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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陸宣公奏議(1)

당육선공주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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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육선공주의(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宋나라 蘇軾 撰
元祐八年五月七日 蘇軾 同呂希哲吳安詩豐稷趙彦若范祖禹顧臨劄子奏하나이다
臣等猥以空疎 備員講讀이나 恭惟聖明하사 學問日新이니이다
臣等 才有限而道無窮하고 心欲言而口不逮하니 以此自愧하여 莫知所爲이니이다
竊謂人臣之納忠 譬如醫者之用藥이라 藥雖進於醫手 方多傳於古人이니 若已經效於世間이어든 不必皆從於己出이니이다
伏見唐宰相陸贄 才本王佐하고 學爲帝師
論深切於事情하고 言不離於道德이요 智如子房而文則過하고 辯如賈誼而術不疎하니 上以格君心之非하고 下以通天下之志
但其不幸仕不遇時 德宗以苛刻爲能이나 而贄諫之以忠厚 德宗以猜疑爲術이나 而贄勸之以推誠하며
德宗好用兵이나 而贄以消兵爲先이요 德宗好聚財 而贄以散財爲急이라
至於用人聽言之法 治邊馭將之方하얀 罪己以收人心하고 改過以應天道하며 去小人以除民患하고 惜名器以待有功하니 如此之流 未易悉數
可謂進苦口之藥石하고 鍼害身之膏肓이니 使德宗盡用其言이어든 則貞觀可得而復이니이다
臣等每退自西閤하면 卽私相告言하여 以陛下聖明 必喜贄議論하시니 但使聖賢之相契 卽如臣主之同時라하니이다
昔馮唐 論頗牧之賢하니 則漢文爲之太息하고 魏相 條晁董之對하니 則孝宣以致中興이니 若陛下能自得師어시든 莫若近取諸贄니이다
夫六經三史諸子百家 非無可觀하니 皆足爲治 但聖言幽遠하고 末學支離하여 譬如山海之崇深하여 難以一二而推擇이라
如贄之論 開卷了然하여 聚古今之精英하고 實治亂之龜鑑이라
臣等欲取其奏議하여 稍加校正하여 繕寫進呈하노니 願陛下 置之坐隅하사 如見贄面하고 反復熟讀하사 如與贄言하시면 必能發聖性之高明하사 成治功於歲月이리이다 臣等不勝區區之意하노이다 取進止하소서


송조宋朝명신名臣들이 육지陸贄주의奏議를 올리는 차자劄子
원우元祐 8년(1093) 5월 7일, 과 함께 차자劄子를 갖추어 아룁니다.
등은 외람되이 공소한 재능으로 강독講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나, 삼가 생각건대 폐하의 성명聖明하심은 하늘이 내린 것이어서 학문이 날로 새로워지십니다.
등의 재주는 한계가 있는데 도는 무궁하고, 마음에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도 구변이 이에 미치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스스로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인신人臣이 충성스러운 말씀을 올리는 것은 비유하면 의원이 약을 쓰는 것과 같아서, 약은 비록 의원의 손에 의해 올려지지만 그 처방은 대부분 옛사람에게서 전해진 것이므로 만일 이미 세간에서 효험이 입증된 것이라면 굳이 다 자기에게서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삼가 보건대, 나라의 재상 육지陸贄는 재주가 본래 제왕을 보좌할 만하고 학문은 황제의 스승이 될 만하였습니다.
의논은 사정에 매우 간절하고 말은 도덕을 떠나지 아니하며, 지혜는 과 같지만 문장은 그보다 뛰어나고, 위로는 군주 마음의 잘못을 바로잡고 아래로는 천하 사람들의 뜻에 통하였습니다.
다만 불행히도 벼슬한 것이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덕종德宗은 가혹하고 각박한 것을 능사로 삼았는데 육지陸贄충후忠厚함으로써 간하였고, 덕종은 남을 시기하고 의심하는 것을 방법으로 여겼는데 육지는 정성을 다하여 사람을 대할 것을 권하였으며,
덕종은 용병用兵을 좋아했는데 육지는 전쟁을 그치는 것을 우선하였고, 덕종은 재물 모으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육지는 재물을 흩어 백성을 구휼하는 것을 급하게 여겼습니다.
인재를 등용하고 남의 좋은 말을 경청하는 방법과 변경을 다스리고 장수를 통제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자신을 책망하여 인심을 수습하고 잘못을 고쳐서 천도天道에 응하며 소인을 제거하여 백성들의 폐해를 제거하고 관직을 소중히 여겨서 공적이 있는 이를 대우하였으니, 이와 같은 일은 쉽게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는 라고 이를 만하니, 만일 덕종이 그의 말을 다 따랐더라면 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등은 매번 에서 물러나오면 곧바로 사사로이 말하기를 ‘폐하처럼 성명聖明하신 군주는 반드시 육지陸贄의 의논을 좋게 여기실 것이니, 오직 성스러운 군주와 어진 정승이 서로 의기가 투합하는 것을 곧바로 신하와 군주가 동시대에 만난 것처럼 하여야 한다.’라고 하곤 하였습니다.
옛날 대책문對策文을 조목조목 아뢰자 효선제孝宣帝가 이로써 중흥을 이룩하였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스스로 스승을 얻으려 하신다면 가까이 육지에게서 취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육경六經제자백가諸子百家는 볼만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모두 충분히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다만 성인의 말씀은 아득히 멀고 말학末學은 보잘것없어서, 비유하면 산과 바다가 높고 깊어서 하나하나 미루어 가리기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육지陸贄의 의논과 같은 것은 책을 펴놓으면 내용이 분명해서 고금古今정영精英을 모아놓았으며 치란治亂의 귀감이 될 만한 내용이 가득합니다.
등은 이 주의奏議를 가져다가 약간 교정校正을 가하여 정서淨書해서 올리고자 하오니, 원컨대 폐하께서 거처하시는 자리 주변에 이것을 두시고 마치 육지의 얼굴을 보는 듯이 여기시며 반복하여 익숙히 읽어서 육지와 함께 말씀하시는 것처럼 여기신다면, 반드시 성상의 고명한 재주를 개발해서 머지않은 때에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는 공적을 이룩하실 것입니다. 등은 간절한 뜻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재량裁量하소서.


역주
역주1 宋朝名臣進奏議劄子 : 원제는 〈乞校正陸贄奏議進御箚子〉이다. 朝鮮 壬辰字本과 戊申字本에는 위의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朝鮮 成宗 5년(1474) 간행된 목판본에는 〈本朝名臣進奏議劄子〉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역주2 蘇軾 : 1037~1101. 宋나라 神宗에서 哲宗 때까지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王安石의 新法에 반대하여 수차례 유배되었으며, 문장에 능하여 〈赤壁賦〉 등 명작을 남겼다.
역주3 呂希哲 : 呂公著의 아들로, 字는 原明, 壽州(지금의 安徽省 鳳臺) 사람이며, 滎陽先生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焦千之․孫復․石介․胡瑗 등에게 배웠으며, 張載․程顥․程頤․王安石 등과 교유하며 견문을 넓혔다. 科舉에 종사하지 말라는 왕안석의 권유를 받아들였다가 음직으로 벼슬, 兵部員外郞에 올랐으며, 范祖禹의 추천으로 崇政殿說書가 되어 哲宗에게 修身을 근본으로 삼을 것을 권했다. 崇寧의 黨禍로 奪職된 뒤 강학 활동으로 여생을 보냈으며, 저서에 ≪呂氏雜志≫․≪滎陽公說≫ 등이 전한다.(≪宋史≫ 권346 〈呂希哲傳〉)
역주4 吳安詩 : 字는 傳正이며, 建安 사람이다. 음직으로 朝散大夫가 된 후 禮部員外郞을 거쳐 右司諫에 이르렀으며, 蔡確․蔡京ㆍ章惇 등을 탄핵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元祐黨人傳≫ 권4 〈吳安詩傳〉)
역주5 豐稷 : 字는 相之, 시호는 清敏, 明州 鄞縣(지금의 浙江省 寧波) 사람이다. 嘉祐 4년(1059) 進士로, 監察禦史․國子祭酒․吏部侍郞․禦史中丞이 되었으며, 蔡京을 탄핵한 이후 工部尙書兼侍讀에 임명되었으나 蔡京이 복귀한 뒤 道州別駕로 폄직되고 建州로 귀양 가서 죽었다. “맑기가 물 같고 공평하기가 저울 같다.[清如水 平如衡]”는 칭송을 받았으며, 博學多聞하고 經學에 밝았다.(≪宋史≫ 권321 〈豐稷傳〉)
역주6 趙彦若 : 宋나라 皇室 宗親인 趙師民의 아들로, 青州 臨淄(지금의 山東省 淄博) 사람이다. 음직으로 벼슬에 올라 秘閣校勘․集賢校理․國史編修官․起居注․中書舍人 등을 거쳐 秘書監․兵部侍郞․刑部侍郞에 배수되었다. 翰林學士로서 范祖禹․黃庭堅 등과 ≪神宗實錄≫을 편수하였다. 哲宗 紹聖 원년(1094), 元祐黨人으로 지목되어 安遠軍節度副使로 폄직되었다가 澧州에 위리안치되어 그곳에서 죽었다.(≪東都事略≫ 권60 〈趙師民傳〉)
역주7 范祖禹 : 자는 純父ㆍ純甫ㆍ夢得, 호는 華陽先生, 시호는 正獻이다. 司馬光을 따라서 ≪資治通鑑≫을 편수하였으며, 편수를 마친 뒤에 秘書正字가 되었다. 宣仁太后가 죽은 뒤에는 그 틈을 타서 소인배들이 득세할까 염려하여 여러 차례 諫言을 올렸다. 그 뒤 章惇을 재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내용으로 극언하였다가 외직으로 쫓겨나 죽었다. 평상시에는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나, 일을 만나서 시비를 판별할 때에는 아주 엄격하게 하였으며, 邇英殿에서 講學할 적에는 바른 도리를 지키고 正論에 의거하여 진언한 것이 많았는데, 말은 간략하면서도 뜻은 아주 명백하였으므로 蘇軾이 講官 가운데 제일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唐鑑≫ 12권, ≪帝學≫ 8권, ≪仁宗政典≫ 6권을 지어 올렸는데, 특히 ≪당감≫에서 唐나라 3백 년의 치란을 궁구했다 하여, ‘唐鑑公’으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宋史≫ 권337 〈范鎭傳〉)
역주8 顧臨 : 字는 子敦, 會稽(지금의 浙江省 紹興) 사람이다. 國子監直講․同知禮院에 임명되어 ≪武經要略≫을 지었다. 刑部․兵部․吏部 三部의 侍郞兼侍讀을 지냈으며, 龍圖閣學士를 거쳐 定州․應天․河南府使 등을 지냈다. 經學과 訓詁學에 뛰어났다.(≪宋史≫ 권344 〈顧臨傳〉)
역주9 天縱 : 성현이 될 수 있는 천부적인 자질을 말한다. ≪論語≫ 〈子罕〉에 공자의 제자 子貢이 “우리 선생님은 실로 하늘이 이 세상에 내려 성인이 되게끔 하신 분이다.[固天縱之將聖]”라고 말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역주10 子房 : 張良의 字이다. 秦나라 말기에 漢나라 高祖 劉邦을 도와 秦나라를 격파하고 楚나라 霸王인 項羽와 垓下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漢나라를 일으키고 蕭何, 韓信과 開國三傑에 올라 지혜가 높기로 유명하였으나 그가 남긴 문장은 전하지 않는다.
역주11 언변은……않아서 : 賈誼는 漢나라 文帝 때의 학자이며 정치가로 문장과 변설이 뛰어났으나 너무 급진적이어서 훈구파들에게 배척당하고 울분으로 일찍 죽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내용들은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평가되고 있다.
역주12 입에……치료했다 : 藥石은 약과 돌침으로 각종의 약과 치료법을 이르는데, 통칭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고 한다. 膏는 명치 끝, 肓은 심장과 청경맥 사이로 膏肓은 약효가 미칠 수 없는 부분을 말한다.
역주13 貞觀의 정치 : 貞觀은 唐나라 太宗의 年號(627~649)로, 이 기간은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들이 부유하여 태평성대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역주14 西閤 : 서쪽 끝에 있는 궁전으로 端明殿을 가리킨다. 당시에 蘇軾이 端明殿學士 兼翰林侍讀學士로 있었다.
역주15 馮唐이……탄식하였고 : 馮唐은 漢나라 文帝 때의 郞官이었으며, 廉頗와 李牧으로 戰國時代 趙나라의 명장들이다. 文帝가 匈奴의 침략 때문에 명장을 얻고자 하면서 조나라 장수 李齊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자 馮唐은 “이제도 전국시대의 명장인 염파와 이목만은 못합니다.”라고 하니, 문제는 깊이 탄복하였다.
역주16 魏相 : 前漢의 정치가로 丞相에 오르고 高平侯에 봉해졌다. 茂陵令․河南太守 등으로 재직할 때 權貴를 두려워하지 않고 치죄함으로써 명성을 얻어 諫議大夫에 임명되었다. 外戚을 억제하여 국정을 안정시키는 데 공헌했으며 宣帝에게 황권을 위협하는 霍禹․霍雲․霍山 등을 제거하도록 강력히 건의하였다. 현량한 인재를 선발하고 옥사를 공평히 처리하였으며, 지방의 재정을 절약하고 세금을 줄이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기근을 해결하였다. 병법에도 밝아 서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역주17 晁錯 : 前漢 초의 정치가이자 문학가다. 文帝 때 太常掌故․太子舍人․博士 등을 역임하고 景帝 때 內史․御史大夫를 지냈다. 重農抑商 정책을 주장하였으며, 匈奴의 침입을 막고자 변경으로 농민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폈다. 제후들을 견제하고 중앙집권을 공고히 할 것을 進言하여 吳王 劉濞 등 7국의 제후왕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했으며, 이로 인해 東市에서 腰斬을 당하였다. 주의문에 뛰어나 〈言兵事疏〉․〈守邊勸農疏〉․〈論貴粟疏〉․〈賢良對策〉 등의 政論文을 남겼는데 높게 평해진다.
역주18 董仲舒 : 前漢 때의 유학자로, 武帝가 인재를 구하고자 할 때 ‘賢良對策’을 올려 크게 인정받았다. 중국 전통의 음양사상과 유교사상을 통합하여 정치에 적용했는데, ‘사람은 하늘에 근본하여 만들어졌다’는 ‘天人感應說’을 주장하여, 天에 인격성을 부여함으로써 후대의 중국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유가사상이 국가 경영의 핵심이 되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저서로 ≪董子文集≫과 ≪春秋繁露≫가 있다.
역주19 三史 : ≪史記≫, ≪漢書≫, ≪後漢書≫를 이른다.

당육선공주의(1) 책은 2023.01.1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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