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102 曰 仲子舍其孫而立其子는 何也오 伯子曰 仲子亦猶行古之道也로다
昔者에 文王이 舍伯邑考而立武王하시며 微子舍其孫腯而立衍也하니 夫仲子亦猶行古之道也로다
集說
≪集說≫ 曰은 弓之問也라 猶는 尙也니 亦猶는 擬議未定之辭라 伯邑考는 文王長子라
文王之立武王은 先儒以爲權이라하고 或亦以爲遵殷制라하니 皆未可知라
否則以德不以長이니 亦如大王이 傳位季歷之意歟인저
集說
○應氏曰 檀弓이 黙而不復言한대 子遊疑而復求正이니 非夫子明辨以示之면 孰知舍孫立子之爲非乎아
大全
≪大全≫ 長樂陳氏曰 木之正出爲本이요 旁出爲枝니 子之正出爲嫡이요 旁出爲庶라
故伐枝不足以傷木이나 伐其本則木弊矣요 廢庶不足以傷宗이나 廢其嫡則其宗絶矣라
本固而枝必茂하고 嫡正而庶必寧하니 此天地自然之理也라
先王이 知其然이라 於是貴嫡而賤庶하야 使名分正而不亂하고 爭奪息而不爭이라
故子生
에 하며 하며 冠則
하고 하며 死則嫡子斬
하고 庶子期
하니 其禮之重輕隆殺如此
라
禮曰 庶子不祭祖는 明其宗也라하고 又曰 庶子不祭禰는 明其宗也라 史曰 父不祭於支庶之宅이라하니 此嫡庶之分을 不可不辨也일새니라
昔公儀仲子舍孫立子
한대 而檀弓弔以免
하고 하니 皆重其服以譏之
하야 欲其辨嫡庶之分而已
라
蓋嫡一而已니 立之足以尊正統而一人之情이로대 庶則衆矣니 立之則亂正統而啓覬覦之心이라
宋莒齊晉之君은 不察乎此하야 每每趨禍하니 良可悼也라
묻기를 “중자仲子가 그 적손適孫을 버려두고 그 서자庶子를 후계자로 세운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자, 백자伯子가 대답하였다. “중자는 아마도 옛 도를 행하려고 했나보다.
옛날에 문왕文王은 장자인 백읍고伯邑考를 버려두고 무왕武王을 세웠으며 미자微子는 적손인 돈腯을 버려두고 아우 연衍을 세웠으니, 중자는 그래도 옛 도를 행하려고 했나보다.”
자유子游가 〈의심하여〉 공자께 묻자 공자께서 “아니다. 적손을 세워야 한다.”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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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曰은 단궁檀弓이 질문한 것이다. 유猶는 ‘아마도[상尙]’라는 뜻이니, 역유亦猶는 헤아려보고 의논은 했지만 아직 결정하지 못한 말이다. 백읍고伯邑考는 문왕文王의 장자長子이다.
미자微子가 적손嫡孫을 버려두고 동생인 연衍을 세운 것은 아마도 은殷나라의 예禮인 듯하다.
문왕文王께서 무왕武王을 후계자로 세운 것에 대해서는 선유先儒가 권도權道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또한 은殷나라의 제도에 따른 것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알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후계자를 세우는 것은〉 덕德을 기준으로 세우는 것이지 나이를 기준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니, 또한 태왕太王이 계력季歷에게 왕위를 전해준 뜻과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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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씨應氏:단궁檀弓이 잠자코 다시 말하지 않자 자유子游가 의심하여 공자孔子께 다시 시정해주기를 구하였으니, 공자께서 분명하게 분별해서 보여주지 않았다면 누가 적손嫡孫을 버려두고 서자庶子를 세운 것이 잘못이 된다는 것을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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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락진씨長樂陳氏:나무의 몸통에서 바르게 뻗어나온 것이 줄기가 되고, 곁으로 나온 것이 가지가 되니, 정실正室로부터 나온 자식이 적자嫡子가 되고 방계傍系에서 나온 자식이 서자庶子가 된다.
그러므로 가지를 자르더라도 나무를 해치기에는 부족하지만 줄기를 자르면 나무는 죽게 될 것이고, 서자를 폐함이 종통宗統을 해치기에는 부족하지만 적자를 폐하면 종통이 끊어질 것이다.
줄기가 굳건하면 가지가 반드시 무성하고 적자를 바로 세우면 서자가 반드시 편안한 법이니, 이것이 바로 천지자연天地自然의 이치이다.
선왕先王이 그러함을 아는지라 이에 적자를 귀하게 여기고 서자를 천하게 여겨서 명분名分을 바로잡아 어지럽지 않도록 하고, 다투고 빼앗음이 종식되어 싸우지 않도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식이 태어났을 때 총자冢子는 태뢰太牢를 써서 접견하고 서자는 소뢰少牢를 써서 접견하며, 총자는 부인과 밥을 먹기 전에 먼저 보고 서자는 부인과 밥을 먹고 나서 천천히 보며, 관례冠禮를 할 때 적자는 조계阼階에서 치르고 서자는 방 밖에서 치르며, 죽었을 때 적자에게는 참최복斬衰服을 입고 서자에게는 기년복期年服을 입으니, 예禮의 중경重輕과 융쇄隆殺가 이와 같은 것이다.
어찌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전중傳重(종묘의 제사를 물려줌)과 부전중不傳重의 차이 때문이다.
≪예기禮記≫ 〈상복소기喪服小記〉에 이르길 “서자가 할아버지에게 제사 지내지 못하는 것은 종통이 따로 있음을 밝힌 것이다.”라고 하고, 또 이르길 “서자가 아버지에게 제사 지내지 못하는 것은 종통이 따로 있음을 밝힌 것이다.”라고 하며, ≪한서漢書≫ 〈위현열전韋賢列傳〉에 이르길 “아버지는 지자支子나 서자의 집에서 제사 지내지 않는다.”라고 하니, 이것은 적자와 서자의 구분을 분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옛날에 공의중자公儀仲子가 적손嫡孫을 버려두고 서자를 후계자로 세우자 단궁檀弓이 단문袒免을 하고서 조문하고, 사구司寇 혜자惠子가 적자를 버려두고 서자를 후계자로 세우자 자유子游가 마최麻衰를 입고서 조문하였으니, 모두 상복喪服을 〈정해진 예식禮式보다〉 과하게 함으로써 그 사실을 기롱하여, 적자와 서자의 구분을 분별하려고 했던 것일 뿐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송宋 선공宣公이 적자인 여이與夷를 버려두고 동생인 목공穆公을 후계자로 세웠고, 목공이 또 적자인 풍馮을 버려두고 여이를 후계자로 세웠는데 여이는 결국 시해를 당했다.
거莒 기공紀公은 태자太子 복僕을 내치고 계타季佗를 총애하였다가 결국 화를 초래하였고, 진晉 헌공獻公은 세자世子 신생申生을 죽이고 해제奚齊를 후계자로 세웠는데 끝내는 진晉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으며, 제齊 영공靈公은 태자太子 광光을 폐위시키고 공자公子 아牙를 후계자로 세웠는데 끝내 제齊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무릇 적자는 한 사람일 따름이니 그를 후계자로 세우면 정통正統을 높이고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에 충분하되, 서자는 여럿이니 그를 후계자로 세우면 정통을 어지럽혀 정통을 넘보려는 마음을 열게 된다.
송宋․거莒․제齊․진晉나라의 군주들은 이러한 점을 살피지 않아서 늘 재앙을 초래했으니, 참으로 서글퍼할 만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