕은 어떤 사람인가?”
소대가 대답하였다.
“그는 패업霸業을 성공할 만한 인물이 못 됩니다.”
연왕이 말하였다.
“어째서 그렇소?”
소대가 말하였다.
“그는 신하를 믿지 않습니다.”
소대는 이런 말로 연왕을 격동시킨 것은 자지를 더욱 신임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연왕은 자지를 더욱 믿게 되었고, 자지는 자지대로 소대에게 1백 의 금을 선사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되었다.
녹모수鹿毛壽가 연왕에게 말하였다.
“나라를 자지子之에게 넘겨 주시느니만 못합니다.
사람들이 를 칭송하고 있는 것은 그가 천하를 허유許由에게 양도하였기 때문입니다.
허유가 틀림없이 받지 않을 것이므로 이는 양도한 명성만 있고 실제로는 천하를 잃지 않았습니다.
지금 만약 왕께서 나라를 상국相國인 자지에게 넘겨 준다면 자지는 틀림없이 감히 받지 못할 것입니다.
대왕은 곧 요임금 같은 행동을 하신 것이 됩니다.”
이 계략에 속은 연왕은 나라를 다 들어 자지에게 맡겨 자지의 권세가 막중하게 되었다.
다른 어떤 자가 말하였다.
임금이 에게 천하를 맡기고 자신의 아들 는 오히려 신하로 삼았다가, 늙게 되자 계에게는 천하를 넘겨 줄 수 없다고 여겨 익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러자 계와 그를 지지하던 도당들은 익을 공격하여 천하를 빼앗아 버렸습니다.
이는 우가 명의상 천하를 익에게 넘겨 준 것일 뿐, 실제로는 계로 하여금 천하를 탈취하게 한 것입니다.
지금 왕께서는 말로 천하를 자지에게 넘겨 주었지만 관리들은 태자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습니다.
이는 명의상 자지에게 위탁하는 것뿐이고, 실제로는 오히려 태자에게 국정을 장악하게 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듣자 연왕은 관리의 직인을 다 거둬들여 그중에 3백 석 이상의 봉록을 받는 자의 것은 자지에게 넘겨 주었다.
자지는 이로부터 실제로 남면南面하여 왕 노릇을 시작하였고, 늙은 는 정사에 관여하지 않고 오히려 신하가 되어 일체의 국사는 자지가 결정하였다.
자지가 국정을 장악한 지 3년째 되던 해, 연나라에서는 대란이 일어나 백성들이 비통과 원한에 빠졌다.
장군 시피市被태자太子 이 모의하여 자지를 치려 하였다.
한편 〈제나라 상국〉 저자儲子가 제 선왕에게 말하였다.
“이 기회에 자지의 지위를 엎어 버리면 틀림없이 연나라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이에 제 선왕은 사람을 파견하여 태자 에게 일렀다.
“과인은 당신 태자께서 의로운 분으로서 사사로움을 폐하고 공을 받들며 군신의 명의를 바로 세우고 부자의 위치를 정확히 한다고 들었소.
그러나 과인은 나라는 작고 힘이 없어 앞뒤에서 도와 드릴 수가 없습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원한다면 오직 태자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태자는 이에 무리를 모으고, 장군 시피市被는 궁전을 포위하여 자지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기지 못하자 장군 시피市被와 백성들은 도리어 태자 평을 공격하여 시피는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나라가 싸움에 얽혀 수개월을 끌자 수만 명이 죽고 연나라 백성들은 원망 끝에 태자에게 배반할 생각까지 품게 되었다.
맹가孟軻가 제 선왕에게 일렀다.
“지금 연나라를 공략하는 것은 마치 문왕文王무왕武王 때에 같은 폭군을 칠 기회를 만난 것과 같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제 선왕은 그 말을 인하여 결국 장자章子에게 오도五都의 군대를 주어 북쪽의 연나라 가까운 민중들과 함께 연나라를 공격하였다.
마침 연나라 자지子之의 군사들은 싸우지 않고 성문도 잠그지 않아 연왕 쾌가 죽었다.
제나라는 대승을 거두었으며, 자지도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2년이 지난 후 연나라 백성들은 태자 평을 왕으로 맞이하니 이가 곧 소왕昭王이다.


역주
역주1 : 이 이야기는 《史記》 〈燕昭公世家〉와 〈蘇秦列傳〉 등에 나뉘어 실려 있으며, 《韓非子》 〈外儲說右下〉에도 실려 있다. 한편 燕王 噲는 燕나라 易王의 아들로 재위 7년 만에 판단을 잘못하여 나라를 子之에게 넘겼다. 그 때문에 諡號가 없다.
역주2 蘇秦死於齊 : 蘇秦은 燕에서 易王의 어머니인 文侯 부인과 사통하다가 誅罰이 두려워 계략 끝에 燕王에게 거짓 죄를 진 것처럼 齊나라로 쫓아 주면 齊에 가서 간첩활동을 하겠다고 하였다. 齊는 이에 속아 그를 높이 客卿으로 삼았다. 그후 大夫들의 싸움 끝에 발각되어 車裂刑을 당하였다.
역주3 子之 : 燕의 相國. 噲로부터 燕을 물려받아 내란 끝에 죽었다.
역주4 齊 宣王 : 《史記》에는 齊 湣王이라고 되어 있으나 宣王이 옳다. 司馬遷이 《史記》를 쓸 때 田和 아래 悼子 一世를 빼놓았기 때문이다.
역주5 鹿毛壽 : 燕의 臣下, 모두 子之와 蘇代의 일당.
역주6 禹授益而以啓爲吏 : 益은 伯益, 舜의 신하로 禹를 도와 治水 사업에 공을 세웠다. 禹가 천하를 주려 하자 箕山에 숨었다. 啓는 禹의 아들.
역주7 市被 : 燕나라 장군.
역주8 儲子 : 당시 齊나라의 상국.
역주9 孟軻 : 戰國 때 鄒人. 字는 子輿, 子思에게 배워 孔子의 뜻을 펴 《孟子》 7편을 지어 亞聖으로 불렸다. 한편 이 구절이 지금의 《孟子》에 없다.
역주10 章子將五都之兵 : 章子는 齊나라 사람. 五都는 곧 齊나라를 일컬음. 수도 臨淄가 고대 五都 중의 하나여서 붙인 이름.
역주11 公(太)子平 : ‘公’은 ‘太’가 되어야 한다.

전국책(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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