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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陸宣公奏議(2)

당육선공주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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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육선공주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今者 窮邊之地 長鎭之兵 皆百戰傷夷之餘 終年勤苦之劇이라
角其所能則練習하고 度其所處則孤危하며 考其服役則勞하고 察其臨敵則勇하나
然衣糧所給 唯止當身일새 例爲妻子所分하여 常有凍餒之色하고
而關東戍卒 歲月踐更하여 不安危城하며 不習戎備하여 怯於應敵하고 懈於服勞하나
然衣糧所頒 厚踰數等하고 繼以茶藥之饋하며 益以蔬醬之資하야 豐約相形 懸絕斯甚하고
又有素非禁旅 本是邊軍이어늘 將校詭爲媚詞하면 因請遙隷神策하니
不離舊所하고 唯改虛名하여 其於廩賜之饒 遂有三倍之益注+① 時邊兵衣糧多不贍, 而戍卒屯防, 藥茗蔬醬之給最厚. 諸將務爲詭辭, 請遙隷神策軍, 廩賜遂贏舊三倍, 繇是塞上往往稱神策行營, 皆內統於中人矣. 事見兵志.하니
此則儔類所以忿恨이며 忠良所以憂嗟 疲人所以流亡이며 經費所以褊匱니이다 夫事業未異호되 而給養有殊하면 人情不能甘也어든
況乎矯佞行而廩賜厚하고 績藝劣而衣食優하니 苟未忘懷인댄 孰能無慍이리오
不爲戎首注+② 左傳 “毋爲戎首, 不亦善乎.” 則已可嘉어든 而欲使其協力同心하여 以攘寇難이면 雖有韓白孫吳之將이라도 臣知其必不能焉하노니 養士若斯하니 可謂怨生於不均矣


9-1-24 그런데 지금 궁벽한 변방의 땅과 그곳에 장기간 주둔한 병사들은 모두 계속되는 전쟁에서 부상을 모면한 사람이고, 일 년 내내 극도로 고생하는 곳입니다.
그들의 능력을 따져보자면 단련되어 있고, 그들의 처지를 헤아려보자면 외롭고 위태로우며, 그들이 하는 일을 생각해보면 수고롭고, 그들이 적을 상대하는 것을 살펴보면 용맹합니다.
그러나 의복과 양식을 지급하는 것이 오직 그 자신에게만 그칠 뿐이어서 으레 처자식에게 나누어 주다 보니 항상 춥고 배고픈 기색이 있습니다.
그러나 관동關東의 수졸은 때가 되면 교체되어서, 위험한 을 불안히 여기고 군무를 익히지 못하여 적에게 맞서기를 두려워하고 수고로운 일을 게을리 합니다.
그런데도 의복과 양식을 지급하는 것이 정해진 등급을 훨씬 넘어서며, 게다가 차와 약과 같은 물품을 이어주고 채소와 장유醬油의 비용까지 더해주어서, 그 지급하는 물품의 많고 적음이 서로 다른 것이 이처럼 매우 현격합니다.
또 본디 금군이 아니라 애당초 변군邊軍인데, 장교將校들이 거짓으로 아첨하는 말을 올려서 신책군神策軍되기를 청하니,
옛 지역을 떠나지 않고 오직 허위로 이름만 고쳐서 그들에게 지급하고 하사하는 물품이 풍부하여 마침내 3배나 많은 경우도 있습니다.注+① 素非禁旅……遂有三倍之益:당시 변방 병사의 의복과 양식이 대부분 넉넉지 못하였으나 〈관동에서〉 屯防하기 위해 온 수졸들은 약과 차, 채소와 장유의 보급이 가장 후하였다. 諸將들은 허위로 글을 짓기를 힘써서 神策軍에 遙隷되기를 청하여, 廩賜가 마침내 이전의 3배나 많았다. 이로 인해 변방에서는 종종 ‘神策軍의 行營’이라고 칭하니, 모두 안으로 中人(환관)에게 통솔되었다. 이 일은 ≪新唐書≫ 〈兵志〉에 보인다.
이는 바로 동배同輩들이 화내는 이유이고 충량한 사람들이 근심하며 탄식하는 까닭이며, 지친 사람들이 달아나게 되는 배경이요 경비가 부족해지는 원인입니다. 하는 일이 다르지 않은데 그 지급하고 부양하는 것이 다르다면, 인정상 감수할 수 없는 것입니다.
淮陰侯淮陰侯
하물며 거짓과 아첨을 행하여 지급하고 하사하는 물품이 많고 공적과 기예가 졸렬한데도 의식衣食이 넉넉하니, 진실로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모를까 어찌 분노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전란의 주동자가 되지 않기만 해도注+② 不爲戎首: 이미 칭찬할 만한데, 그들에게 힘을 합하고 마음을 하나로 하여 구난寇難을 몰아내게 한다면 비록 와 같은 장수가 있더라도 은 결코 이를 할 수 없음을 압니다. 군사를 양성하는 방법이 이와 같으니, 균평하지 못한 데서 원망이 생긴다고 할 만합니다.


역주
역주1 遙隷 : 실제 그 지역에 근무하지는 않지만 편제상으로는 해당 부대에 예속되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역주2 韓信 : 前漢 초기 淮陰 사람이다. 처음엔 項梁과 項羽를 따랐지만 중용되지 못했다. 漢王 劉邦에게 망명하여 蕭何의 추천으로 大將軍에 올랐다. 유방에게 천하를 도모할 것을 건의하고, 군대를 이끌고 魏와 代를 격파한 뒤 燕을 함락시키고 齊를 취했다. 이어 유방과 함께 垓下에서 항우를 포위해 죽였다. 후에 모반죄로 劉邦에게 숙청당하였다.(≪史記≫ 〈淮陰侯列傳〉)
역주3 白起 : ?~B.C. 257. 戰國時代 秦나라의 명장이다. 秦 昭王 47년(B.C. 260)에 趙나라의 長平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속임수를 써서 항복한 조나라의 군사 40여만 명을 묻어 죽였다. 그 뒤 소왕 50년에 조나라의 邯鄲을 공격할 때 백기는 이 전쟁이 실패할 것을 알고 병을 핑계로 출정하지 않았는데, 결국 이 전쟁이 실패로 돌아가자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재상 范睢의 무고로 그 책임을 뒤집어쓰고 자결을 강요받아 죽었다.(≪史記≫ 〈白起列傳〉)
역주4 孫武 : 春秋時代 齊나라 樂安 출신이다. 吳나라에서 활동하여 오왕의 패업을 도운 병법가로, ≪孫子≫의 저자이기도 하다. 吳王 闔閭에게 능력을 시험받을 때, 부녀자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말을 듣지 않는 자를 가차 없이 참수하여 엄정한 기강을 세운 일이 유명하다.(≪史記≫ 〈孫子吳起列傳〉)
역주5 吳起 : 春秋時代 衛나라 사람으로 魯나라에 가서 曾子에게 배웠는데, 용병에 능하였다. 齊나라 군사가 노나라에 쳐들어왔을 때 제나라 여자인 자기 아내를 죽이고 노나라의 장수가 되었다. 싸움에는 이겼지만 오히려 아내를 죽인 것 때문에 비난을 받자 魏나라로 달아났다가 모함을 받자 재차 楚나라로 달아났다. 재상으로 있으면서 법령을 분명하게 하고 쓸데없는 관리를 감원했을 뿐만 아니라, 소원한 公族을 없애면서 전투병을 양성해 강병으로 키웠다. 남쪽으로 百越을 평정하고, 북쪽으로 陳나라와 蔡나라를 병합했으며, 三晉을 물리치고, 서쪽으로 秦나라를 정벌하는 등 나라의 위세가 날로 강성해졌다. 그러나 悼王이 죽자 宗室과 대신들에게 살해당하였다.(≪史記≫ 〈孫子吳起列傳〉)
역주6 春秋左氏傳에……하였다 : 이 말은 ≪禮記≫ 〈檀弓 下〉에 나오는 말로, 죽은 군주를 위해 反服하는 예에 관해 繆公과 子思가 나눈 대화에 보인다. ≪春秋左氏傳≫의 말이라고 한 것은 착오인 듯하다.

당육선공주의(2) 책은 2023.01.1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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