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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陸宣公奏議(1)

당육선공주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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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육선공주의(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論兩河及淮西利害狀
內侍朱冀寧 奉宣聖旨호되 緣兩河寇賊 未平殄注+① 藩鎭傳 “德宗建中三年, 盧龍朱滔․魏博田悅․鎭冀王武俊․淄靑李納, 合從以叛. 滔自稱冀王, 悅稱魏王, 武俊稱趙王, 納稱齊王. 朝廷雖命馬燧等將兵討之, 猶未平殄.”하고 又淮西兇黨 攻逼襄城注+② 李希烈傳 “德宗立, 以希烈爲淮西節度使. 後希烈與河北朱滔․田悅等連和, 凶焰熾然. 建中四年, 上遣左龍武大將軍哥舒曜討之. 曜戰不利, 屯襄城, 希烈怙其壯, 擧衆三萬圍曜.”하니 識古知今이라 合有良策이니 宜具陳利害封進者하라


1. 양하兩河회서淮西의 이해를 논하는 주장奏狀
1-1-1 내시內侍 주기녕朱冀寧성지聖旨를 받들어 알리기를 “의 도적을 아직 진압하지 못하였는데,注+① 緣兩河寇賊 未平殄:≪舊唐書≫ 〈藩鎭傳〉에 “德宗 建中 3년(782) 盧龍節度使 魏博節度使 鎭冀使 淄靑節度使 이 합종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주도는 冀王이라 자칭하였고 전열은 魏王, 왕무준은 趙王, 이납은 齊王이라 칭하였다. 조정에서 비록 등에게 명하여 군사들을 이끌고 토벌하도록 하였지만 여전히 진압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회서淮西의 흉악한 역적의 무리가 양성襄城을 공격해 들어오고 있다.注+② 淮西兇黨 攻逼襄城:≪舊唐書≫ 〈李希烈傳〉에 “덕종이 즉위한 후 을 淮西節度使로 삼았다. 뒤에 이희열이 河北의 주도, 전열 등과 연합하여 흉한 기세가 맹렬하였다. 建中 4년(783) 상이 左龍武大將軍 를 파견하여 토벌케 하였다. 가서요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襄城에 주둔하였다. 이희열이 승기를 잡았음을 자신하여 병력 3만을 동원해 가서요를 포위하였다.”라고 하였다. 경은 고금古今의 일을 알고 있으므로 응당 좋은 책략이 있을 것이니, 이로움과 해로움에 대한 설명을 소상히 진술하여 봉하여 올리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역주
역주1 兩河 : 河南과 河北을 말한다.
역주2 朱滔 : 唐나라 幽州 昌平 사람으로 朱泚(주자)의 동생이다. 주자와 더불어 幽州盧龍節度使 李懷仙의 部將이 되었다가 朱希彩 등과 이회선을 살해했다. 나중에 주희채가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주자가 그 지역을 관할하자 주자를 설득해 入朝하게 하고, 자신이 절도사가 되었다. 建中 3년(782) 王武俊 등과 함께 반기를 들고 國名을 冀라 한 뒤 왕을 칭하였다. 주자가 전쟁에서 패하고 죽자 回紇의 병사를 이끌고 貝州를 공격했지만 왕무준과 李抱眞에게 패하고 幽州로 달아났다가 죽었다.(≪舊唐書≫ 〈朱滔傳〉, ≪新唐書≫ 〈藩鎮盧龍列傳〉)
역주3 田悅 : 751~784. 平州 盧龍(지금의 河北省 盧龍) 사람이다. 唐나라 중기 군벌로, 魏博節度使 田承嗣의 조카이다. 魏博中軍兵馬使로 있다가 전승사의 사후에 절도사를 계승하였다. 建中 2년(781) 成德 李惟岳, 淄靑 李納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얼마 되지 않아 패하였으나 朱滔와 王武俊의 원조로 세력을 회복하고 스스로 魏王이 되었다. 德宗이 군사를 보내 진압하였으나, 戰禍가 오래 끌었다. 전열은 왕호를 삭제하고 조정에 귀순하였다. 興元 원년(784), 조정은 전열에게 檢校尙書右僕射, 濟陽郡王을 내렸다. 조카 田緖가 발병하여 병란을 일으켜 전열을 살해하였다.(≪新唐書≫ 〈藩鎮魏博列傳〉)
역주4 王武俊 : 자는 元英, 시호는 忠烈로, 契丹 怒皆部 사람이다. 騎射에 능해 李寶臣의 裨將으로 있었는데, 이보신을 설득해 五州를 이끌고 조정에 귀순하게 한 후 御史中丞이 되어 維川郡王에 봉해졌다. 檢校秘書監 兼御史大夫에 발탁되고, 이후 恒冀觀察使를 지냈는데,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모반을 꾀했다가 여러 번 官軍에 패하자 왕을 참칭하고 국명을 趙라 했다. 나중에 李抱眞이 사람을 보내 설득하자 僞號를 버리고 투항하여 절도사를 지냈으며, 瑯邪郡王에 봉해졌다.(≪舊唐書≫ 〈王武俊傳〉, ≪新唐書≫ 〈藩鎮鎮冀列傳〉)
역주5 李納 : 唐나라에서 활동한 高句麗 유민 출신의 지방관이다. 부친 李正己는 765년 지금의 山東省 전역을 지배하는 平盧淄靑節度觀察使 兼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가 되었는데, 젊어서부터 부친을 도왔으며, 成德節度使 李寶臣의 딸과 혼인하여 절도사 간의 동맹체제를 굳히는 데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777년 부친이 治州를 靑州에서 鄆州로 옮김에 따라 靑州刺史로 임명되었고, 曹州刺史로 전임되었다가 부친 사망 후에 절도사의 자리를 계승하였다. 조정의 번진제압 정책에 대항하여 淮西節度使 李希烈과 손을 잡고 관군의 거점인 汴州를 공격하고 江淮의 조운선의 북상을 차단하는 등 통치기반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특히 소금․철․주석․견직물의 생산을 꾀하는 한편, 신라․발해와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서 꾸준히 경제력을 강화해갔다. 그 결과 그의 번진은 당시 여러 번진 중에서 최대의 강성을 자랑하였으며, 조정에 대해서는 거의 독립적인 태도를 취하여 마치 소왕국과 같은 존재로 군림하였다. 792년 사망 후 아들 李師古가 뒤를 이어 절도사가 되었다.(≪舊唐書≫ 〈李納傳〉)
역주6 馬燧 : 자는 洵美, 시호는 莊武로, 汝州 郟城 사람이다. 병법에 능했으며 지략이 뛰어났다. 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范陽留守 賈循에게 唐나라에 귀순할 것을 권했는데, 가순이 머뭇거리다가 피살당하자 달아났다. 大曆 연간에 여러 차례 李靈耀와 田悅을 격파했고, 河東節度使가 되었으며, 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된 뒤 北平郡公에 봉해졌다. 이후 李懷光을 평정한 공으로 光祿大夫로 옮겨 侍中을 겸했다. 德宗의 신임을 받았으나 吐蕃 공격에 실패한 후 파직되고 兵權을 박탈당한 뒤 司徒가 되어 시중을 겸했다. 당시 李晟, 渾瑊과 함께 ‘三大將’으로 일컬어졌다.(≪舊唐書≫ 〈馬燧傳〉, ≪新唐書≫ 〈馬燧傳〉)
역주7 李希烈 : 燕州 遼西 사람이다. 李忠臣의 裨將으로 있다가 이충신이 파직된 후 代宗의 명으로 後事를 처리하였으며, 德宗 때 節度使에 임명되었다. 李納이 반란을 일으키자 天下都元帥라 자칭하며 진압하러 갔다가 오히려 결탁하여 자칭 建興王이 되었다. 興元 원년(784) 汴州에서 칭제하고 楚를 세웠다. 나중에 劉洽에게 패해 달아났다. 소고기를 잘못 먹어 병에 걸렸는데, 부하 陳仙奇가 의원을 통해 준 독약을 먹고 죽었다.(≪舊唐書≫ 〈李希烈傳〉, ≪新唐書≫ 〈逆臣列傳 李希烈傳〉)
역주8 哥舒曜 : 자는 子明, 돌궐 施哥舒部 사람으로, 哥舒翰의 아들이다. 李光弼이 하북을 토벌할 때 도왔으며, 太淸을 항복시키고 宋州를 구하는 데 공을 세워 東都鎭守兵馬使가 되었다. 德宗이 즉위 후 龍武大將軍에 올랐으며, 李希烈이 반란을 일으키자 東都와 汝州의 行營節度使로 발탁되었다. 군대의 통솔에는 서툴렀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에는 무자비해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貞元 초에 鴻臚卿이 되었으며 光祿卿까지 올랐다.(≪舊唐書≫ 〈哥舒翰傳〉)

당육선공주의(1) 책은 2023.01.1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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