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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陸宣公奏議(1)

당육선공주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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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元之後 大憝初夷注+① 此指安祿山․史思明. 繼有外虞注+② 祿山死, 慶緖繼之. 思明死, 朝義繼之.하여 悉師東討
邊備旣弛하고亦空일새 吐蕃乘虛하여 深入爲寇하니 故先皇帝 莫與爲禦하여 避之東遊注+③ 代宗紀 “寶應元年七月, 吐蕃陷隴右諸州. 十月, 寇奉天․武功, 戰于盩厔, 王師敗績. 丙子, 駕如陝州. 戊寅, 吐蕃陷京師.”하시니
是皆失居重馭輕之權하며 忘深根固柢之慮하여 內寇則崤函失險하고 外侵則汧渭爲戎하니
于斯之時 朝市離析하여 事變可慮 須臾萬端이라
雖有四方之師 寧救一朝之患이리오 陛下 追想及此하시면 豈不爲之寒心哉


1-2-7 의 후에 역적을 처음 평정하였지만注+① 大憝初夷:이것은 安祿山과 을 이른다. 계속 변경의 우환이 이어져注+② 繼有外虞:安祿山이 죽자 가 이었고, 史思明이 죽자 가 이었다.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동쪽을 쳤습니다.
변방의 방비가 이미 느슨해졌고 금군禁軍 또한 텅 비게 되었기 때문에 이 빈 곳을 타고 깊이 침입하였는데, 옛 선황제께서는 아무도 함께 막을 사람이 없어서 토번을 피하여 동쪽으로 몽진하셨습니다.注+③ 避之東遊:≪新唐書≫ 〈代宗紀〉에 “寶應 원년(762) 7월 吐蕃이 隴右의 여러 州를 함락하였으며, 10월 奉天과 武功을 침범하였고 盩厔(주질)에서 교전을 벌여서 천자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병자일에 陝州로 임금이 거둥하였고, 무인일에 토번이 경사를 함락하였다.” 하였다.
이는 모두 중요한 것을 장악하여 가벼운 것을 통제하는 권세를 잃은 것이고, 뿌리를 깊고 견고하게 하는 생각을 잊어서이니, 그 결과 안으로 내란이 일어나자 험요지인 효산崤山함곡函谷을 잃고 외침이 일어나자 견수汧水위수渭水가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이때에 조정과 시장이 사분오열四分五裂되어 우려스러운 사변들이 잠깐 사이에 수도 없이 일어났습니다.
비록 사방의 군사가 있더라도 어찌 하루아침의 근심을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폐하께서 미루어 상상해보신다면 어찌 이 때문에 한심해하지 않겠습니까.


역주
역주1 乾元 : 唐 肅宗의 연호로 758년에서 759년까지 사용하였다.
역주2 吐蕃 : 티베트왕국 및 티베트인에 대한 唐․宋나라 때의 호칭이다. 漢나라 이래의 史籍에서는 西羌이라 일컬었다. 葉宗弄贊이 재위할 때 인도와 교통하고 唐 太宗과 和好하는 등 크게 번창하였다. 이후 차츰 당나라와 충돌이 잦아져 高祖 武德 6년(623)부터 唐나라가 망할 때까지 河西․隴右․關中(지금의 甘肅․青海․陝西 일대)과 西域 등지에서 크고 작은 전쟁을 끊임없이 벌였다.
역주3 (戎)[戍] : 저본에는 ‘戎’으로 되어 있으나, ≪翰苑集≫, ≪歷代名臣奏議≫에 의거하여 ‘戍’로 바로잡았다.
역주4 史思明 : 돌궐족으로 唐나라 寧夷 사람이다. 처음 이름은 窣干이며, ‘思明’은 玄宗이 내린 이름이다. 安祿山과 동향으로, 6가지 언어를 이해했다. 天寶 연간에 세운 전공으로 平虜兵馬使가 되었으며,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해 河北을 평정하고 饒陽을 공략했다. 至德 2년(757) 安慶緖가 부친 안녹산을 죽이고 稱帝하자 당나라로 귀순해서 范陽長史와 河北節度使를 지냈다. 변심할까 두려워한 肅宗이 살해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다시 반기를 들었으며, 乾元 2년(759) 魏州에서 大聖燕王이라 일컫고 연호를 順天이라 했다. 그 뒤 안경서 등을 죽이고 그 무리를 병합한 후 범양으로 돌아와 大燕皇帝라 칭했으며, 洛陽을 함락했다. 761년에 아들 史朝義와 그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
역주5 安慶緖 : 安祿山의 둘째 아들로, 초명은 仁執이다. 약관 전에 鴻臚卿에 올라 廣陽太守를 겸했으며, 안녹산이 난을 일으켜 大燕皇帝라 칭하자 晉王에 봉해졌다. 肅宗 至德 2년(757), 부친 안녹산이 동생 安慶恩을 편애하는 데 불안을 느껴 부친을 살해하고 반란군을 통솔하면서 載初로 연호를 바꾸었다. 唐나라 군대가 洛陽과 長安을 수복하자 湖南의 鄴으로 달아나 안녹산의 부장 史思明에게 구원을 요청했는데 오히려 살해당했다.
역주6 史朝義 : 史思明의 맏아들이다. 사사명이 安祿山을 따라 거병했을 때 冀州와 相州를 지켰으며, 乾元 2년(759) 사사명이 安慶緖를 살해하고 칭제하자 懷王에 봉해졌다. 上元 2년(761), 부친 사사명을 살해하고 大燕의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를 顕聖이라고 하였다. 이듬해 조정에서 回纥(위구르)의 지원을 받아 반격하였으며, 사조의의 거점인 낙양을 함락하자, 북방의 莫州(지금의 河北省 任丘 일원)으로 피했다. 田承嗣와 李懷仙이 배신한 후 자살함으로써 마침내 안사의 난이 마무리되었다.

당육선공주의(1) 책은 2023.01.1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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