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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記集說大全(2)

예기집설대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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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604 君 遇柩於路어든 必使人弔之니라
集說
≪集說≫ 不如어늘 而此言弔於路 何也
蓋有爵者之喪 當以禮弔 此謂臣民之微賤者耳 禮不下庶人也
言必使人弔者 是汎言衆人之喪也
大全
≪大全≫ 曰 遇柩於路 必使人弔之니라


임금은 길에서 상여를 만나면 반드시 사람을 시켜 그를 조문하도록 한다.
集說
괴상蕢尙이 길에다가 자기 집 모양을 그려놓고서 조문을 받은 것이 기량杞梁의 아내가 를 아는 것만 못한데, 여기에서 길에서 조문을 한다고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개 관작官爵이 있는 사람의 에는 마땅히 로써 조문을 해야 하고, 여기에서는 신민臣民의 미천한 사람을 이른 것이니, 예가 서인庶人에게까지는 내려가지 않는다.
반드시 사람으로 하여금 조문하도록 한 것은 이는 일반적으로 일반 사람들의 초상을 말한 것이다.
大全
여릉호씨廬陵胡氏:길에서 영구를 만나면 반드시 사람을 시켜 조문을 하는 것이니, 제후齊侯폐무존敝無存했던 따위와 같은 것이다.


역주
역주1 蕢尙畫宮受弔 : 蕢尙(?~?)은 魯나라 사람이다. 居喪 중에 哀公이 보낸 弔問使를 道中에서 만나자, 길에다가 자기 집 모양을 그려놓고 조문을 받았다.(≪禮記≫ 〈檀弓 下〉)
역주2 杞梁之妻知禮 : 杞梁(?~B.C.550)은 春秋시대 齊나라의 대부로 이름은 植이며, 또다른 이름은 殖이고, 梁은 그의 字이다. ≪禮記≫ 〈檀弓 下〉에 증자가 말하기를 “괴상은 기량의 아내가 예를 아는 것만 못하다.[曾子曰 蕢尙 不如杞梁之妻之知禮也]”라고 하였다. 기량이 莊公을 따라 莒나라를 습격하던 중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의 아내가 아들도 없고 친척도 없이 성 아래에 있는 기량의 시체에 나아가 통곡하니 길 가는 사람이 모두 눈물을 흘렸고, 10일 만에 성이 무너졌다. 그의 아내가 시신을 거두어 돌아오는데 들에서 장공이 조문하려 하자, 그녀는 사양하며 말하기를 “杞殖이 죄를 짓고 죽었는데 굳이 조문하실 것이 있겠습니까. 만일 죄를 사면해주신다면 先人의 오막살이가 있으니, 거기에서 조문을 받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역주3 廬陵胡氏 : 南宋 때의 정치가이자 문학자인 胡銓(1102~1180)으로 길주(吉州) 여릉(廬陵, 강서성 吉安) 사람이다. 자는 邦衡이고, 호는 澹庵이며, 澹齋老人이라고도 한다. ≪澹庵集≫을 저술하였다.
역주4 齊侯哭敝無存之類 : ≪春秋左氏傳≫ 定公 9년에 “齊軍이 夷儀에 있을 때 齊侯가 夷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敝無存의 尸身을 찾는 자에게는 다섯 집을 賞으로 주고 勞役을 면제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그 시신을 찾아서 景公은 그 시신에 세 벌의 襚衣를 입히고서 물소가죽으로 장식한 수레와 자루가 긴 日傘을 殉葬品으로 주어 먼저 齊나라로 돌려보냈는데, 이때 수레를 끄는 자들을 꿇어앉히고 全軍에게 哭하게 하고서 경공이 친히 그 靈柩를 세 번 밀어 출발시켰다.[齊師之在夷儀也 齊侯謂夷儀人曰 得敝無存者 以五家免 乃得其尸 公三襚之禭 與之犀軒與直蓋 而先歸之 坐引者 以師哭之 親推之三]”라고 하였다.

예기집설대전(2) 책은 2022.12.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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