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001 孔子少孤
하사 不知其墓
하사 殯於五父之衢
어시늘 人之見之者皆以爲葬也
라하더니 其
也
는 蓋殯也
러라
集說
≪集說≫ 不知其墓者는 不知父墓所在也라 殯於五父之衢者는 殯母喪也니
禮無殯於外者어늘 今乃在衢하니 先儒謂欲致人疑問하야 或有知者告之也라
然以引觀之
하니 殯引
은 飾棺以
하고 葬引
은 飾棺以
하니 此則殯引耳
라
按家語
에 라하니 是少孤也
라 然顔氏之死
에 夫子成立久矣
라
聖人은 人倫之至니 豈有終母之世히 不尋求父葬之地하며 至母殯而猶不知父墓乎아
且母死而殯於衢路는 必無室廬而死於道路者不得已之爲耳니 聖人은 禮法之宗主어늘 而忍爲之乎아
且如堯舜瞽瞍之事로 世俗不勝異論하니 非孟子辭而闢之시면 後世謂何오
此經이 雜出諸子所記하니 其間에 不可據以爲實者多矣라
공자孔子께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으므로 그 묘소가 있는 곳를 알지 못하여 〈어머니의 시신을〉 오부五父의 거리에 빈殯(가매장)을 하자, 사람들 중에 이 광경을 본 자들은 모두 장사葬事를 지내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 상여줄을 보니 빈소에서 발인하는 줄이었다.
추만보郰曼父의 어머니에게 물은 뒤에야 방산防山에 합장合葬할 수가 있었다.
集說
‘그 묘소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아버지의 묘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한 것이다. ‘오부五父의 거리에 빈殯을 하였다’는 것은 어머니의 시신을 빈殯(가매장)한 것이다.
예禮에 따르면 집 밖에 빈을 하는 경우가 없는데 지금 빈을 마침내 거리에서 하였으니, 이에 대해 선유先儒들이 “사람들이 의문을 갖도록 하여 혹 아는 자가 일러주기를 바란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상여가 길에 가는 것을 보고는 모두 장사葬事를 지내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상여줄을 보니 초빈의 상여줄[殯引]은 상여뚜껑[輤]으로 관棺을 장식하고, 장사葬事의 상여줄은 관 덮개와 운삽[유삽柳翣]으로 관을 장식하니, 여기의 상여줄은 초빈의 상여줄이었다.
≪공자가어孔子家語≫를 살펴보니 “공자孔子가 태어나 3살이 되었을 때 숙량흘叔梁紇이 죽었다.”고 했으니, 이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 안씨顔氏가 죽었을 때는 공자가 성장하여 자립한 지 오래였다.
성인聖人은 인륜人倫의 극치이니, 어찌 어머니가 세상을 마치토록 아버지를 장사 지낸 묘지를 찾지 않아서 어머니를 빈함에 이르기까지 아버지 묘소를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리고 어머니가 죽자 거리에 빈한 것은 반드시 집이 없어서 도로에서 객사客死한 사람이 부득이해서 하는 것이니, 성인은 예법禮法의 종주宗主인데 차마 그런 짓을 하셨겠는가.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 숙량흘이 안씨와 야합野合했다는 거짓말을 해서 “안씨가 〈아버지의 묘를〉 숨기고 공자에게 말해주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註에서 이것을 인습하여 후세의 의혹을 더욱 불어나게 하였다.
그리고 요堯․순舜과 고수瞽瞍의 일처럼 세속에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이론異論이 생겨나게 하였으니,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여 물리치지 않으셨다면 후세에 뭐라고 하였겠는가.
이 경經(≪예기禮記≫)은 여러 사람들이 기록한 것에서 뒤섞여 나왔으므로 그 사이에 근거하여 사실로 여길 수 없는 것이 많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옹저癰疽와 시인侍人 척환瘠環을 주인으로 삼았다면, 어떻게 공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내 생각에도 그렇다. 종신終身토록 아버지의 묘墓를 몰랐다면, 어떻게 공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았음이 분명하니, 이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므로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