開元天寶之間
에 控禦西北兩蕃
호되 唯朔方河西隴右三節度而已
注+① 唐(史)[書]兵志 “自高宗永徽以後, 都督帶使持節者, 始謂之節度使, 然猶未以名官. 景雲二年, 以賀拔延嗣爲涼洲都督河西節度使, 自此而後, 接乎開元, 朔方․隴右․河西諸鎭, 皆置節度使. 如開元十六年, 吐蕃入寇, 隴右節度使張志亮․河西節度使蕭蒿克之, 天寶二年, 奚․契丹入寇, 朔方節度使王忠嗣敗之.” 是當西北兩蕃諸道者, 止此三節度爾.로되 猶慮權分勢散
하여 或使兼而領之
注+② 如王忠嗣爲河西․隴右節度使, 兼權朔方․河東節度使之類.러니
中興已來
에 未遑外討
하여 僑隷四鎭於安定
하며 權附隴右於扶風
注+③ 時西北二邊寇盜充斥, 故四鎭․隴右皆寓治於安定․扶風. 四鎭․北庭, 謂龜玆․于闐․焉耆․疏勒也.하고
所當西北兩蕃이 亦朔方涇原隴右河東四節度而已라 關東戍卒이 至則屬焉하니 雖委任이 未盡得人하나 而措置가 尙存典制러니
自頃逆泚
가 誘涇原之衆
注+④ 建中四年十月, 朱泚反, 率涇原士卒․姚令言等犯奉天.하고 叛懷光
이 汙朔方之軍
注+⑤ 李懷光始提朔方之軍以解賊圍, 旣而與朱泚軍兵, 據河中叛.하니 割裂誅鋤
하야 所餘無幾
어늘 而又分朔方之地
하여 建牙擁節者
가
凡三使焉
注+⑥ 自肅宗時已分朔方置邠․寧等州節度使.이요 其餘鎭軍
이 數且四十
注+⑦ 當開元時, 天下之節度使有八, 其一曰關內․朔方節度使, 其二曰河東節度使, 其三曰河北․幽州節度使, 其四曰河西節度使, 其五曰隴右節度使, 其六曰劍南節度使, 其七曰嶺西節度使, 其八曰嶺南節度使. 自後武夫戰卒, 以功起行陣, 列爲侯王者, 皆除節度使. 故至德宗朝, 數且四十, 是三倍於開元也.이라 皆承特詔委寄
하고 各降中貴監臨
하니 人得抗衡
하여 莫相稟屬
이라
每俟邊書告急하여 方令計會用兵하나 既無軍法下臨하고 唯以客禮相待하니
是乃從容拯溺하며 揖讓救焚하니 冀無阽危라도 固亦難矣라
夫兵은 以氣勢爲用者也라 氣聚則盛하고 散則消하며 勢合則威하며 析則弱이어늘
今之邊備는 勢弱氣消라 建軍若斯하니 可謂力分於將多矣요
9-1-22
개원開元․
천보天寶 연간에
서북西北의
양번兩蕃(
토번吐蕃과
돌궐突厥)을 막았는데, 오직
삭방朔方․
하서河西․
농우隴右 세
절도사節度使뿐이었습니다.
注+① 開元天寶之間……三節度而已:≪新唐書≫ 〈兵志〉에 “高宗 永徽 연간 이후로 都督으로서 을 겸한 자를 비로소 節度使라 했지만 아직 관명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景雲 2년(711) 를 涼洲都督 河西節度使로 삼았는데, 이 뒤로 開元 연간에 이르기까지 삭방․농우․하서 諸鎭에 모두 절도사를 두었다. 예를 들면, 개원 16년(728)에 토번이 들어와 노략질을 하자 隴右節度使 張志亮과 河西節度使 蕭蒿가 물리쳤고, 천보 2년(743) 奚와 契丹이 들어와 노략질하자 朔方節度使 王忠嗣가 물리쳤다.” 하였다. 여기서 서북 지역 兩蕃의 諸道를 담당하는 것은 이 세 절도사뿐이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권한과 형세가 분산될까 염려하여 혹 〈한 사람의 절도사로〉 하여금 다른 절도사직을 겸하여 통할하게 했습니다.
注+② 慮權分勢散……或使兼而領之:王忠嗣가 河西․隴右節度使가 되어 朔方․河東節度使를 임시로 겸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중흥中興 이래로는 밖으로 정벌할 겨를이 없어
사진四鎭을
안정安定에
농우를
부풍扶風에 임시로 붙였으며,
注+③ 僑隷四鎭於安定……權附隴右於扶風:당시에 서쪽과 북쪽 두 변경에 寇盜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四鎭과 隴右를 安定과 扶風에 治所를 붙였다. 사진과 북정은 龜玆․于闐․焉耆․疏勒이다.
서북 양번兩蕃(토번吐蕃과 회흘回紇)을 담당한 것은 또한 삭방朔方, 경원涇原, 농우隴右, 하동河東의 네 절도사뿐이었는데, 관동關東의 수졸戍卒은 이르면 여기에 배속하였으니, 비록 위임함에는 항상 적합한 자를 얻지는 못했지만 조치함에는 그래도 전제典制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 역적
주자朱泚가
경원涇原의 무리들을 유혹하고
注+④ 逆泚誘涇原之衆:建中 4년(783) 10월에 朱泚가 반란하여 涇原의 사졸들과 姚令言 등을 이끌고 奉天을 침범하였다. 반도
이회광李懷光이 삭방의 군대를 더럽힌 이후로,
注+⑤ 叛懷光汙朔方之軍:李懷光이 처음에는 朔方의 군대를 가지고 적(朱泚)의 포위를 풀었었는데, 얼마 뒤에 주자의 군대와 연합하여 河中을 근거로 모반하였다. 뿔뿔이 나뉘고 죽임을 당하여 남아 있는 군대가 얼마 되지 않는데도, 또다시 삭방의 땅을 분할하여 군기를 세우고 부절을 지니게 하였으니,
그 결과 모두 세 명의 절도사가 있게 되었으며,
注+⑥ 分朔方之地……凡三使焉:肅宗 때부터 이미 朔方을 나누어 邠州와 寧州 등의 절도사를 두었다. 그 밖의
진군鎭軍도 그 수가 40곳에 이르렀는데,
注+⑦ 其餘鎭軍 數且四十:開元 때에 천하의 節度使가 여덟이었는데, 하나는 關內․朔方節度使이고, 둘째는 河東節度使이고, 셋째는 河北․幽州節度使이고, 넷째는 河西節度使이고, 다섯째는 隴右節度使이고, 여섯째는 劍南節度使이고, 일곱째는 嶺西節度使이고, 여덟째는 嶺南節度使이다. 이후로 武夫와 戰卒이 군대에서 공을 세워 侯王이 된 자들은 모두 절도사에 제수되었다. 때문에 德宗朝에 이르러서는 그 수가 거의 40이나 되었으니, 이는 開元 연간의 3배였다. 이들 모두
특조特詔를 받들어 위임받았으며 각각
를 내려보내
감군監軍케 하니, 사람마다 비등한 형국이어서 서로 간에 통속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매번 변방의 급보가 이르기를 기다린 후에야 그제야 용병用兵의 방도를 계획할 것을 명령하지만, 이마저도 군법을 내리지 못하고 오직 객례客禮로 서로를 대합니다.
이는 바로 느긋이 물에 빠진 자를 건져 내고 예를 차리면서 불을 끄는 것이니, 위험이 없게 하고자 하여도 진실로 또한 어려울 것입니다.
무릇 군대는 기세氣勢를 가지고 운용하는 것이니, 기氣가 모이면 성하게 되지만 흩어지면 쇠하며, 세勢가 합하면 위엄威嚴이 있게 되지만 나누어지면 약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변방의 방비는 세勢가 약하고 기氣가 사그라들었으니, 군대를 세움이 이와 같다면 장수가 많은 데에서 힘이 분산되었다고 할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