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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記集說大全(2)

예기집설대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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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02 殷 旣封而弔하고 反哭而弔러니 孔子曰 殷 已慤하니 吾從周호리라
集說
≪集說≫ 殷之禮 窆畢 賓就墓所弔主人하고 周禮則俟主人反哭而後弔하나니 孔子謂殷禮太質慤者 蓋親之在土 固爲可哀 不若求親於平生居止之所而不得 其哀爲尤甚也
故弔於墓者 不如爲兼盡이라
故欲從周也시니라
大全
≪大全≫ 嚴陵方氏曰 人之始死也 則哀其死하고 旣葬也 則哀其亡하나니 亡則哀爲甚矣
故反哭之時 有弔禮焉하니라
問喪曰 入門而弗見也하고 上堂而弗見也하며 入室又弗見也하니 亡矣喪矣 不可復見矣
故哭泣辟踊하야 盡哀而止矣라하고 大宗伯 以喪禮哀死亡이라하니 蓋死亡之別 如此
旣封而弔者 受弔於壙也 反哭而弔者 受弔於家也 夫弔也者 所以弔其哀而已
葬不若反哭之哀爲甚이라
此孔子所以謂殷爲已慤이라
라하시니 其言蓋本諸此니라


나라는 하관下棺을 마치고 조문하였고, 나라는 집으로 되돌아와 을 하고 조문하였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라의 는 너무 질박하니 나는 나라의 예를 따르겠다.”고 하였다.
集說
나라의 는 하관이 끝남에 손님이 묘소로 나가서 주인에게 조문하였고, 나라의 예는 주인이 집으로 되돌아와 하기를 기다린 뒤에 조문을 했는데, 공자孔子께서 “나라의 예는 너무 질박하다.”고 한 것은 대개 어버이가 흙 속에 있는 것이 진실로 슬퍼할 만하지만, 어버이를 평생에 거처하던 곳에서 찾아도 볼 수 없는 그 슬픔이 더욱 심한 것만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묘소에서 조문하는 것은 집에서 조문하는 것의 인정人情예문禮文이 겸하여 극진한 것만 못하다.
그러므로 주나라를 따르고자 하신 것이다.
大全
엄릉방씨嚴陵方氏:사람이 막 죽었을 때는 그 죽음을 슬퍼하고, 이미 장사를 지내고 나서는 그가 없어진 것을 슬퍼하는데, 없어지면 슬픔이 더욱 심하게 된다.
그러므로 집으로 돌아와 곡할 때에 조문하는 예가 있는 것이다.
문상問喪〉에 “문에 들어와도 보이지 않고, 에 올라와도 또 보이지 않고, 방에 들어가도 또 보이지 않으니, 안 계시는구나! 돌아가셨구나! 다시는 볼 수가 없구나!
그러므로 곡하고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슬픔을 다하고 그친다.”라고 했고, ≪주례周禮≫ 〈대종백大宗伯〉에 “상례喪禮에 따라 사망死亡한 자를 애도한다.”고 했으니, 의 구별이 이와 같은 것이다.
하관하고 나서 조문을 하는 것은 무덤에서 조문을 받는 것이고, 반곡反哭을 한 뒤에 조문을 받는 것은 집에서 조문을 받는 것이다. 무릇 조문이라고 하는 것은 그 슬픔을 위로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장사를 지내면 비록 슬픈 마음이 일지만 반곡의 슬픔이 더욱 심한 것만은 못하다.
이것이 공자께서 은나라의 예가 지나치게 질박하다고 평하신 이유이다.
주나라 사람이 집에서 조문한 것은 백성들에게 효를 저버리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되 “죽음은 백성들의 마지막 큰 일이다. 나는 주나라의 예를 따르겠다.”고 하셨는데, 그 말은 아마도 여기에서 근거한 것인 듯싶다.


역주
역주1 周人弔於家 示民不偝也 : ≪禮記≫ 〈坊記〉에 “은나라 사람들은 무덤에서 조문하고 주나라 사람들은 집에서 조문하였으니, 백성들에게 효를 저버리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다.[殷人弔於壙 周人弔於家 示民不偝也]”라고 보인다.
역주2 子云……吾從周 : 이 내용은 ≪禮記≫ 〈坊記〉에 보인다.

예기집설대전(2) 책은 2022.12.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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