明勅涇隴邠寧하여 但令嚴備封守하고 仍云 更不徵發하여 使知各保安居하고
又降德音하여 勞徠畿甸하여 具言京輦之下는 百役殷繁하고 且又萬方會同하며 諸道朝奏라 䘏勤懷遠이 理合優容이니 其京城及畿縣所稅間架榷酒抽貫貸商點召等諸如此類를 一切停罷라하면
則冀已輸者가 弭怨하며 見處者이 獲寧하여 人心不搖하고 邦本自固하여 禍亂이 無從而作하며 朝廷이 由是益尊이니
然後에 可以度時宜하며 施敎令이라 弛張自我니 何有不從이리오
1-2-20 경주涇州, 농주隴州, 빈주邠州, 영주寧州에 분명하게 칙령을 내려 단지 봉강封疆을 엄히 방비하게만 하고 “다시 징발徵發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기 자기 지역을 지키면서 편안하게 거주할 줄 알게 하소서.
또한
덕음德音을 내려서
기내畿內를 위로하면서 “서울은 온갖 노역이 많고 또한
만방萬方의 사람들이 모두 모이며 여러 지역에서
조현朝見하러 오는 곳이므로 힘쓰는 자를 돌보고 멀리서 오는 자를 보살피는 것을 이치상 응당 관대하게 해야 하니,
경성京城 및
기내畿內의 고을에서 거두는
등 이와 같은 세금들을 일체 정지시키고 혁파한다.”고 말씀하소서.
이렇게 한다면 이미 낸 자들은 원망을 누그러뜨리고 현재 세금을 내야 할 자들은 편안함을 얻게 되어 인심은 흔들리지 않고 나라의 근본은 저절로 견고해져서 화란禍亂이 이에 따라 일어날 곳이 없게 될 것이며 조정은 이로 말미암아 더욱 존경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연후에 시의時宜를 헤아려 교령敎令을 내리므로 적절하게 늦추거나 당기는 방도가 나로부터 비롯하게 될 것이니, 어찌 따르지 않음이 있겠습니까.
근본을 바르게 하고 어지러움을 정리하는 일은 이것보다 쉬운 것이 없습니다. 삼가 아룁니다.
【평설評說】 건중建中 4년(783)에 지어진 이 글은 같은 해에 지어진 〈논양하급회서이해장論兩河及淮西利害狀〉과 비견되곤 한다. 즉, 〈논양하급회서이해장論兩河及淮西利害狀〉이 덕종德宗의 요구에 따라 작성한 글이고 이미 발생한 변란에 대한 처방을 밝힌 글이어서 즉각적으로 이해하기 용이한 반면, 이 글은 수도 장안長安이 있는 관중關中 지역의 문제를 육지陸贄 자신이 주동적으로 밝힌 글이고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사안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덕종도 육지의 충고를 채납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도 이 두 편의 글 가운데 〈논관중사의장論關中事宜狀〉을 더 자세히 인용하였고, 호삼성胡三省의 주注에서도 “요영언姚令言과 주자朱泚의 변란이 결국 육지가 헤아렸던 바와 같이 되었다.[姚令言朱泚之變 卒如陸贄所料]”(≪자치통감≫ 권228)고 하였다. 2,300자에 달하는 이 글은 주문을 작성하게 된 동기[狀由] 없이 곧장 의론에 돌입하는 소위 ‘벽공입론劈空立論’으로 시작되는데, 그 내용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가장 먼저 제기한 ‘중요한 것을 장악하여 가벼운 것을 통제하고[거중어경居重馭輕]’, ‘제하諸夏를 제어하고 융적戎狄을 진무하는[御夏鎭戎]’ 방법은 첫째 부분의 주요 내용이기도 하지만 글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기도 하다. 이어 둘째 부분에서는 당唐 태종太宗이 관중에 부위府衛를 설치하여 거중어경居重馭輕하였던 사실과 현종玄宗․숙종肅宗․대종代宗 3조朝에 걸쳐 거중어경居重馭輕에 실패했던 과거의 역사를 차례로 서술하고 있다. 이후 셋째 부분에서 융적과 번진의 형세를 날카롭게 분석하고, 넷째 부분에서 관중의 불안한 상황을 적시하며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육지가 강조한 ‘거중어경居重馭輕’의 방법은 이후 군정軍政의 폐단과 처방을 논하는 글에 빈번히 인용되었다. 남송南宋의 유문표俞文豹는 ≪취검록외집吹劍錄外集≫에서 “삼대三代와 진秦․한漢부터 아조我朝에 이르기까지 모두 무력으로 천하를 얻었으므로 군주들이 누구나 군사軍事를 경험하여 잘 알았고 거중어경居重馭輕의 형세를 깨우치고 있었으나 평안한 시절이 길어지다 보면 문文에 익숙해지고 무武를 잊게 된다.[故自三代秦漢 迄我朝 皆以兵得天下 人主皆親歷行陣 習知武事 知居重馭輕之勢 承平旣久 則習文忘武]”고 하였으며, 명明나라의 진자룡陳子龍도 〈의경병議京兵〉에서 “예로부터 제왕이 나라를 세움에 있어 거중어경居重馭輕하여 장구하게 유지하는 계책으로 삼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自古帝王之立國也 莫不欲居重馭輕 以爲長遠之計]”고 하였다. 조선에서도 조현명趙顯命이 〈균역혹문均役或問〉에서 금군禁軍의 규모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것을 주장하며 이것이 바로 “거중어경居重馭輕의 도를 깊이 얻는 것[深得居重馭輕之道]”이라고 한 바 있으며, 홍양호洪良浩와 강위姜瑋도 각각 〈논장연해방사계論長淵海防事啓〉와 〈의삼정구폐책擬三政捄弊策〉 등의 글을 통해 거중어경居重馭輕의 책략을 강조하였다. 거중어경居重馭輕의 논리가 무엇인지는 이현일李玄逸의 〈정설政說〉을 통해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즉 “차라리 그 향토鄕土의 풍속에 따라 각각 본군本軍에 예속시키는 것이 편리하지 않겠는가. 지금 기내畿內 열읍列邑의 군병이 2, 3만을 밑돌지 않으니, 번을 나누어 번갈아 교대하게 하고 다소多少에 절도가 있게 하여 갖가지 조용調用에 대비하게 한다면 무엇이 불가하기에 굳이 먼 지방 하읍下邑의 주리고 떠는 초췌한 군졸을 데려다 그 역役을 지게 한단 말인가. 어영청御營廳과 훈련도감訓鍊都監의 군졸도 먼 지방의 군병을 징발할 것 없이 기내의 여러 장수 휘하에 있는 군병 중에서 특히 용력과 재주가 뛰어난 자를 뽑아서 숫자를 채워 상번上番과 하번下番으로 나누어 숙위의 임무를 주고 각각 봉족奉足 2인을 차출하여 양식을 자비自備하게 한다면 점차 군대에 공급하는 적지 않은 비용을 줄이고 은연중에 인주人主가 병권을 장악하고서 국정을 제어하는 형세가 있게 될 것이다.”(≪갈암선생문집葛庵先生文集≫ 〈별집別集〉 권3)고 한 것은 육지가 “경주涇州, 농주隴州, 빈주邠州, 영주寧州에 분명하게 칙령을 내려 단지 봉강封疆을 엄히 방비하게만 하고 ‘다시 징발徵發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기 자기 지역을 지키면서 편안하게 거주할 줄 알게 하라.”고 한 내용과 다를 바 없다. 또 “각 포浦와 각 진鎭의 군대들이 불러들여 검열하고 훈련하며 무마해서 급할 때 쓰는 것을 대비하는 데에는 힘쓰지 않고 오직 방군防軍의 수역戍役 값만을 독촉하여 권귀權貴들에게 바치고 자기의 사욕을 채우는 재물로 삼고 있다. 또 그중에 3분의 1을 덜어내서 잠시 객사客使를 고용하여 응점應點하는 것 외에는 장교 한 명 병졸 한 명도 배를 다루어 변란에 대비하는 자가 없으니, 아, 군정의 파탄과 엉성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갈암선생문집葛庵先生文集≫ 〈별집別集〉 권3)라고 통탄하였는데, 이는 육지가 “근래 장수들이 토벌하러 가서 오래도록 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진실로 이를 빌미삼아 증원을 요청하였기 때문에 폐하께서 이를 위해 변방 군대를 철수시키고 궁성의 호위군을 부족하게 하였으며, 내구內廐의 말까지 비게 하고 무고武庫의 병기까지 동나게 하였으며, 장수 집안의 자제들을 뽑아 군병에 보태고 사가私家에서 기른 가축까지 징발하여 기병을 늘리셨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싸우지 않고 재용財用이 부족하다고 하자, 폐하께서 또한 이를 위하여 가옥의 크기에 따라 세금을 매기고 상인에게 돈을 빌리며, 사부司府의 재물까지 남김없이 동원하고 각고榷酤까지 만들어 시행하셨으니, 근기近畿에도 징발이 이미 몹시 심하고, 궁성의 경비도 온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라고 한 대목과 그 맥락이 통한다. 앞서 〈논양하급회서이해장論兩河及淮西利害狀〉의 평설에서 소개한 바 있듯이 성해응成海應은 〈논관중사의장論關中事宜狀〉에 대해서도 일단의 논평을 가했다. 그는 육지가 관중의 형세에 관해 논한 글이 매우 간절하고 그림으로 표현한 듯 분명하지만 양하兩河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부세賦稅가 번중繁重해 인심人心이 요동치던 시기에 국가가 혼란한 상황에 빠지리란 것은 필연의 이치였다고 하여 외환이 아니라 내란에서 원인을 찾는 한편, 용인用人에 어둡고 군사를 통제하는 데 우매한 반면 세금 거두어들이는 일에는 탐욕스러웠던 덕종의 과실을 지적하였다.(≪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독육선공주의讀陸宣公奏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