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禮記集說大全(2)

예기집설대전(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예기집설대전(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35702 文子退하야 反哭이어늘 子游趨而就諸臣之位한대 文子又辭曰 子辱與彌牟之弟游하시고 又辱爲之服하시고 又辱臨其喪하시니 敢辭하노이다
子游曰 固以請하노이다 文子退하야 扶適子하고 南面而立曰 子辱與彌牟之弟游하시고 又辱爲之服하시고 又辱臨其喪하시니 虎也敢不復位아한대 子游趨而就客位하니라
集說
≪集說≫ 次言敢辭者 辭其立於臣位也 此時 尙未喩子游之意라가 及子游言固以請하야 則文子覺其譏矣
於是扶適子하야 正喪主之位焉하니 而子游之志達矣
趨就客位 禮之正也
集說
○疏曰 大夫之賓位 在門東近北하고 家臣位 亦在門東而南近門하니 竝皆北向이니라
大全
≪大全≫ 長樂陳氏曰 司寇惠子之喪 其廢嫡也 無異公儀仲子之立庶 子游之於司寇惠子 相友也 無異檀弓之於公儀仲子
檀弓之譏仲子 服免而已 趨而就門右而已어늘 子游之譏惠子 服不以免而麻衰牡麻絰하고 趨不就門右而就諸臣之位
又檀弓之譏則見於言하고 子游之譏 至於無言者하니 蓋檀弓以仲子無賢兄弟하야 非可追而正之 故服止於免하고 趨止於景伯하고 而示之以言하야 姑以正法而已
子游 以惠子之兄弟 有文子者하야 可以追而正之
故重爲之服하고 卑爲之趨하고 示之以無言하야 使之自訟而改焉하니 旣而文子果扶適子하야 南面而立하니 豈非事異則禮異哉리오
然子游之知禮 未必不始於檀弓이라
故仲子之事 子游惑而檀弓行之하니 檀弓所以爲賢歟


문자文子가 물러나 제자리로 돌아가 하자 자유子游가 종종걸음으로 가신家臣들의 자리로 나아가니, 문자가 또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분에 넘치게 저의 아우와 교유하시고, 또 분에 넘치게 그를 위해 을 입어주시고, 또 분에 넘치게 그 에 왕림해주시니, 감히 사양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자유가 “굳이 청합니다.”라고 말하자, 문자가 물러가서 〈혜자惠子의〉 적자適子를 부축하여 남면南面해서 상주의 자리에 서게 하고 말하기를 “그대가 분에 넘치게 저의 아우와 교유하시고, 또 분에 넘치게 그를 위하여 복을 입어주시고, 또 분에 넘치게 그 상에 왕림해주시니, 적자嫡子가 감히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그제서야 자유가 종종걸음으로 조문객의 자리로 나아갔다.
集說
재차 감히 사양한다고 말한 것은 자유子游가신家臣의 자리로 가서 섬을 사양한 것이다. 이때에도 문자文子가 아직 자유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자유가 굳이 청한다고 말함에 이르러서야 문자가 그를 기롱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혜자惠子적자適子를 부축하여 상주喪主의 위치를 바로잡았으니, 자유의 뜻이 관철되었다.
종종걸음으로 손님의 자리로 나아간 것은 올바른 이다.
集說
대부大夫의 손님의 자리는 문의 동쪽에 있으면서 북쪽에 가깝고, 가신家臣의 자리는 또한 문의 동쪽에 있으면서 남쪽으로 문에 가까우니, 모두 북쪽을 향하는 것이다.
大全
장락진씨長樂陳氏사구司寇 혜자惠子적자適子를 폐한 것은 공의중자公儀仲子서자庶子를 세웠던 것과 다를 것이 없고, 자유子游는 사구 혜자에 대해 상호 벗이 되니, 단궁檀弓이 공의중자에 있어서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단궁이 중자를 기롱할 때에는 을 입되 단문袒免을 하였을 뿐이고, 또 종종걸음으로 문의 오른쪽으로 나아갔을 뿐이었는데, 자유가 혜자를 기롱할 때에는 복을 입되 단문을 하지 않고 베로 만든 상복과 수삼으로 만든 환질環絰을 둘렀으며, 종종걸음으로 문의 오른쪽으로 나아가지 않고 신하의 자리로 나아갔다.
또 단궁의 기롱은 말에서 나타나고, 자유의 기롱은 심지어 말이 없기까지 했으니, 아마도 단궁은 중자에게 현명한 형제가 없으므로, 뒤쫓아서 바르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에 복이 단문에 그치고, 종종걸음으로 나아가는 것도 경백景伯에게 다가가는 것에서 그쳤으며, 말로써 보여주어 우선 예법을 바로잡을 뿐이었다.
반면 자유는 혜자의 형제 중에는 문자文子라는 자가 있어서, 뒤쫓아서 바르게 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중하게 복을 입고 자신을 낮추어 종종걸음으로 나아가 무언無言의 가르침을 보여주어 그로 하여금 스스로 따져보고 고치도록 하자, 이윽고 문자가 과연 적자를 부축하여 남쪽을 향하여 서 있게 하였으니, 어찌 사안이 다르면 가 다른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자유가 예를 안 것은 반드시 단궁에게서 비롯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자의 일에 대해서 자유는 의혹을 품었지만 단궁은 그대로 시행했던 것이니, 이것이 바로 단궁을 현명하다고 여기는 까닭일 것이다.



예기집설대전(2) 책은 2022.12.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50 서울시 종로구 삼봉로81, 1332호(두산위브파빌리온)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