今者에 鑾輿播越하여 未復宮闈하고 宗祏震驚하여 尙愆禋祀라
中區多梗
하고 大憝猶存
注+① 此指朱泚.하니 此乃人情向背之秋
며 天意去就之際
니
陛下가 誠宜深自懲勵하사 以收攬群心하고 痛自貶損하사 以答謝靈譴이어늘 豈可近從末議하여 重益美名이리오
旣虧追咎之誠하고 必累中興之業이니 以臣庸蔽로 未見其宜로소니
乞更詳思하사 不爲兇孽所幸케하소서 此臣之至願也로소이다 謹奏라
3-2-3 지금 어가가 파천해서 궁궐로 돌아가지 못하고 종묘사직이 몹시 놀라 오히려
를 제대로 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원에 화란이 많고 원흉(
주자朱泚)이 여전히 살아 있으니,
注+① 大憝猶存:이는 朱泚를 가리킨다. 이는 곧
인정人情의 향배가 달린 시기이며
천의天意의 거취가 달려 있는 때입니다.
폐하께서는 진실로 깊이 스스로 징계하고 면려하여 군심群心을 수렴하고 통렬하게 스스로 낮추시어 신령의 꾸짖음에 답하셔야 할 것인데, 어찌 천근한 말단의 의론을 좇아 미명美名을 거듭 더하고자 하십니까.
스스로를 지난 잘못을 허물하는 성심誠心을 무너뜨리고 기어이 중흥中興의 업業에 누를 끼치게 될 것이니, 어리석고 용렬한 신臣으로서는 그것이 마땅한지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다시 자세히 생각하시어 역적의 바라는 바가 되지 않게 하소서. 이는 신이 지극히 원하는 것입니다. 삼가 아룁니다.
【평설評說】 존호尊號는 황제․황후 또는 선왕의 종묘宗廟 등의 칭호를 높여 올리는 것을 말한다. 당唐나라 초기의 황제들은 생전에 단지 ‘황제皇帝’라 칭하였으며 연호年號는 있었지만 존호尊號는 없었다. 죽은 뒤에야 군신이 올린 바에 따라 시호諡號, 묘호廟號, 추존호追尊號 등을 가질 수 있었으니, 이를테면 ‘태종太宗’은 죽은 뒤에 붙여진 묘호廟號요, ‘문文’은 시호諡號이며, ‘문무대성대광文武大聖大廣’은 추존호追尊號다. 생전에 존호尊號를 더한 것은 무측천武則天에게 ‘성모신황聖母神皇’의 존호를 올리고, 중종中宗에게 ‘응천신룡황제應天神龍皇帝’의 존호를 올린 데서 시작되었으니, 육지陸贄가 “존호가 시작된 것은 본래 옛 제도가 아니다.[존호지흥尊號之興 본비고제本非古制]”라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덕종德宗은 779년 즉위하였고 그 이듬해인 건중建中 원년(780)에 바로 ‘성신문무황제聖神文武皇帝’라는 존호를 가졌다. 그런데 건중建中 4년(783)에 점술사들이 “시운時運이 백륙百六에 모였으니 마땅히 변경해서 시대의 운세에 대응해야 한다.[數鍾百六 宜有變更 以應時數]”고 건의한 것을 이유로 또다시 존호를 더하고자 하였다. 덕종은 비록 ‘중의衆議’에 가탁하였지만 ‘제사병의개변諸事竝宜改變’이라 한 점으로 볼 때, 결국 육지의 동의를 요구한 것이라고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육지는 ‘존호지흥尊號之興 본비고제本非古制’라 하여 회의를 표한 후 ‘상란喪亂의 때에 인습한다면 더욱 사체事體를 손상시킬 것[襲乎喪亂之時 尤傷事體]’이라고 하여 시무時務에 부합하지 않음을 말하였고 나아가 ‘중의衆議’를 ‘천근한 말단의 의론[近從末議]’이라 하여 진정한 ‘중의衆議’가 아니라고 못 박은 후 ‘마땅한지 모르겠다[未見其宜]’는 한마디로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존호의 가자 문제는 군주의 체모와 관계된 것이므로 매우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기도 했다.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이 일이 현안으로 떠오르면 육지의 주의가 종종 인용되곤 했는데, 숙종肅宗 즉위 40년을 앞두고 조태구趙泰耉가 올린 상소에서도 이런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육지가 “존호가 시작된 것은 본래 옛 제도가 아니니, 국가가 태평한 때에 행하더라도 이미 겸허함에 누가 되는 것[존호지흥尊號之興 본비고제本非古制 行於安泰之日 已累謙冲]’라고 한 부분을 적시하고, 다시 이 글의 자매편인 〈중론존호장重論尊號狀〉를 인용하여 반대하였다.(≪숙종실록肅宗實錄≫ 39년 1월 6일) 한편 존호를 더하는 일에 신중했던 정조正祖는 영조英祖 탄신 백주년을 맞아 휘호를 올리자는 홍낙성洪樂性의 청에 대해 “선왕先王의 휘호徽號는 글자 수가 너무 많아 더 올리고 싶어도 다시 훌륭한 덕을 형용할 만한 다른 글자가 없고 또 인원왕후仁元王后에게 존호를 올릴 때에도 그때마다 숙종肅宗에게 존호를 올리지 않았다.”며 “존호를 더 올리지 않는 것이 선왕의 뜻을 받드는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물리친 일이 있는데, 이때 “진종眞宗을 추존할 때도 그가 대통大統을 이어받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더 큰 호칭을 올려야 한다고 했다면 나는 감히 따르지 않는 쪽으로 결정을 하였을 것”(≪정조실록正祖實錄≫ 17년 11월 19일)이라는 뜻을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