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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國策(2)

전국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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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책(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之孫豫讓, 始事范‧中行氏而不說, 去而就知伯, 知伯寵之.
及三晉分知氏, 趙, 而將其頭以爲飮器.
豫讓遁逃山中, 曰:
“嗟乎!
士爲知己者死, 女爲悅己者容.
吾其報知氏之讎矣.”
乃變姓名, 爲刑人, 入宮塗厠, 欲以刺襄子.
襄子如厠, 心動, 執問塗者, 則豫讓也.
刃其, 曰:
“欲爲知伯報讎!”
左右欲殺之. 趙襄子曰:
“彼義士也, 吾謹避之耳.
且知伯已死, 無後, 而其臣至爲報讎, 此天下之賢人也.”
卒釋之.
豫讓又漆身爲厲, 滅鬚去眉, 自刑以變其容, 爲乞人而往乞, 其妻不識, 曰:
“狀貌不似吾夫, 其音何類吾夫之甚也?”
又呑炭爲啞, 變其音.
其友謂之曰:
“子之道甚難而無功,
謂子有志則然矣, 謂子智則否.
以子之才, 而善事襄子, 襄子必近幸子;
子之得近而行所欲, 此甚易而功必成.”
豫讓乃笑而應之曰:
“是爲先知報後知, 爲故君賊新君, 大亂君臣之義者, 無此矣.
凡吾所謂爲此者, 以明君臣之義, 非從易也.
且夫委質而事人, 而求弑之, 是懷二心以事君也.
吾所爲難, 亦將以愧天下後世人臣懷二心者.”
居頃之, 襄子當出, 豫讓伏所當過橋下.
襄子至橋而馬驚,
襄子曰:
“此必豫讓也.”
使人問之, 果豫讓.
於是趙襄子面數豫讓曰:
“子不嘗事范‧中行氏乎?
知伯滅范‧中行氏, 而子不爲報讎, 反委質事知伯.
知伯已死, 子獨何爲報讎之深也?”
豫讓曰:
“臣事范‧中行氏, 范‧中行氏以衆人遇臣,
臣故衆人報之;
知伯以國士遇臣,
臣故國士報之.”
襄子乃喟然歎泣曰:
“嗟乎, 豫子!
豫子之爲知伯, 名旣成矣,
寡人舍子, 亦以足矣.
子自爲計,
寡人不舍子.”
使兵環之.
豫讓曰:
“臣聞明主不掩人之義, 忠臣不愛死以成名.
君前已寬舍臣, 天下莫不稱君之賢.
今日之事, 臣故伏誅,
然願請君之衣而擊之, 雖死不恨.
非所望也, 敢布腹心.”
於是襄子義之, 乃使使者持衣與豫讓.
豫讓拔劍三躍, 呼天擊之, 曰:
“而可以報知伯矣.”
遂伏劍而死.
死之日, 趙國之士聞之, 皆爲涕泣.


225. 나라 필양畢陽의 후손 예양豫讓
나라 필양畢陽의 후손 예양豫讓이 처음에는 범씨范氏중항씨中行氏를 섬겼으나 마음에 맞지 않아 떠나서 지백知伯을 섬겼는데, 지백이 그를 총애하였다.
삼진三晉()이 지씨智氏 땅을 삼분三分함에 이르러 양자襄子가 지백을 가장 미워하여 그의 머리를 술잔으로 만들었다.
예양이 산중으로 도망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아!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즐겁게 해 주는 자를 위해 화장을 한다고 한다.
내가 지씨의 원수를 갚아야겠다.”
이에 성명을 바꾸고 죄수가 되어 나라의 궁중으로 들어가 변소 바르는 일을 하며 양자襄子를 찔러 죽이고자 하였다.
양자襄子가 변소에 가다가 이상한 예감이 들어 붙잡아서 변소 바르는 자가 누구인가 물었더니 예양이었다.
예양이 흙손을 칼날로 삼으며 말하였다.
“지백을 위해 원수를 갚고자 하오.”
좌우가 그를 죽이려 하자 양자가 말하였다.
“그는 의사義士이니, 내가 조심해 피하면 그만이다.
더구나 지백은 이미 죽고 그 후손도 없어, 그 신하가 주인을 위하여 원수를 갚고자 하니 이는 천하의 현인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석방시켜 주었다.
예양은 다시 몸에 옻칠을 하여 창병瘡病이 나게 하고 수염을 뽑고 눈썹까지 없앴으며, 스스로 체형體刑을 가해 용모를 고치고 거지가 되어 다니며 구걸하니, 그 아내조차 몰라보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모습은 전혀 남편 같지 않은데 그 목소리는 어찌 그리 남편과 심히 닮았습니까?”
예양은 다시 불붙은 숯을 삼켜 벙어리가 되어 목소리까지 바꾸어 버렸다.
그 친구가 말했다.
“그대의 방법은 심히 어렵기만 할 뿐 공효功效는 전혀 없겠네.
그대가 그런 뜻을 두는 것은 당연하나, 그 지혜로 말한다면 아니네.
자네의 재주로 조 양자를 잘 섬긴다면 양자는 틀림없이 그대를 가까이하여 사랑할 걸세.
그대는 가까이 신임을 얻고 나서 하고 싶은 바를 행한다면, 이는 쉽기도 하려니와 틀림없이 성공할 걸세.”
예양은 웃으며 이렇게 응답하였다.
“이는 먼저의 지기知己를 위해 나중의 지기知己에게 보복하는 것이며, 옛 임금을 위해 새로 모시는 임금을 죽이는 것이어서 군신君臣사이의 의리義理를 어지럽히는 것으로 이보다 더 한 것이 없네.
내가 이렇게 하려는 것은 바로 군신君臣 사이의 의리義理를 밝히려 함이지 쉬운 방법을 따르고자 함이 아닐세.
또 몸을 맡겨 남을 모시면서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이미 두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일세.
내가 이렇게 어려운 일을 하려는 것 역시 장차 천하 후세 남의 신하로서 두 마음을 품은 자를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이네.”
얼마 후, 양자襄子가 외출하자 예양豫讓은 양자가 지나갈 다리 밑에 숨어 있었다.
양자가 그 다리에 이르자 말이 먼저 놀랐다.
양자가 말하였다.
“이는 틀림없이 예양이리라.”
사람을 시켜 추문해 보니 과연 예양이었다.
조 양자는 예양과 면대하여 죄를 따졌다.
“그대는 일찍이 범씨와 중항씨를 섬기지 않았던가?
지백이 그 범씨와 중항씨를 멸하였을 때, 그대는 그들을 위하여 복수하겠다고 나서지 않고 도리어 몸을 맡겨 지백을 섬겼다.
그런데 지백이 이미 죽었는데 그대는 유독 복수심이 〈나에게만〉 이렇게 깊은가?”
예양이 대답하였다.
“내가 범씨와 중항씨를 섬길 때, 범씨와 중항씨는 나를 보통 사람으로 대우해 주었소.
그래서 나도 보통 사람 대하듯 그들에게 보답했소.
그러나 지백은 나를 국사國士로 대우해 주었소.
그래서 나도 국사로써 그의 원수를 갚아 주려는 것이오.”
양자는 탄식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아, 예양!
그대의 지백을 위한 명분은 이미 성취하였소.
나도 그대를 한 번 놓아주었으니 역시 족할 것이오.
그러니 그대는 스스로 계책을 잘 헤아려 보시오.
과인은 이번에는 놓아 줄 수 없소.”
병사들로 하여금 그를 에워싸도록 하였다.
예양이 말하였다.
“제가 듣건대 훌륭한 군주는 남의 의로움을 덮어버리지 아니하고, 충신은 이름을 이루기 위해서 죽음도 아까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군께서 전에 나를 관대하게 놓아줌으로 인하여 천하에 군을 어질다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소.
오늘의 일은 나도 엎드려 죽겠소.
그러나 원컨대 군의 옷이라도 찔러 보았으면 비록 죽더라도 한이 없겠소.
그래서 꼭 바라는 바라기보다 그저 감히 마음 속을 펴 보인 것일 뿐이오.”
이에 양자는 그를 의롭게 여겨 사자를 시켜 옷을 예양에게 건네주도록 하였다.
예양은 칼을 뽑아 세 번을 뛰며 하늘을 부르며 칼질하면서 외쳤다.
“너는 이제 지백에게 보답한 것이다.”
그리고는 드디어 칼을 가슴에 대고 엎어져 죽었다.
그가 죽던 날 조나라 선비들이 이 소식을 듣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


역주
역주1 : 이 이야기에서 ‘呑炭漆身’과 ‘士爲知己者死’, ‘女爲悅己者容’이라는 成語가 나왔다. 이 이야기는 또한 《史記》 〈刺客列傳〉에 전재되어 있으며, 《說苑》에도 일부 실려 있다. 그 연대는 聶政이 韓나라 재상 俠累를 죽인 B.C.397년(417장 참조)보다 50년 전이며, 이로 보아 B.C.425년쯤, 즉 知伯이 패망한 후 30년쯤 뒤의 일이다.
역주2 畢陽 : 春秋時代 晉나라 義俠의 무리, 《國語》 〈晉語〉에 ‘畢陽實送州犁於荊’이라 하였다. 州犁는 春秋時代 晉나라 대부인 伯宗子인데 그가 참소당하자 畢陽이 그 아들을 업고 荊(楚)으로 도망갔다. 이 畢陽은 바로 晉 獻公의 공신인 畢萬의 자손이다.
역주3 襄子最怨知伯 : 《史記》 索隱에 ‘謂初以酒灌, 後又率韓魏水灌晉陽城, 不沒者三版, 故怨深也’라 하였다. 여기서 ‘酒灌’이란 襄子가 일찍이 아버지 簡子를 대신해서 군사를 거느릴 때 知伯과 같은 소속이었다. 知伯이 襄子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려 하였으나 먹지 않자 뺨을 때리고 돌아와서 簡子에게 襄子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세우라고 한 적이 있었다.
역주4 扞(杇) : 원문 ‘扞’을 金正煒는 杇의 오기로 보았다. 杇는 벽을 바르는 흙손[鏝]을 말한다.

전국책(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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