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701 魯莊公之喪에 旣葬하고 而絰不入庫門하며 士大夫旣卒哭하고 麻不入하니라
集說
≪集說≫ 莊公이 爲子般所弑하야 而慶父作亂하니 閔公時年八歲라 絰은 葛絰也라 諸侯는 弁絰葛而葬하니 葬畢에 閔公이 卽除凶服於庫門之外하고 而以吉服嗣位라
士大夫則仍麻絰하고 直俟卒哭하야 乃不以麻絰入庫門하니 蓋閔公이 旣吉服하고 不與虞與卒哭之祭라
故群臣이 至卒哭而除하니 記禍亂恐迫하야 禮所由廢라
大全
≪大全≫ 嚴陵方氏曰 君以葬爲節하고 臣以卒哭爲節者는 君先除而後에 臣敢除故也라
노魯나라 장공莊公의 상喪에 이미 장사葬事를 마치고 나서 갈질葛絰 차림으로 고문庫門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사士와 대부大夫들은 이미 졸곡제卒哭祭를 끝내고 나서 마질麻絰 차림으로 고문庫門에 들어가지 않았다.
集說
장공莊公이 자반子般에게 시해당하자 경보慶父가 난을 일으켰는데, 민공閔公은 당시 나이가 여덟 살 이었다. 질絰은 갈질葛絰이다. 제후諸侯는 작변爵弁에 갈질을 두루고서 장사葬事를 지내는데, 장사가 끝나자 민공이 즉시 고문庫門 밖에서 흉복凶服을 벗어버리고 길복吉服차림으로써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갈질 차림으로 고문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사士와 대부大夫는 그대로 마질麻絰을 두루고 곧바로 졸곡卒哭을 기다리고 이에 마질 차림으로 고문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아마도 민공이 이미 길복吉服을 입고서 우제虞祭와 졸곡卒哭의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하들이 졸곡에 이르러서 상복喪服을 벗은 것이니, 화란禍亂에 두려워하고 핍박받아 예禮가 이로 말미암아 폐해짐을 기록한 것이다.
大全
엄릉방씨嚴陵方氏:임금은 장사葬事를 마치는 것을 상복을 벗는 절도로 삼고 신하는 졸곡卒哭을 끝내는 것을 상복을 벗는 절도로 삼는 것은, 임금이 먼저 상복을 벗은 뒤에야 신하가 감히 상복을 벗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3년상을 마치지 못한 것이니, 예禮를 잃음이 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