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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記集說大全(1)

예기집설대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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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씨陳氏예기집설禮記集說》의 범례凡例
경문經文교수校讎에 사용한 판본版本
촉대자본蜀大字本
송구감본宋舊監本
흥국우씨본興國于氏本
감본監本촉본蜀本이 간행된 이후로 건안여씨본建安余氏本과 이 흥국우씨본興國于氏本이 가장 뛰어난 선본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감본監本이나 촉본蜀本에는 모두 구두句讀가 없는데 비하여 이 흥국우씨본興國于氏本에는 주석에까지 구두가 표기되어 있었다고 한다. 구두句讀의 표기는 건본建本에서 시작되었는데, 관각館閣교서식校書式을 모방하여 글자의 편방偏旁권점圈點을 가한 것이었다. 그러나 단지 경문經文에만 구두를 표기하였으나 촉중자본蜀中字本흥국우씨본興國于氏本에 와서 주석에까지 모두 구두를 표기하였다고 하였다. 우씨본은 이후 건본과 함께 요씨본廖氏本저본底本이 되었다.
우군중간盱郡重刊 요씨본廖氏本
요씨본은 매우 뛰어나서 당시에 이미 천하의 보배로 칭송되었으며, 쇄출刷出이 폭주하여 판각板刻된 지 얼마 후에는 마모가 심하여 더 이상 쇄출할 수 없게 되었으며, 이 을 얻기 위하여 여러 장서가를 찾아다녔다고 요씨본을 중간한 악가岳珂(1183-1240後)는 《구경삼전연혁례九經三傳沿革例》에서 적고 있다. 악비岳飛(1103-1142)의 손자이기도 한 악가岳珂요강廖剛의 《구경총례九經總例》를 본받아 《구경삼전연혁례九經三傳沿革例》를 찬술하였다.
건본주소建本註疏
복건福建에서 간행한 《십삼경주소十三經註疏》. 《구경삼전연혁례九經三傳沿革例》에서는 ‘건본유음석주소建本有音釋註疏’라고 적고 있다. 일반적으로 건본建本송본宋本 중에서 가장 저급한 본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유포流布가 가장 넓었다. 이 건본建本은 주소가 모두 들어있으며, 주문注文의 아래에 부기附記하였고, 또한 가장 먼저 구두를 표기하였는데, 관각館閣교서校書하는 방식을 모방하여 글자의 곁에 방점傍點을 붙였다.
남강경전통해南康經傳通解
한정씨주漢鄭氏註
나라 정현鄭玄(127-200)의 《예기禮記를 말한다. 공영달孔穎達(574-648)은 이 정현의 주석을 바탕으로 《예기정의禮記正義》를 편찬하였으며 따라서 정현의 《예기禮記는 이 책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당공씨소唐孔氏疏
나라 공영달孔穎達이 편찬한 《예기정의禮記正義》를 말한다.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에 포함되어 있다. 《예기정의禮記正義》는 모두 63권인데 정관貞觀 연간에 칙령에 따라 편찬된 것으로 연우延祐 연간에 과거법이 시행되면서 《예기禮記》는 정현鄭玄를 기준으로 삼았다. 에서 《영락대전永樂大全》이 편찬되자 진호陳澔의 《예기집설禮記集說》이 기준이 되었다.
의례고주소儀禮古註疏
나라 정현鄭玄하고 나라 가공언賈公彦한 《의례주소儀禮注疏》를 말한다.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에 포함되어 있다. 《의례주소儀禮注疏》는 17권이다. 정현鄭玄 가공언賈公彦했다. 삼례三禮는 모두 정현鄭玄종지宗旨로 여겼는데 그중에서도 《의례儀禮》의 정현鄭玄 는 독보적인 경지에 이른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글이 예스럽고 심오하여 이해하기에 매우 어려웠는데, 가공언賈公彦가 나온 뒤에야 그 의미가 통하게 되었다. 이후 수백 년 동안 여러 사람들이 를 연구하여 많은 저술을 내놓았지만 모두 이 《의례주소儀禮注疏》의 아류의 불과할 뿐이라고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 평했다.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정편正編 37권 속편續編 29권. 주자朱子가 편찬하고 제자인 황간黃榦(1152-1221)이 속편續編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의례집전집주儀禮集傳集注》라고 명칭하였다. 주자朱子의 〈걸수삼례차자乞修三禮箚子〉에 의하면 “《의례儀禮》를 으로 삼고 《예기禮記》 및 여러 경사經史잡서雜書에 실려 있는 에 관련된 기록을 발췌하여 모두 경문經文의 아래에 붙이고 아울러 주소注疏제유諸儒의 설을 갖추어 대략 두서頭緖가 잡히도록 하였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 책에 대한 설명이다. 물론 이 책은 주자 만년에 가서야 편찬되어 비로소 현재의 이름으로 고쳐졌으며, 주자朱子가 죽은 뒤 가정嘉定(宋 영종寧宗의 연호) 정축년丁丑年(1217)에 처음으로 남강南康에서 간판刊板되었다. 내용은 〈가례家禮〉 5권, 〈향례鄕禮〉 3권, 〈학례學禮〉 11권, 〈방국례邦國禮〉 4권으로 모두 23권 42편인데, 중간에 빠진 부분이 1편이고 〈대사大射〉부터 〈제후상조諸侯相朝〉까지 8편은 당시에 미처 탈고되지 않았다. 그리고 권24부터 권37까지 18편은 처음의 초고본을 그대로 잉습하여 ‘집전집주集傳集注’라는 초명初名을 사용하였다. 이부분이 바로 〈왕조례王朝禮〉인데 중간에 〈복서卜筮〉 1편이 빠져 있다. 목록을 보면 〈천조踐阼〉 제31권 이후로 서설序說이 모두 빠져 있는데 이로 보면 이 책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위 편목에서도 보이듯 《의례儀禮》의 편차와 새로운 구성을 가지고 재편하였는데, 비록 고경古經을 가르고 쪼갰다는 비난을 면하기는 어렵지만, 왕안석이 《의례儀禮》를 폐하면서 《예기禮記》만 남아 있게 된 상황에서 《의례儀禮》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크다. 그래서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도 (《儀禮》)을 버리고 (《禮記》)을 따라서 근본을 저버린 당시의 잘못을 주자朱子가 바로잡았으며, 이 책의 편찬을 통해 선성先聖유제遺制를 보전했으며, 유별類別로 나누고 강목綱目으로 구분하여 매우 잘 정리되었으니 를 공부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책이라고 높은 평가를 하였다.
상례喪禮제례祭禮 두 부분은 주자朱子의 문인인 황간黃榦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본래 주자朱子가 그에게 초고를 위촉했던 것이다. 양복楊復의 《상제례통해喪祭禮通解원서原序황간黃榦의 말을 인용하여 “처음에 내가 상례喪禮제례祭禮의 초고를 가지고 선사先師에게 질정하였는데 기뻐하며 나에게 그대가 편정한 상제례喪祭禮는 규모가 매우 좋으니 다음에 내가 편찬한 가례家禮, 향례鄉禮, 방국례邦國禮, 왕조례王朝禮를 모두 이에 따라 다시 편정해야 하겠다.”고 하였으니, 이로 보면 황간黃榦의 편찬 원칙은 주자朱子의 편찬 의도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황간黃榦은 단지 상례喪禮 15권을 가정嘉定 기묘년己卯年(1219)에 완성하였지만 제례祭禮는 여전히 완성하지 못한 채 죽었는데 이듬해 장복張虙남강南康에서 간행(1222년)했으니 이 역시 미완본이다.
이후 양복楊復중수重修제례祭禮정봉신鄭逢辰이 조정에 올렸는데 양복楊復은 서문에서 “남강南康학궁學宮에 이전부터 가례家禮, 향례鄉禮, 방국례邦國禮, 왕조례王朝禮장복張虙속간續刊상례喪禮판목版木이 있었는데 이제 제례祭禮의 원고를 가져다가 모두 간판刊板하여 함께 두게 되었다. 내가 분수에 넘치게 제례의 원고본을 가져다가 평소의 들은 것을 참고하여 새로이 편정하여 속편에 붙였다. 모두 14권인데 즉 속편의 권16부터 권29까지가 내가 중수한 부분이다.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및 《집전집주集傳集注》와 함께 모두 66권이다. 비록 한사람에 의하여 편찬된 것은 아니지만 통일성이 유지되고 체제가 같으니 이 책이 완성됨으로써 고례古禮경개梗槪절목節目이 또한 대략 구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양씨제례통해楊氏祭禮通解
양복楊復이 편정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의 〈제례祭禮〉편을 말한다. 위의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의 해설을 참고하기 바란다.
육씨경전석문陸氏經典釋文
육덕명陸德明이 편찬한 《경전석문經典釋文》을 말한다. 경전經典자음字音자의字義 및 문자의 이동異同을 수집한 것으로, 모두 30권으로 되어 있다. 14종의 경전經典, 즉 《주역周易》‧《고문상서古文尙書》‧《모시毛詩》‧《주례周禮》‧《의례儀禮》‧《예기禮記》‧《춘추좌전春秋左傳》‧《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효경孝經》‧《논어論語》‧《노자老子》‧《장자莊子》‧《이아爾雅》의 편찬 순서에 따라 여러 책의 문자의 대조와 제자백가諸子百家음의音義집록集錄하였다. 14종의 경전 중에는 《노자老子》와 《장자莊子》가 포함되어 있는 반면에 《맹자孟子》가 누락되어 자못 균형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육덕명陸德明진대陳代에 생장한 인물로서 노장老莊을 숭상하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분위기에 영향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고증이 해박하고 정밀하여 경학 연구의 필수서로서 자리매김 되었다.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구경주소九經註疏
구경九經은 《》‧《》‧《》‧《주례周禮》‧《의례儀禮》‧《예기禮記》‧《춘추좌전春秋左傳》‧《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을 말한다. 《오대회요五代會要》에 의하면 후당後唐 장흥長興 3년(993)에 처음으로 석경石經의 문자에 의거하여 구경九經인판印版을 새겼다고 하였으며, 경서經書의 목판이 있게 된 것은 실로 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였다. 황간黃榦의 행장과 주자朱子의 연보에 의하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이 사액되면서 구경주소九經註疏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허씨설문許氏說文
동한東漢 허신許愼(30-124)의 《설문해자說文解字》를 말한다. 자형字形에 따라 분류된 가장 오래된 자전字典이다. 화제和帝 영원永元 12년(100)에 완성되었다. 목록 1편을 포함하여 모두 15편이다. 나라(B.C. 3세기) 이전의 문자를 널리 수집하여 소전小篆 9,353와 그에 따른 중문重文(異體字) 1,163를 수록하였고 (해석)가 133,440자이다. 육서六書의 원리로 분석하고, 540로 분류하여 설명하였는데 이론적으로 매우 정교하다. 육서六書지사指事, 상형象形, 형성形聲, 회의會意, 전주轉注, 가차假借를 말하는데 한자의 조자법造字法을 분석하여 그 원리를 귀납적으로 정리한 여섯 가지 조례條例를 말한다. 이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이 이론을 가지고 매 글자마다 소리, 뜻, 형태를 해설하였다. 소리의 표기는 당시에 반절법反切法이 개발되기 전이었으므로 ‘음이 무슨 자와 같다.’, ‘무슨 자와 같이 읽어야 한다.’의 형식으로 표기하였다. 이후 이 책은 많은 간행을 거치면서 자전字典이라는 책의 성격상 수많은 오류가 발생하게 되었다. 옹희雍熙3년(986)에 태종太宗문자학자文字學者서현徐鉉에게 새로 교정하도록 명하였는데 이에 따라 완성된 것이 이른바 ‘대서본大徐本’이다. 그리고 그의 동생 서개徐鍇남당南唐(937-975)때 교주校註하여 《설문계전說文繫傳》을 완성하였는데 이것이 ‘소서본小徐本’이다. ‘대서본大徐本’은 모두 30권으로서 천보天寳(742-756) 연간에 완성된 손면孫愐의 《당운唐韻》을 근거로 글자 아래에 반절로 음을 표기하였다. 서현徐鉉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허신許愼이 미흡하게 설명한 부분에 대하여 보충하였을 뿐 아니라, 당시에 여러 가지 전적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글자로서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수록되지 않은 것들을 모아서 각 의 아래에 추가하고 《설문해자說文解字》의 방식에 따라 설명하였다. 이를 ‘신부자新附字’라고 부른다. 이 ‘대서본大徐本’은 지금까지 광범위하게 유포된 통행본이다. 주석서로는 나라 단옥재段玉裁의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가 가장 뛰어나다.
두씨통전杜氏通典
두우杜佑(735-812)의 《통전通典》을 말한다. 두우杜佑군경君卿이고 경조京兆 만년인萬年人이다. 덕종德宗순종順宗헌종憲宗 등 3에 걸쳐 재상宰相을 지냈고, 검교사도동중서문하평장사가태보檢校司徒同中書門下平章事加太保치사致仕하였다. 안간安簡이다.
이 책이 나오기 앞서 유질劉秩은 《주관周官》을 모방하여 《정전政典》 35권을 편찬하였는데,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한 두우杜佑가 이 《정전政典》을 바탕으로 빠진 부분을 보충하고 항목을 추가하여 편찬한 것이 《통전通典》이다. 식화食貨, 선거選擧, 직관職官, , , 병형兵刑, 주군州郡, 변방邊防의 8인데 매 마다 아래에 자목子目을 두어 세분하였다. 두우杜佑는 서문에서 “먹을 것이 풍족해야 교화敎化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맨 앞에 식화食貨를 두었다. 교화敎化의 시행은 관직의 설치를 필요로 하며, 관리를 뽑는 것은 인재를 살피는 일이다. 인재를 살피자면 선거選擧를 빈틈없이 해야 한다. 따라서 선거選擧직관職官을 그 다음에 편차하였다. 인재를 얻어 세상을 다스리자면 흥기興起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 , 을 두었다. 교화가 무너지면 형벌을 사용해야 하니 을 그 다음에 편차하였다. 주군州郡을 설치하여 나라를 나누어 통치하므로 주군州郡을 두었고, 변방邊防을 두어서 끝을 맺었다.”라고 하여 편차의 원칙을 밝히고 있다.
황제黃帝, 우순虞舜으로부터 당나라 천보天寶(742-756), 숙종대肅宗代(757-762) 이후까지의 해당 사실事實을 수록하였는데 간간히 연혁沿革주석注釋으로 붙여서 설명하였다. 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점도 있는데, 식화문食貨門부세조賦稅條에서 《주관周官공부貢賦를 수록하면서도 태재太宰가 맡은 구공지법九貢之法은 빠뜨렸으며, 선거문選擧門에서는 나라 명제明帝제정制定사인士人품제品第를 위한 구품지과九品之科소인小人에 적용하는 오등법五等法이 누락되었다. 직관문職官門에 있어서는 《수서隋書》에 의하면 대업大業 연간에 내사감內史監내서감內書監으로 고쳤다고 하였으나, 《통전通典》에서는 다만 내사시랑內史侍郞을 고쳐서 내서시랑內書侍郞으로 하였다고만 기재하였다. 이런 것들은 사실을 누락시킨 경우이다. 또 병문兵門에서 전투기법 중 같은 양동佯動을 ‘인퇴취지引退取之’와 ‘인퇴양패취지引退佯敗取之’의 두 가지로 나눈 것이나, 기습奇襲에 대해서도 ‘출기불의出其不意’‧‘격기불비擊其不備’‧‘공기부정攻其不整’의 셋으로 나눈 것은 쓸데없이 세분한 것이다. 또 변방문邊防門에는 만리 밖의 조공朝貢도 하지 않는 간신히 이름만 전하는 나라까지 수록하였으니 이는 이름과 실상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오경五經, 각종 사서史書, 육조인六朝人문집文集주소奏疏까지 두루 섭렵하여 역대의 연혁을 모두 수록하였다. 알맞은 분류를 통하여 자세하면서도 번잡하지 않고 간결하면서도 요점을 놓치지 않았으며 원류原流를 잘 밝혔으니 정말 실용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나라 이전 전고典故보고寶庫라고 할 것이다. 이후에 나온 나라 정초鄭樵의 《통지通志》와 마단림馬端臨의 《문헌통고文獻通考》는 모두 이 책을 본떠 편찬된 것이지만 지나치게 번잡한 《통지通志》나 너무 소략한 《문헌통고文獻通考》는 모두 《통전通典》 의 자세하고 정확한 것을 따르지 못한다.
정씨통지략鄭氏通志略
통지通志》 중에 〈〉을 말한다. 정초鄭樵(1104-1162)가 편찬한 것이다. 모두 200권으로서 1161년 간행되었다. 〈제기帝紀〉 18권, 〈황후열전皇后列傳〉 2권, 〈연보年譜〉 4권, 〈〉 51권, 〈열전列傳〉 125권으로 이루어졌다. 《통감通鑑》‧《통감기사본말通鑑記事本末》과 더불어 나라 사학史學의 대표작이다.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 의하면 〈제기帝紀〉와 〈열전列傳〉은 여러 사서史書를 초략한 것으로서 편찬 원칙 등이 분명하지 못하고, 〈연보年譜〉는 《사기史記》의 를 본뜬 것이지만 어느 부분은 지나치게 번잡하고 어느 부분은 지나치게 소략하여 전반적인 균형을 잃었다고 평하였다. 오직 20〈〉만이 편찬자의 평생 노력이 집중된 것으로서 《통지通志》의 정수精髓라고 극찬하였다. 본 《예기집설禮記集說》에서도 이 20〈〉에 제한하여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20〈〉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氏族 2. 六書 3. 七音 4. 天文 5. 地理 6. 都邑 7. 禮 8. 諡 9. 器服 10. 樂 11. 職官 12. 選擧 13. 刑法 14. 食貨 15. 藝文 16. 校讎 17. 圖譜 18. 金石 19. 災祥 20. 草木昆蟲
정씨유서程氏遺書
이정유서二程遺書》를 말한다. 25권에 부록 1권이 있다. 정자程子문인門人들이 기록한 것을 가지고 주자朱子가 편집한 것이다. 부록 1권은 행장行狀 등을 수록한 것이다. 주자朱子 연보에 의하면 건도乾道 4년 무자戊子(1168)에 편집이 완성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후에도 여러 차례 추보된 것으로 보인다. 《문헌통고文獻通考》나 황진黃震의 《황씨일초黃氏日抄》등에 기록된 권수卷數나 차례와 다른 것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는 아마도 전사傳寫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일 것이라고 하였다.
정자수언程子粹言
이정수언二程粹言》을 말한다. 2권이다. 두 정자程子의 문하에 출입한 양시楊時가 편찬한 것이다. 두 정자程子에 대한 기록은 유서遺書, 외서外書, 아언雅言, 사설師説, 잡설雜説 등으로 이미 많은 책이 편찬되었으나 권질이 많고 내용이 박잡駁雜하여 핵심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기록한 제자들이 자기 뜻에 따라 더하고 빼서 내용상의 저오牴牾까지 발생하였다. 주자朱子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전반적인 정리를 계획하기도 하였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양시楊時의 이 책은 그가 두 정자程子에게서 직접 배운 까닭에 다른 어떤 편찬서보다도 정자程子의 학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장자어록張子語錄
장재張載(1020-1077)의 어록語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분명하지 않다. 《문연각서목文淵閣書目》 〈성리性理〉조에 ‘《장자어록張子語錄일부일책一部一冊’이라고 나와 있으나 이것이 그 책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주자사서朱子四書
주자朱子가 편찬한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註》를 말한다.
주자소학서朱子小學書
주자朱子가 편찬한 《소학집주小學集註》를 말한다.
주자대전집朱子大全集
영락대전본 《예기집설대전禮記集說大全》에서 인용된 《주자대전집朱子大全集》은 어떤 책인지 분명하지 않다.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는 ‘주자대전집朱子大全集’이라는 명칭은 별도의 책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회암집晦庵集》에 대한 별칭이라고 하였다.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된 것으로서 주자朱子의 문집은 《회암집晦庵集》한 종이 있으며,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존목存目에 《주자대동집朱子大同集》 13권, 《회암문초속집晦庵文鈔續集》 4권, 《주자문집대전유편朱子文集大全類編》 111권이 있을 뿐이다. 이 중 《주자문집대전유편朱子文集大全類編》은 나라 때 주자의 후손인 주옥朱玉에 의해 편찬된 것이다.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는 주자朱子 문집의 유래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주자대전집朱子大全集’이라는 명칭과 문집의 권수에 대하여 주목할 만한 언급을 하고 있다. 현재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된 것은 112권 본으로 정집 100권 속집 5권 별집 7권이다.
주자朱子의 문집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인 진진손陳振孫의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에 의하면 《회암집晦庵集》이 100권, 자양연보紫陽年譜가 3권이라고 하였는데 편찬자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또 속집에 대하여도 언급이 없다. 나라 성화成化 계묘癸卯(1483) 보전莆田 황중소黃仲昭에서 “《회암주선생문집晦庵朱先生文集》은 100권인데 예부터 민본閩本절본浙本의 판본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절본浙本홍무洪武 초에 남옹南雍에 가져다 두었는데 어떤 사람이 편집한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지금 민번閩藩에 있는 것은 선생의 막내 아들인 주재朱在가 편집한 것이다. 또 속집 약간 권과 별집 약간권이 있는데 모두 아울러 간판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로 보면 문집 100권이 바로 주재朱在가 편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주자朱子의 16대 후손인 주옥朱玉은 《주자문집대전유편朱子文集大全類編》을 편찬하고 “주재朱在가 편찬한 것은 88권이었고 속집, 별집을 합해야만 100권이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100권 본은 주재朱在가 편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저오牴牾가 있는 이유에 대하여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지만, 정집은 주로 100권 본이 통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체 권질에 대하여 “반황潘潢(1532년)을 보면 문집 100권 속집 5권 별집 7권이라고 하여 현재의 본과 부합되는데 반하여 반황潘潢과 함께 문집을 간행한 소신蘇信전서前序(1532년)를 보면 120권이라고 하여 서로 모순되고 있다. 또 채방병蔡方炳은 본집을 수교手校한 사람으로서 원집 100권, 속집 10권, 별집 11권이라고 에 썼는데 이 숫자는 더욱더 맞지 않으니 그 연유를 알 수 없다. 아마도 이렇게 된 이유는 소신蘇信전서前序에는 본래 ‘백유십이권百有十二卷’이라고 되어 있었으나 중각重刻하는 과정에서 ‘백유이십권百有二十卷’으로 잘못 되었고, 채방병蔡方炳(1688년)의 발문도 역시 선사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보인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부총간四部叢刊에 수록된 《회암선생주문공문집晦庵先生朱文公文集》은 정집 100권, 속집 11권 별집 10권 도합 121권 본으로서 위 채방병蔡方炳의 발문과도 일치하는 것은 물론 아래 황용黃鏞의 별집 서문에 나타나는 10권 본과도 일치한다. 따라서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의 설명은 반황潘潢의 간행본(1532년, 112권 본)과 채방병蔡方炳의 간행본(1688년, 121권 본)을 동일본으로 오해한 결과로 보인다.
여사로余師魯가 편찬한 별집은 함순원년咸淳元年(1265) 건안서원建安書院 황용黃鏞이 서문을 붙였는데, “선생의 문집 중에서 정집과 속집은 잠재潛齋 실재實齋 두 공이 이미 서원에서 간행하였는데, 이후 건통수建通守 여사로余師魯선생先生유문遺文을 수집하여 다시 10권을 찾아내어 별집을 편집하였다. 이 별집의 체제는 한결같이 원집에 따르고 수집한 각 글의 아래에는 출처를 밝히고 있다.”라고 하였다. 다만 속집은 누가 편찬했는지 알 수 없는데 주옥朱玉도 또한 상고할 수 없다고 하였다. 위 황용黃鏞의 서문이 1265년에 지어진 것이니 별집의 편찬은 그 내용으로 보아 아마도 이전인 이종理宗 연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는 ‘주자대전집朱子大全集’이라는 명칭에 대하여 “채방병蔡方炳후제後題(1688년)에서는 ‘주자대전집朱子大全集이라는 명칭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1483년의 황중소黃仲昭은 물론이고, 1532년의 반황潘潢에서도 여전히 《회암선생집晦庵先生集》이라고 칭하고 있다. 다만 채방병蔡方炳이 ‘예로부터 《주자대전문집朱子大全文集》이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판목이 많이 마모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주자대전집朱子大全集》이라는 명칭은 나라 중엽이후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였다.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의 주장은 주자대전집朱子大全集이라는 별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회암집晦庵集》에 대한 이칭異稱이며, 그것도 나라 중엽이후에 사용된 것이라는 뜻인데 매우 근리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본 《예기집설대전禮記集說大全》이 1403년에 간행되었고, 그 인용서목에 ‘주자대전집朱子大全集’의 명칭이 분명한 것을 보면 명대明代 이전부터 주자朱子를 존숭하는 의미에서 ‘주자대전집朱子大全集’이라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주자어류朱子語類
주자어류朱子語類》 140권은 함순咸淳 경오년庚午年(1270)에 도강導江 여정덕黎靖德편집編輯하였다. 주자朱子가 강학한 어록을 분류分類 휘편彙編한 것이다. 처음에 문인門人들이 스승과 문답問答한 것을 각자 기록記錄하여 두었는데, 가정嘉定 을해년乙亥年(1215)에 이도전李道傳요덕명등廖德明等 33명이 기록한 것을 가지고 43으로 편집하고, 여기에 장흡張洽이 기록한 1권을 속집으로 붙여서 지주池州에서 판각했다. 이것이 ‘지록池錄’이다. 그리고 가희嘉熙 무술년戊戌年(1238)에 전지傳之의 동생인 성전性傳황간黃榦등 42명이 기록한 것을 수집하여 46권으로 만들고 요주饒州에서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요록饒錄’이다. ‘요록饒錄’에서 새로 수집된 것은 34명이고, 중복된 것은 2명이며, 6명의 것은 내용이 추보追補된 것이다. 순우淳祐 기유년己酉年(1249) 채항蔡杭이 다시 양방楊方 등 23명이 기록한 것을 모아서 26으로 만들고 마찬가지로 요주饒州에서 간행하였는데 이것을 ‘요후록饒後錄’이라고 부른다. 이 ‘요후록饒後錄’을 위 ‘지록池錄’과 비교하여 보면 3명의 어록은 중복되었다. 함순咸淳 을축년乙丑年(1265) 오견吳堅은 ‘지록池錄’, ‘요록饒錄’, ‘요후록饒後錄’에서 수록된 29명의 어록에서 누락된 것을 수집한 것과 새로 수집된 4명의 어록을 합하여 20권으로 만들고 건안建安에서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건록建錄’이다. 분류 편집된 것으로는 가정嘉定 기묘년己卯年(1219) 황사의黃士毅가 편찬하고 사공설史公說미주眉州에서 간행한 ‘촉본蜀本’ 140권이 있으며, 또 순우淳祐 임자년壬子年(1252)에 왕필王佖속편續編 40권을 편집하여 휘주徽州에서 간행하였는데 이를 ‘휘본徽本’이라고 한다.
이렇게 1215년부터 1252년까지 걸쳐 편찬된 여러 들은 서로 중복되거나 누락된 것이 있었으며, 또 여러 번 번각飜刻되는 과정에서 오류도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1270 여정덕黎靖德이 제본을 모아서 중복된 것을 추려내고 1150여조餘條로 정리하여 26부문部門으로 분류하였다. 여정덕黎靖德 편집본은 단지 중복된 것을 정리하였을 뿐 아니라 의심스러운 부분은 산삭하는 등 채록의 엄정과 분류의 적정으로 인하여 주자에게 큰 공을 이룩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분류는 〈이기理氣〉, 〈귀신鬼神〉, 〈성리性理〉 등 내용에 따른 것, 〈사서四書〉, 〈〉, 〈〉 등 서책에 따른 것, 그리고 역사 및 인물에 관한 것 등 복합적인 원칙을 적용하였다.
춘추찬례春秋纂例
육순陸淳한 《춘추집전찬례春秋集傳纂例》를 말한다. 10이다. 이 책은 육순陸淳이 그의 사우師友담조啖助조광趙匡을 설명한 것이다. 담조啖助숙좌叔佐로 본래 조주인趙州人이었는데 관중關中으로 옮겼으며, 윤주潤州 단양현丹陽縣 주부主簿를 지냈다. 조광趙匡백순伯循이며, 하동인河東人이다. 양주자사洋州刺史를 지냈다. 육순陸淳백충伯沖이고 오군인吳郡人이며, 급사중給事中에 이르렀다. 나중에 헌종憲宗 때문에 개명改名하였다. 이들의 사적事績은 모두 《당서唐書》 〈유학전儒學傳〉에 실려 있다.
담조啖助의 《춘추春秋》 해설은 주로 삼전三傳득실得失, 부회附會, 누락漏落 등을 찾아내는데 노력한 까닭에 전통적인 해석과는 많이 달랐다. 예를 들어 《춘추좌전春秋左傳》은 구명丘明의 저작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한서漢書》의 “구명丘明노인魯人 증신曾申에게 전해 주었고, 오기吳起에게 전했으며, 로부터 여섯 번 전해져 가의賈誼에 이르렀다.”는 설은 모두 부회附會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심지어는 공양公羊의 이름 곡량穀梁의 이름 도 반드시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또 《춘추春秋》의 문장은 매우 간결하므로 선유先儒들이 각각 한 가지 을 주장하여 서로 소통하기를 꺼려하고 오직 상대를 공격하니 그 폐단이 매우 심하다고 하면서, 《춘추좌전春秋左傳》은 각국의 여러 가지 점, 꿈, 종횡가, 소설 등을 비판 없이 인용하여 사실의 서술에만 치우치고 본지本旨는 도리어 경시하니 에 충실한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이나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만 못하다고 평하였다. 이런 주장에 대하여 구양수歐陽修조공무晁公武 등은 수긍하지 않았지만, 정자程子는 “제가諸家 중에 뛰어나서 이단을 물리치고 정도正道를 제시한 공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따라서 본서는 보다는 의 중요성을 부각시켜서 송나라 학자들의 선구가 되었으며, 추측과 억단으로 자신의 설을 강변한 잘못은 지적되어야 하지만, 견강부회牽强附會변증辨證한 점은 평가되어야 할 것이라고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 말하였다.
본래 담조啖助가 지은 책의 이름은 《춘추통례春秋統例》였는데 모두 6권이었다. 그가 죽은 후에 육순陸淳이 그의 아들인 담이啖異와 함께 유문을 수집하여 조광趙匡의 교열을 거친 후 비로소 《춘추찬례春秋纂例》라고 이름 붙였다. 대력大歷 을묘년乙卯年(775)에 완성되었는데 모두 40편 10권이다. 제1편부터 제8편까지는 총의 춘추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를 논한 것이고, 제9편은 나라 십이공十二公의世緒이며, 제36편 이하는 경전문자經傳文字탈류脫謬인명人名, 국명國名, 지명地名에 관한 것이니 춘추필삭春秋筆削사례事例를 설명한 것은 제10편부터 제35편까지 26편뿐이다.
삼산진씨예서三山陳氏禮書
진상도陳祥道(1053-1093)의 《예서禮書》 150을 말한다.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되어 있다. 용지用之이고, 복주인福州人이다. 좌선의랑左宣義郞 태상박사太常博士를 지냈다. 삼례三禮에 나오는 여러 가지 조목에 대하여 자신의 설을 논증하고 관련 도판을 수록한 방대한 저술이다. 진상도陳祥道는 이 책에서 다분히 정현鄭玄의 설을 배격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묘제廟制〉에서 《주관周官》‧《가어家語》‧《순자荀子》‧《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을 인용하여 천자天子는 모두 칠묘七廟를 둔다고 주장, 정현鄭玄천자오묘설天子五廟說을 공박했다. 이런 이유는 진상도陳祥道육전陸佃 등은 모두 왕안석王安石문객門客으로서, 왕안석王安石경학經學이 대부분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여 이전의 전통적 해석에서 벗어나는데 힘썼으므로 이들 역시 모두 전통적 권위를 가진 정현鄭玄구설舊說을 배척한 것이다. 비록 그러한 경향은 한때의 유행이어서 심각하게 비판할 것도 없지만, 진상도陳祥道예서禮書는 경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치밀한 분석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과 그에 대한 각종 도판圖版을 함께 실어 충실한 고증을 시도하였다. 따라서 진진손陳振孫은 치밀하고 해박한 논증에 도판까지 수록하여 나라 제유諸儒논설論說의 잘못을 바로잡고, 섭숭의聶崇義가 지은 《삼례도집주三禮圖集注》의 빠진 부분을 보충하였다고 극찬하였다. 아울러 왕안석王安石과는 정치적 입지가 다른 조공무晁公武이치李廌까지도 이 《예서禮書》에 대하여 칭찬한 것을 보면 이 책이 당시에 이미 상당한 평가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잠실진씨목종집潛室陳氏木鐘集
목종집木鐘集》은 나라 진식陳埴의 어록 11권을 말하다.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되어 있다. 진식陳埴기지器之이고 영가인永嘉人이다. 진사進士로서 통직랑通直郞으로 치사致仕하였다. 그의 학문은 주자朱子에게서 나왔으며, 영악대전본永樂大典本 오경대전五經大全에 나오는 ‘잠실진씨蠶室陳氏’가 바로 이 사람이다. 얼핏 보면 이름이 문집文集처럼 보이나 모두 어록語錄이다. 《사고전서四庫全書자부子部 유가류儒家類에 분류되어 있다. 내용은 논어論語 일권一卷, 맹자孟子 일권一卷, 육경총론六經總論, 주역周易 일권一卷, 상서尙書 일권一卷, 모시毛詩 일권一卷, 주례周禮 일권一卷, 예기禮記 일권一卷, 춘추春秋 일권一卷, 근사잡문近思雜問 일권一卷, 일권一卷이다. 대학大學 중용中庸에 관한 어록은 예기禮記에 포함되어 있다. ‘목종木鐘’이라는 이름은, 그의 자서自序에서 《예기禮記》 〈학기學記〉의 “선문자여공견목善問者如攻堅木 선대문자여당종善待問者如撞鐘”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였다. 즉 잘 묻는 사람은 질문하는 것이 나무를 깎는 목공이 무른 곳부터 깎아서 여문 마디를 다스리듯 쉬운 것부터 물어서 어려운 것을 해결하고, 잘 대답하는 사람은 질문에 따라 적절하게 하여 마치 종처럼 크게 치면 크게 울리고 작게 치면 작게 울리듯이 대답한다는 뜻이다.
손씨시아편孫氏示兒編
시아편示兒編》은 나라 손혁孫奕한 것으로 23권이다. 손혁孫奕계소季昭이고 이재履齋이며, 여릉인廬陵人이다. 손혁孫奕은 “경전經典을 연구하여 평설評說을 쓰고, 여러 전적典籍에서 훈고訓詁를 모아서 총설總說경설經說문설文說시설詩說정오正誤잡기雜記자설字說의 7개 부분으로 정리하였다.”라고 자서自序에서 밝히고 있다. 아울러 “이 책은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에게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고 단지 자손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만든 것이므로 《시아편示兒編》이라고 이름 하였다.”고 명칭에 대한 연유를 설명하고 있다.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는 이 책이 비록 “여러 가지 설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여 종종 산만하며, 엄격하지 못한 근거로 혹 오류가 있기도 하지만 자음字音, 자훈字訓, 글자의 이동異同에 대한 고증 등은 참고할 만한 것이 많다.”고 평가하였다.
방씨집해方氏集解
방각方慤의 《예기해禮記解》 20을 말한다. 이 책은 현전하지 않는다. 위식衛湜의 《예기집설禮記集說명씨조名氏條에는 엄릉嚴陵 방씨方氏 으로 표기되어 있다.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録解題》에 의하면 방각方慤신안인新安人으로 성부性夫인데, 왕안석王安石왕우王雩 부자父子삼경신의三經新義(王安石의 《주례의周禮義》, 왕우王雩의 《시의詩義》 및 《서의書義》)만이 해의解義가 없어서 그 《삼경의三經義》 및 《자설字說》을 가져다가 부연하고 설명하여 예기해禮記解를 편찬하였다고 자서自序에서 편찬 의도를 밝혔다고 하였다. 방각方慤은 이 공로로 상사생上舍生이 되었지만, 그의 해설은 명료하여 주자朱子방각方慤마희맹馬希孟에 대한 해설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서 참고할 만하다고 하였으며, 왕안석王安石신학新學을 추종했다고 해서 이 책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진진손陳振孫은 평가하였다. 위식衛湜의 《예기집설禮記集說》에 상당부분 인용되어 있어서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응씨집해應氏集解
응용應鏞의 《예기찬의禮記纂義》 20을 말한다. 응용應鏞자화子和이다. 응씨집해應氏集解라고 이름한 것은 여러 가지 해설을 모았다는 뜻의 집해集解와 저자인 응용應鏞을 함께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는 진호陳澔의 이 서문을 인용하면서 “관기자서觀其自序 위정씨조참위謂鄭氏祖䜟緯 공소유정지종孔疏惟鄭之從 위가한爲可恨 우이응용찬의又以應鏞纂義 어잡기등편궐이불석於雜記等篇闕而不釋 위비爲非 역불위무견亦不爲無見”이라고 하여 집해를 바로 《예기찬의禮記纂義》로 바꾸어 쓰고 있다. 응용應鏞은 《일통지一統志》에 의하면 난계蘭谿사람으로서 박학博學하고 문장이 풍부하였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개주지사開州知事에 이르렀고, 저서로는 《서약의書約義》와 《예기찬의禮記纂義》가 세상에 전한다고 하였다.
찬황호재집해贊皇浩齋集解
미상未詳이다. 《예기집설대전禮記集說大全》에 모두 7이 인용되어 있는데 모두 진호陳澔의 《예기집설禮記集說》에서 온 것이다.
채씨서전蔡氏書傳
채침蔡沈의 《서경집전書經集傳》을 말한다.
여씨시기呂氏詩記
여조겸呂祖謙한 《여씨가숙독시기呂氏家塾讀詩記》를 말한다. 32이다. 여조겸呂祖謙(1137-1181)의 백공伯恭이며 무주인婺州人이다. 태학박사太學博士를 거치고 비서랑秘書郞으로서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 실록원검토관實錄院檢討官이 되어서 《휘종실록徽宗實錄》을 중수重修하였고, 《황조문감皇朝文鑑》을 편찬하였다. 장식張栻, 주자朱子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이 책은 에 대한 해설서이다. 여조겸呂祖謙주자朱子와 함께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하는 등 학문적으로도 깊은 교류를 하였는데 이 《독시기讀詩記》에서도 역시 주자朱子의 견해를 많이 수용하였다. 이 책에서 나오는 ‘주씨왈朱氏曰’이라고 한 것은 모두 주자朱子의 설을 채용한 것이다. 그러나 주자朱子는 나중에 정초鄭樵의 설로 바꾸었는데, 여조겸呂祖謙은 여전히 모공毛公정현鄭玄의 설을 따랐다. 그래서 주자朱子여조겸呂祖謙 사후에 이 책의 서문을 쓰면서 여조겸呂祖謙 자신이 젊은 때 주장한 천박한 견해를 취한 것이 있다고 언급하였다. 진진손陳振孫은 《서록해제書錄解題》에서 “널리 제가諸家을 수집하여 인용하되, 먼저 글자의 훈고訓詁를 설명한 후에 그 글의 뜻을 설명하니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또렷이 요점이 드러났다. 또한 조금이라도 새로운 견해가 있으면 표출表出하였으니 이 책보다 시학詩學을 바르고 상세하게 설명한 것이 없다.”고 칭찬하였다.
엄씨시집嚴氏詩緝
엄찬嚴粲한 《시집詩緝》 36을 말한다. 탄숙坦叔이고 소무인邵武人이다. 청상령清湘令을 지냈다. 이 책은 여조겸呂祖謙의 《독시기讀詩記》를 위주로 하여 여러 가지 을 수집하여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으며, 시에 대한 전통적 해석이 의심스러운 경우 자신의 견해로 단정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시의 대아大雅, 소아小雅의 차이는 단지 그 시체詩體가 다를 뿐이라고 하였는데 《시서詩序》의 정사政事대소大小가 있기 때문에 대아大雅소아小雅가 생겼다는 통설에 비하여 설득력이 있다. 또 〈백주柏舟〉장에서 백주柏舟현인賢人이 자신을 비유한 것이라는 이전의 해석에 대하여 나라를 비유하는 것이며 범범汎汎은 그 나라를 안정시키는 사람이 없는 것을 비유했다고 하였다. 〈간정干旌〉장의 ‘양마사지良馬四之’, ‘양마오지良馬五之’를 모두 말의 숫자라고 하는 통설에 대하여 엄찬嚴粲은 말을 탄 사람이 네 명, 다섯 명이라고 해석하여 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보인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것들은 시인詩人본의本意를 정확하게 이해한 것이다. 또한 음훈音訓명물名物에까지 해박한 고증을 하여 송대宋代의 시를 해설한 책 중에서는 여조겸呂祖謙의 《독시기讀詩記》와 함께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았다.
주관제도周官制度
미상未詳이다. 《예기집설대전禮記集說大全》에는 모두 3칙이 인용되어 있는데 모두 진호陳澔의 《예기집설禮記集說》에서 온 것이다.
괄창항씨예설括蒼項氏禮說
나라 항안세項安世(?-1208)가 한 《항씨가설項氏家說십권十卷 부록이권附錄二卷을 말한다. 《예기집설대전禮記集說大全》에는 1칙이 인용되어 있다. 항안세項安世평보平父이고 괄창인括蒼人(지금의 절강浙江 여수麗水)이다. 비서성秘書省 정자正字를 지냈다. 이 책은 저자가 강릉江陵에 유배된 경원간慶元間(南宋 영종寧宗 1195-1200)에 경서經書사서史書를 연구하여 저술한 것이다. 진진손陳振孫의 《서록해제書錄解題》에서 “유배지에서 두문불출하여 깊이 경사를 연구하여 모든 경서에 대하여 논설하였다. 그의 학문은 체용體用을 겸비하고 치도治道에 통달하였으니, 그의 경서에 대한 논설은 하나도 빈말이 없다.”고 극찬하였다. 내용은 권1, 2는 역설易說, 권3은 서설書說, 권4는 시설詩說, 권5는 주례周禮, 권6은 예기禮記, 권7은 논어論語, 맹자孟子 등으로 이것이 〈설경편說經篇〉이고, 나머지 3권은 〈설사편說事篇〉, 〈설정편說政篇〉, 〈설학편說學篇〉으로 구성되어 있다.
용천섭씨기언龍泉葉氏記言
나라 섭적葉適(1150-1223)이 한 《습학기언習學記言오십권五十卷을 말한다. 《예기집설대전禮記集說大全》에는 모두 3칙이 인용되어 있는데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된 《습학기언習學記言》에는 단지 1칙만 있고 나머지는 검색되지 않는다. 섭적葉適정칙正則, 수심거사水心居士라고 자호自號하였으며, 영가인永嘉人이다. 보문각寶文閣 학사學士를 지냈고 시호諡號충정忠定이다. 이 책은 경사經史백가百家에서 제설諸說집록輯錄한 것이다. 14권, 제자諸子 7권, 이십오二十五권, 문감文鑑 4권이다. 신이新異하고 기묘한 논리를 좋아하였고, 진부한 말이라도 가리지 않고 주워 모았다. 따라서 진진손陳振孫서록해제書錄解題》에서 “그 문장은 매우 뛰어나고 정교하지만 의리義理에 있어서는 흠이 있고 바르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한 ‘태극생양의太極生兩儀’라는 명제에 대하여 “문장이 천박하고 뜻은 비루하다.”고 하는 등 당시와는 매우 동떨어진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는 “국어國語좌씨左氏의 저작이 아니며 자사子思생졸生卒 연월年月에 대한 논설論說은 분명한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있어 그의 뛰어난 논리를 볼 수 있으며, 당사唐史를 논한 몇 조목은 치란통변治亂通變에 대한 깊은 분석을 하고 있어서 쉽게 이룰 수 없는 경지다.”라고 하는 등 상당한 평가를 하고 있다.
주주한절해朱周翰節解
주한周翰나라 주신朱申이다. 《문연각서목文淵閣書目》 권2 ‘주주한상절朱周翰詳節 일부一部 삼책三冊’이라고 보인다.
원류지론源流至論
원류지론源流至論》은 전집前集 10권, 후집後集 10권, 속집續集 10권, 별집別集 10권이다. 전후속집前後續集나라 임경林駉했고, 별집別集나라 황리옹黃履翁했다. 임경林駉덕송德頌이고 영덕인寧德人이다. 위식衛湜의 《예기집설禮記集說》에는 임경林坰의 설이 인용되어 있는데 임경林駉임경林坰이 동일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황리옹黃履翁길보吉父인데 또한 민인閩人으로 추측된다. 나라가 신종神宗때부터 과거에서 시부詩賦를 폐하고 책론策論을 시험쳤는데 고금古今의 사실과 전장典章 제도制度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요구했다. 그러나 전적典籍이 너무나 방대하여 쉽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문헌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분류分類에 대한 요구가 증대되었고 종종 이러한 요구에 따라 유서類書가 간행되어 과장科場에서 참고할 수 있도록 제공되기도 하였다. 당시에 마사본麻沙本이 가장 많았는데 대부분 시골의 서생들이 편찬한 것이라서 보잘 것이 없었고, 오직 장여우章如愚의 《산당군서고색山堂群書考索》이 제일 뛰어났다. 《원류지론源流至論》은 경사經史백가百家특징特徵, 역대의 제도制度연혁沿革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비록 과거의 용도로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송대宋代의 전장 제도를 체계적으로 수록하고 있으며, 당시의 일반적인 유서類書와는 달리 서술이 상세하여 고증考證에 많이 이용된다.
마씨예해馬氏禮解
마희맹馬晞孟한 《예기해禮記解》 70을 말한다. 이 책은 현전하지 않는다. 위식衛湜의 《예기집설禮記集說》에 상당히 많이 인용되어 있다. 《예기집설禮記集說명씨조名氏條에 “마씨馬氏 희맹晞孟언순彦醇이며, 《예기해禮記解》 70이 있다. 방씨方氏(慤), 마씨馬氏(晞孟), 및 산음육씨山陰陸氏(佃) 세 사람의 예기 해설은 당시에 간행되어 세상에 전해졌다. 그중에서도 방각方慤의 해설이 가장 자세하여 초학자初學者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왕안석王安石의 《자설字說》을 수용하고 또 견강부회한 부분은 이 책의 커다란 결점이 되었다. 간간이 장악진씨長樂陳氏(祥道)의 《예서禮書》와 같은 부분이 있는데 방각方慤자서自序에서도 또한 제가諸家예설禮說왕안석王安石의 견해와 합치되는 부분은 모두 수용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이 책에 있는 예설禮說이 모두 마희맹馬晞孟의 독창적인 견해는 아니다.”라고 자세히 설명하였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도 마희맹馬晞孟왕안석王安石을 존숭하였다고 하였다.(卷181 경적고經籍考8)
쌍봉요씨설雙峯饒氏說
요로饒魯. 백여伯輿, 중원仲元이며, 세칭世稱 쌍봉선생雙峰先生으로 불리운다. 남송南宋 요주饒州 여간인余干人이다. 남송南宋경학가經學家로서 일찍이 황간黃榦이번李燔에게 수학하였다. 초시初試에 실패한 이후 벼슬에 대한 뜻을 버리고 여러 번 천거되었지만 오직 학문에 전념하였다. 지행知行을 겸하여 사방에서 그를 초빙하였으며 석동서원石洞書院을 건립하여 가르쳤다. 죽은 뒤 문인들이 문원文元이라는 사시私諡를 올렸다. 평생 저술에 힘써서 《오경강의五經講義》‧《춘추절전春秋節傳》‧《학용찬술學庸纂述》‧《용학십이도庸學十二圖》‧《논맹기문論孟紀聞》‧《태극삼도太極三圖》‧《서명도西銘圖》‧《근사록주近思錄注》 등이 있었으나 대부분 일실逸失되었고, 《백록서원교규白鹿書院敎規》‧《정동이선생학칙程董二先生學則》 등이 현전한다.
우강이씨설盱江李氏說
이구李覯(1009-1059)의 태백泰伯이며 직강直講선생으로 불리웠다. 범중엄范仲淹의 문인이다. 고향에 우강서원盱江書院을 건립하였으므로 우강盱江선생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남성인南城人이다. 송대의 경학가經學家로서 평생토록 후학의 교도에 힘썼다. 황우皇祐(1049-1054) 범문정공范文正公의 천거로 태학조교太學助敎가 되었으며 가우嘉祐(1056-1063) 해문주부海門主簿가 되었고 태학太學 설서說書로서 했다. 저서로는 《예론禮論》‧《역론易論》‧《산정역도서론刪定易圖序論》‧《주례치태평론周禮致太平論》‧《잠서潛書》 등이 있다.
석량왕씨비石梁王氏批
미상未詳이다.
남전여씨설藍田呂氏說
여대림呂大臨(1040-1092)의 여숙與叔이고 경조京兆 남전인藍田人이다. 음직蔭職으로 입사入仕하여 진사에 합격하였다. 원우元祐(1086-1094) 연간에 태학박사太學博士가 되었고, 비서성정자秘書省正字를 지냈다. 처음에 장재張載에게 수학하였으나 나중에 정이程頤에게 수학하여 사양좌謝良佐, 유작游酢, 양시楊時와 함께 정문사선생程門四先生이 되었다. 위식衛湜예기집설禮記集說명씨조名氏條에서 “예기해禮記解 10이 있다. 《중흥관각서목中興館閣書目》에 보면 단지 1권만 있으며, 표기表記, 관의冠義, 혼의昏義, 향음주의鄕飮酒義, 사의射義, 연의燕義, 빙의聘義, 상복사제喪服四制 8뿐이다. 그러나 요즘 통행본은 10권이며 곡례曲禮 상하上下, 공자한거孔子閑居, 중용中庸, 치의緇衣, 심의深衣, 유행儒行, 대학大學의 8이 더 있다.”고 하였다.
양헌풍씨설亮軒馮氏說
미상未詳이다.
항헌유씨설恒軒劉氏說
미상未詳이다. 송원학안宋元學案에 의하면 남송南宋시대 인물로서 유무劉懋항헌선생恒軒先生으로 호칭되었다. 유무劉懋자면子勉으로 건양인建陽人이다. 적계籍溪 호인胡寅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항헌유씨恒軒劉氏가 바로 이 인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예기집설대전禮記集說大全》에서 ‘항헌유씨왈恒軒劉氏曰’로 인용된 부분은 없는데 어떻게 인용引用 서적書籍에 포함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역주
역주1 蜀本은……지적하였다. : “今天下印書 以杭州爲上 蜀本次之 福建最下 京師比歲 印板殆不減 杭州但紙不佳 蜀與福建多以柔木刻之 取其易成而速售故不能工 福建本幾徧天下 正以其易成故也” 葉夢得 撰 《石林燕語》 卷8
역주2 監本은……분명하지 않다. : 판본에 대한 기술은 대부분 宋 岳珂가 撰한 《九經三傳沿革例》에 의거하였으며, 顧炎武의 石經考, 朱彝尊이 撰한 經義考 등을 참조하였음을 밝힌다. 이들 출전에 대하여 일일이 주기하지 않는다.
역주3 송나라 廖剛(1070-1143)이……기술하였다. : “盱郡廖氏九經總例一冊 詳辨諸本互義 凡七類 曰書本 曰字畫 曰注文 曰音釋 曰句讀 曰脱簡 曰考異” 黄虞稷撰 《千頃堂書目》
역주4 朱熹가 찬한……南康에서 간행 : “朱子沒後 嘉定丁丑 始刊板於南康” 《四庫全書總目提要》 《儀禮經傳通解》 提要
역주5 인용한 書籍 : 아래 인용 서적에 대한 간략한 해제는 주로 中華書局 간행 《四庫全書總目提要》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다. 이밖에 上海古籍出版社 간행 《四庫全書簡明目錄》, 遼寧人民出版社 간행 《中國儒學辭典》, 中州古籍出版社 간행 《二十五史人名大辭典》, 同和出版社 간행 《中國經學史》 및 《大漢和辭典》 등을 이용하였다. 이밖에 臺灣 中央硏究院 《二十五史DB》, 上海人民出版社 《文淵閣四庫全書DB》 등을 참고하였다. 이들 사전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다른 문헌을 통해 작성한 것은 그 典據를 본문에 노출시키고 해당 항목에 일일이 각주하지 않았다. 그리고 四書, 三經 등의 기본 경서에 대하여는 이름만을 밝히고 설명하지 않았다.

예기집설대전(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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