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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陸宣公奏議(1)

당육선공주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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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육선공주의(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伏以爵位者 天下之公器而國之大柄也 唯功勳才德 所宜處之 非此二途 不在賞典일새 恒宜愼惜이요 理不可輕이라
輕用之 則是 壞其公器而失其大柄也 器壞則人將不重이요 柄失則國無所持 起端雖微 流弊必大니이다
緣路所獻瓜果 蓋是野人微情이라 有之라도 不足光聖猷이요 無之라도 不足虧至化 量以錢帛爲賜라도 足彰行幸之恩이라
饋獻酬官 恐非令典이로소이다 謹奏


4-7-2 삼가 아룁니다. 작위爵位라는 것은 천하의 공기公器이자 국가의 대병大柄입니다. 오로지 공훈功勳재덕才德이 마땅한 경우에 처하는 것이니, 이 두 가지가 아니라면 상전賞典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항상 신중히 하고 아껴서 도리상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가볍게 등용하면 이는 공기公器를 무너뜨리고 대병大柄을 잃는 것이니, 공기公器가 무너지면 사람들이 장차 존중하지 않을 것이요, 대병大柄을 잃게 되면 국가의 의지할 바가 없게 될 것이니, 발단은 비록 작지만 폐단은 필시 클 것입니다.
연로沿路에서 오이와 과실을 진상한 것은 농부의 미미한 정성이므로 그런 일이 있다 해도 성상의 교화敎化를 빛낼 수가 없고, 그런 일이 없다 해도 지극한 교화를 훼손시킬 수 없기에, 헤아려서 전백錢帛을 하사하더라도 행행行幸의 은혜를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물품을 헌상하였다고 관직으로 보답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닐 듯합니다. 삼가 아룁니다.
평설評說건중建中 4년(783) 주자朱泚의 난 때 덕종德宗봉천奉天에서 포위되었는데, 주자의 군대를 격파한 것이 바로 이회광李懷光이다. 그러나 노기盧杞조찬趙贊 등의 참소로 덕종은 이회광이 봉천奉天으로 들어와 알현하지 못하게 하고 장안에 있는 주자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회광은 주자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덕종은 다시 양주梁州로 파천하게 된다. 도중에 어떤 백성이 과과瓜果, 즉 오이와 과일을 바친 일이 있었는데, 덕종이 그들을 관직에 주의注擬하게 하려고 하여 육지陸贄에게 물으니, 육지가 관직이 가볍고 법을 베풂이 드묾을 들어 그것이 옳지 못하다고 상주上奏하였다. ≪정조실록正祖實錄≫에 보면, 정조正祖 원년(정유, 1777) 7월 23일(병술)에 소대召對하여 ≪사기평림史記評林≫을 할 때, 곡식을 바치면 관직에 보임補任한 일에 이르러 시독관侍讀官 이재학李在學은 육지의 뜻을 차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관작官爵은 국가에서 신중하게 여겨야 하는 바인 것인데 지금 곡식을 바치면 관직을 보임하게 했으니, 오히려 어찌 ‘관직을 위해서 적임자를 가린다.[위관택인爲官擇人]’고 논할 수 있겠습니까. 당나라 덕종이 오이와 과일을 바친 사람에 대해 관직에 주의注擬하도록 하자, 육지의 간언이 두세 차례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과일을 바치는 정성도 없는 것인데, 단지 곡식을 바치게 하고서 관직을 보임했으니, 이는 바로 매관매직賣官賣職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재학은 조선에서 흉년에 납속첩納粟帖을 발부하는 문제에 대하여 논하였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흉년을 만나게 되면 이른바 납속첩이란 것이 외방 고을에 두루 유행되므로, 약간 몇 섬[] 거리의 곡식이 있는 사람이면 문득 금관자金貫子옥관자玉貫子품계品階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비록 관작官爵과 차이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미 가자加資란 명칭이 있었고 보면 나라 때의 입속보관入粟補官과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습니다. 잡기雜技의 무리들에 있어서도 한번 국가에 공로를 바치게 되면, 작게는 변장邊將을 제수하고 크게는 수령守令을 삼아, 그 사람이 합당한지 않은지는 묻지도 않고서 민생을 다스리는 관직을 주었으니, 신중하게 가려야 하는 정사政事에 있어서 결함이 있게 된 일입니다.” 이재학은 ≪서경書經≫ 〈상서商書 중훼지고仲虺之誥〉의 “덕이 많은 자에게는 관직을 성대하게 내리고, 공이 많은 자에게는 상을 성대하게 내린다.[德懋懋官 功懋懋賞]”라는 말을 인용하여, 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어야 하고 벼슬시킬 수는 없는 것이므로 깊이 유의하기를 바란다고 건의하였다. 이에 정조는 “유신儒臣의 말이 옳다. 열성조列聖朝에 더러는 어용御容을 그린 화원畫員변장邊將으로 승전承傳하게 되자 삼사三司에서 논쟁하게 되었고, 더러는 환후患候평복平復된 때의 의관醫官에게 가자하는 전교를 내리자 옥당玉堂에서 말을 하게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융성한 시대의 고사故事이다.”라고 하였다.



당육선공주의(1) 책은 2023.01.1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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