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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陸宣公奏議(1)

당육선공주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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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육선공주의(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當勝而反敗하고 當安而倒危하며 變亡而爲存하고 化小而成大 在覆掌之間耳 何可不畏而重之乎
近事甚明이라 足以爲鑑이니 往歲爲天下所患하여 咸謂除之則可致昇平者 李正己李寶臣梁崇義田悅 是也注+① 藩鎭傳 “李正己, 高麗人, 本名懷玉, 代侯希逸爲節度使, 始賜今名. 遂有淄․靑․齊․海․登․萊․沂․密․德․十州, 與田承嗣․薛嵩․李寶臣․梁崇義輔牙相倚. 後又取曹․濮․徐․兗․鄆十有五州, 號最强大. 建中初, 聞城汴州, 乃約田悅․梁崇義․李惟岳偕叛, 會發疽死. 李寶臣, 本范陽內屬奚, 舊名忠志, 拜成德節度使, 賜姓及名. 於是遂有常․定․易․趙․深․冀六州地, 雄冠山東, 與薛嵩․田承嗣․李正己․梁崇義相姻嫁, 急熱爲表裏. 德宗立, 拜司空. 後服妖人藥, 卽瘖, 三日死. 梁崇義, 京兆長安人. 本事來瑱, 瑱誅, 衆立爲長, 代宗因拜襄陽節度使. 擧七州, 兵萬, 與田承嗣等相結. 德宗示以不疑, 加平章事. 後爲李希烈所敗, 乃赴井死. 田悅蚤孤, 田承嗣將死, 命悅知節度事, 俄檢校部尙書, 爲節度使. 德宗立, 悅因與梁崇義等阻兵連和, 復與朱滔․王武俊․李納自立爲王, 後爲從緖所刺.”
往歲爲國家所信하여 咸謂任之則可除禍亂者 朱滔李希烈 是也注+② 朱滔, 幽州人, 乃泚之弟. 泚入朝, 以滔權知留後. 李惟岳拒命, 滔與成德張孝忠再破之束鹿, 取深州. 進檢校司徒, 遂領節度, 賜德․棣二州. 李希烈, 燕州遼西人. 代宗命爲淮西留後. 德宗立, 卽拜節度使. 梁崇義之反, 拜希烈爲諸軍都統, 平崇義功爲多.러니


1-2-13 승리하여야 마땅하나 도리어 패하고 편안하여야 마땅하나 거꾸로 위태로워지며, 망할 상황을 변화시켜 보존하며 작았던 것을 변화시켜 큰 것을 이루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사이에 있을 뿐이니, 어찌 두려워하고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근래의 일이 매우 자명하여 귀감으로 삼기에 충분하니 과거에 천하의 근심이 되어 모두들 그 무리들을 제거하면 태평함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겼던 자들로는 이정기李正己, 이보신李寶臣양숭의梁崇義전열田悅이 이들이었으며,注+① 李正己……田悅是也:≪新唐書≫ 〈藩鎭傳〉에 “李正己는 高句麗 사람이니 본명은 懷玉이다. 을 대신하여 節度使가 되어 비로소 지금의 이름을 하사받았다. 마침내 淄, 靑, 齊, 海, 登, 萊, 沂, 密, 德, 棣 10개 州를 소유하였으며 田承嗣, 薛嵩, 李寶臣, 梁崇義와 더불어 서로 의지하는 관계가 되었다. 뒤에 또 曹, 濮, 徐, 兗, 鄆 등 모두 15개 州를 취하여 가장 강대하다고 일컬어졌다. 建中 초에 곧 田悅, 梁崇義, 李惟岳과 함께 모반하기로 약속했지만 등창이 나서 죽었다.
李寶臣은 본래 范陽에 內屬된 奚族으로, 옛 이름은 忠志이며, 成德節度使에 배수되어 성과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에 마침내 常, 定, 易, 趙, 深, 冀 6개 州의 땅을 소유하고 山東에서 으뜸이 되었으며, 설숭, 전승사, 이정기, 양숭의와 더불어 서로 혼인하여 급속하게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德宗이 즉위함에 司空에 배수되었다. 뒤에 妖人의 약을 마시고는 곧장 벙어리가 되었다가 3일 만에 죽었다.
梁崇義는 京兆 長安 사람이다. 본래 을 섬기다가 내진이 죽임을 당하자 무리들이 우두머리로 옹립하니, 代宗이 襄陽節度使에 배수하였다. 7개 州를 차지하고 병사 2만을 거느렸으며 전승사 등과 더불어 결탁하였다. 덕종이 의심하지 않는다는 뜻을 보이고자 平章事를 가자하였다. 뒤에 李希烈에게 패하자 우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田悅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전승사가 죽을 때 전열에게 節度使의 일을 맡게 하였다. 檢校工部尙書로 잠시 있다가 절도사가 되었다. 덕종이 즉위하자 전열이 양숭의 등과 병력을 믿고 연합했다가 다시 朱滔, 王武俊, 李納과 더불어 스스로를 서서 왕이 되었는데, 뒤에 從姪인 田緖에게 살해되었다.”라고 하였다.
지난날 국가의 신임을 받아 모두들 그들에게 맡기면 화란禍亂을 없앨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들로는 주도朱滔, 이희열李希烈이 이들이었습니다.注+② 朱滔李希烈是也:朱滔는 幽州 사람으로, 朱泚의 동생이다. 주자가 入朝하게 되자 주도를 임시 留後로 삼았다. 李惟岳이 항명하자, 주도가 成德節度使 張孝忠과 이유악을 束鹿에서 재차 격파하고 深州를 차지하였다. 주도는 檢校司徒가 되고 마침내 절도사가 되어 德州와 棣州 두 州를 하사받았다.
李希烈은 燕州 遼西 사람이다. 代宗이 淮西留後로 임명하였다. 德宗이 즉위하고 곧바로 節度使에 제수되었다. 梁崇義가 모반하자 이희열을 諸軍都統使로 임명하였는데, 양숭의를 평정할 때 많은 공을 세웠다.


역주
역주1 侯希逸 : 平盧(지금의 遼寧省 朝陽市) 출신이다. 平盧軍의 裨將으로 있을 때 安祿山의 반란에 가담한 徐歸道가 平盧節度使로 임명되자 安東都護 王玄志와 함께 그를 죽였다. 그 뒤 왕현지가 병사하자 병사들에 의해 추대되어 절도사가 되었으며, 반군의 공격을 여러 차례 막아냈다. 史朝義를 토벌한 공으로 檢校工部尙書에 임명되고 淮陽郡王에 봉해졌으나 점차 교만하고 방종하여 정사를 게을리 하고 불교에 빠졌다. 이에 불만을 품은 군민들에 의해 축출되자 조정으로 달아나 檢校右僕射 등의 관직을 지냈으며, 太保에 추증되었다.(≪舊唐書≫ 〈侯希逸傳〉)
역주2 汴州에……듣고 : 李正己가 長安과 가까운 鄆州로 근거지를 옮기자 조정에서 이에 대비하기 위해 開封에 성을 쌓은 일을 가리킨다. 번진의 세력을 두려워한 조정에서 번진을 억압하는 정책을 본격화하였다. 成德節度使 李寶臣이 죽은 뒤 그의 아들 李惟岳의 세습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 그 신호탄이었다. 이보신은 이정기의 아들 李納의 장인이었으며, 이정기 자신도 아들에게 물려주고자 했기 때문에,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李惟岳․田悅․梁崇義 등과 합세해 唐나라 조정에 압박을 가했다.
역주3 來瑱 : 邠州 永壽 사람이다. 四鎮節度使 來曜의 아들로 左贊善大夫․殿中侍禦史․潁川太守 등을 지냈다. 安史의 亂 때 여러 차례 반군을 격퇴해 반군에게 ‘來嚼鐵’이라고 불렸다. 上元 3년(762), 裴奰 등의 참소로 고초를 겪다가 代宗 즉위 이후 자신을 공격해온 배비를 도리어 붙잡아 대종에게 바치고 請罪함으로 인해 다시 관직을 회복하고 兵部尙書․同中書門下平章事 등을 지냈다. 그러나 程元振과 王仲昇의 참소로 인해 관직을 삭탈당하고 賜死되었다.(≪舊唐書≫ 〈來瑱傳〉)
역주4 (隷)[棣] : 저본에는 ‘隷’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 〈藩鎭淄靑橫海傳〉에 의거하여 ‘棣’로 바로잡았다.
역주5 (九)[凡] : 저본에는 ‘九’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 〈藩鎭淄靑橫海傳〉에 의거하여 ‘凡’으로 바로잡았다.
역주6 (三)[二] : 저본에는 ‘三’으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 〈叛臣傳〉에 의거하여 ‘二’로 바로잡았다.
역주7 (正)[工] : 저본에는 ‘正’으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 〈藩鎭魏博傳〉에 의거하여 ‘工’으로 바로잡았다.
역주8 (緖)[姪] : 저본에는 ‘緖’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 〈藩鎭魏博傳〉에 의거하여 ‘姪’로 바로잡았다.

당육선공주의(1) 책은 2023.01.1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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