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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陸宣公奏議(2)

당육선공주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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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육선공주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開元天寶之間 控禦西北兩蕃호되 唯朔方河西隴右三節度而已注+① 唐(史)[書]兵志 “自高宗永徽以後, 都督帶使持節者, 始謂之節度使, 然猶未以名官. 景雲二年, 以賀拔延嗣爲涼洲都督河西節度使, 自此而後, 接乎開元, 朔方․隴右․河西諸鎭, 皆置節度使. 如開元十六年, 吐蕃入寇, 隴右節度使張志亮․河西節度使蕭蒿克之, 天寶二年, 奚․契丹入寇, 朔方節度使王忠嗣敗之.” 是當西北兩蕃諸道者, 止此三節度爾.로되 猶慮權分勢散하여 或使兼而領之注+② 如王忠嗣爲河西․隴右節度使, 兼權朔方․河東節度使之類.러니
中興已來 未遑外討하여 僑隷四鎭於安定하며 權附隴右於扶風注+③ 時西北二邊寇盜充斥, 故四鎭․隴右皆寓治於安定․扶風. 四鎭․北庭, 謂龜玆․于闐․焉耆․疏勒也.하고
所當西北兩蕃 亦朔方涇原隴右河東四節度而已 關東戍卒 至則屬焉하니 雖委任 未盡得人하나 而措置 尙存典制러니
自頃逆泚 誘涇原之衆注+④ 建中四年十月, 朱泚反, 率涇原士卒․姚令言等犯奉天.하고 叛懷光 汙朔方之軍注+⑤ 李懷光始提朔方之軍以解賊圍, 旣而與朱泚軍兵, 據河中叛.하니 割裂誅鋤하야 所餘無幾어늘 而又分朔方之地하여 建牙擁節者
凡三使焉注+⑥ 自肅宗時已分朔方置邠․寧等州節度使.이요 其餘鎭軍 數且四十注+⑦ 當開元時, 天下之節度使有八, 其一曰關內․朔方節度使, 其二曰河東節度使, 其三曰河北․幽州節度使, 其四曰河西節度使, 其五曰隴右節度使, 其六曰劍南節度使, 其七曰嶺西節度使, 其八曰嶺南節度使. 自後武夫戰卒, 以功起行陣, 列爲侯王者, 皆除節度使. 故至德宗朝, 數且四十, 是三倍於開元也.이라 皆承特詔委寄하고 各降中貴監臨하니 人得抗衡하여 莫相稟屬이라
每俟邊書告急하여 方令計會用兵하나 既無軍法下臨하고 唯以客禮相待하니
是乃從容拯溺하며 揖讓救焚하니 冀無阽危라도 固亦難矣
夫兵 以氣勢爲用者也 氣聚則盛하고 散則消하며 勢合則威하며 析則弱이어늘
今之邊備 勢弱氣消 建軍若斯하니 可謂力分於將多矣


9-1-22 개원開元천보天寶 연간에 서북西北양번兩蕃(토번吐蕃돌궐突厥)을 막았는데, 오직 삭방朔方하서河西농우隴右절도사節度使뿐이었습니다.注+① 開元天寶之間……三節度而已:≪新唐書≫ 〈兵志〉에 “高宗 永徽 연간 이후로 都督으로서 을 겸한 자를 비로소 節度使라 했지만 아직 관명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景雲 2년(711) 를 涼洲都督 河西節度使로 삼았는데, 이 뒤로 開元 연간에 이르기까지 삭방․농우․하서 諸鎭에 모두 절도사를 두었다. 예를 들면, 개원 16년(728)에 토번이 들어와 노략질을 하자 隴右節度使 張志亮과 河西節度使 蕭蒿가 물리쳤고, 천보 2년(743) 奚와 契丹이 들어와 노략질하자 朔方節度使 王忠嗣가 물리쳤다.” 하였다. 여기서 서북 지역 兩蕃의 諸道를 담당하는 것은 이 세 절도사뿐이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권한과 형세가 분산될까 염려하여 혹 〈한 사람의 절도사로〉 하여금 다른 절도사직을 겸하여 통할하게 했습니다.注+② 慮權分勢散……或使兼而領之:王忠嗣가 河西․隴右節度使가 되어 朔方․河東節度使를 임시로 겸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중흥中興 이래로는 밖으로 정벌할 겨를이 없어 사진四鎭안정安定 농우를 부풍扶風에 임시로 붙였으며,注+③ 僑隷四鎭於安定……權附隴右於扶風:당시에 서쪽과 북쪽 두 변경에 寇盜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四鎭과 隴右를 安定과 扶風에 治所를 붙였다. 사진과 북정은 龜玆․于闐․焉耆․疏勒이다.
서북 양번兩蕃(토번吐蕃회흘回紇)을 담당한 것은 또한 삭방朔方, 경원涇原, 농우隴右, 하동河東의 네 절도사뿐이었는데, 관동關東수졸戍卒은 이르면 여기에 배속하였으니, 비록 위임함에는 항상 적합한 자를 얻지는 못했지만 조치함에는 그래도 전제典制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 역적 주자朱泚경원涇原의 무리들을 유혹하고注+④ 逆泚誘涇原之衆:建中 4년(783) 10월에 朱泚가 반란하여 涇原의 사졸들과 姚令言 등을 이끌고 奉天을 침범하였다. 반도 이회광李懷光이 삭방의 군대를 더럽힌 이후로,注+⑤ 叛懷光汙朔方之軍:李懷光이 처음에는 朔方의 군대를 가지고 적(朱泚)의 포위를 풀었었는데, 얼마 뒤에 주자의 군대와 연합하여 河中을 근거로 모반하였다. 뿔뿔이 나뉘고 죽임을 당하여 남아 있는 군대가 얼마 되지 않는데도, 또다시 삭방의 땅을 분할하여 군기를 세우고 부절을 지니게 하였으니,
그 결과 모두 세 명의 절도사가 있게 되었으며,注+⑥ 分朔方之地……凡三使焉:肅宗 때부터 이미 朔方을 나누어 邠州와 寧州 등의 절도사를 두었다. 그 밖의 진군鎭軍도 그 수가 40곳에 이르렀는데,注+⑦ 其餘鎭軍 數且四十:開元 때에 천하의 節度使가 여덟이었는데, 하나는 關內․朔方節度使이고, 둘째는 河東節度使이고, 셋째는 河北․幽州節度使이고, 넷째는 河西節度使이고, 다섯째는 隴右節度使이고, 여섯째는 劍南節度使이고, 일곱째는 嶺西節度使이고, 여덟째는 嶺南節度使이다. 이후로 武夫와 戰卒이 군대에서 공을 세워 侯王이 된 자들은 모두 절도사에 제수되었다. 때문에 德宗朝에 이르러서는 그 수가 거의 40이나 되었으니, 이는 開元 연간의 3배였다. 이들 모두 특조特詔를 받들어 위임받았으며 각각 를 내려보내 감군監軍케 하니, 사람마다 비등한 형국이어서 서로 간에 통속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매번 변방의 급보가 이르기를 기다린 후에야 그제야 용병用兵의 방도를 계획할 것을 명령하지만, 이마저도 군법을 내리지 못하고 오직 객례客禮로 서로를 대합니다.
이는 바로 느긋이 물에 빠진 자를 건져 내고 예를 차리면서 불을 끄는 것이니, 위험이 없게 하고자 하여도 진실로 또한 어려울 것입니다.
무릇 군대는 기세氣勢를 가지고 운용하는 것이니, 가 모이면 성하게 되지만 흩어지면 쇠하며, 가 합하면 위엄威嚴이 있게 되지만 나누어지면 약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변방의 방비는 가 약하고 가 사그라들었으니, 군대를 세움이 이와 같다면 장수가 많은 데에서 힘이 분산되었다고 할 만합니다.


역주
역주1 僑置하고 : 僑置란 地名을 다른 곳에 그대로 옮겨서 설치한 것이다. 東晉과 南朝 시대에 북방 민족들이 침범하자 중원의 백성들이 남방으로 전란을 피해왔는데, 남방의 지역을 택하여 郡縣을 설치하고 북쪽에서 부르던 지명을 그대로 쓰게 하여 그들을 안주시킨 데에서 나왔다. 이후 당나라 전기에 북방과 서역으로 영토를 확대하면서 그곳에 都護府나 羈縻州를 설치하였는데, 이후 외침으로 당나라의 영역이 줄어들면서 그에 따라 도호부나 기미주를 다른 곳으로 교치하였다. 安西四鎭이나 北庭都護府는 서역 지역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안사의 난 이후 토번의 진출로 서역으로 가는 길이 단절되자 사진과 북정의 치소를 교치한 것을 말한 것이다. 아래 원문의 ‘權附’도 이러한 의미로 쓰인 것이다.
역주2 中貴 : 中貴는 원래 宦官을 일컫는 말이지만 여기에서는 監軍으로 파견된 환관을 가리킨다.
역주3 使持節 : 사명을 받들어 지방에 파견된 관리가 행사할 수 있는 軍權의 정도를 가리키는 말에서 연유한 관직 이름으로, ‘假節’과 ‘持節’보다 많은 권한을 가졌다. ‘節’은 ‘符節’을 뜻한다.
역주4 賀拔延嗣 :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節度使에 임명된 인물로 神武尖山(지금의 山西省 朔州市) 사람이며, 字號는 미상이다. 景雲 2년(711)에 涼州都督 겸 河西節度使가 되어 吐蕃과 突厥을 막아내는 임무를 맡았다.

당육선공주의(2) 책은 2023.01.1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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