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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陸宣公奏議(1)

당육선공주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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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육선공주의(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何則 建中之難 其事可徵이니
始以蓄憾而隘於含容하고 或以亟勝而輕於戰伐이라
故文喜之討 涇上之瘡痛 未平注+① 朱泚傳云 “建中初, 以李懷光代段秀實兼節度涇原. 涇士聞懷光暴, 更相恟懼, 留後劉文喜因劫衆以叛. 詔懷光與朱泚討之. 其裨將劉海賓與其徒殺文喜.”하고 崇義之征 漢南之芟夷 繼甚注+② 叛臣傳 “梁崇義爲羽林射生, 事來瑱於襄陽. 瑱誅, 遂摠其軍. 代宗因就拜節度使. 擧七州兵二萬, 與田承嗣․李正己等相結, 遂拒詔不朝. 德宗命李希烈討之, 崇義兵大敗, 乃赴井死, 傳首京師.”하니
阻命之帥 非不誅也 伐叛之師 非不克也 介焉之斷 非不堅也 赫斯之怒 非不逞也언마는
然以人不見恤하고 惟戮是聞일새 有辜無辜 不敢自保하여
是以抱釁反側者 懼鈇鉞之次加하고 畏禍危疑者 慮猜譖之旋及하여 遂乃螽結以拒討하고 狼顧以背恩하여 彌兩河而亘淮夷하고
盪三輔而盜京邑할새 鑾輅 爲之再駕하고 行宮 至於合圍하니
于時 海內大搖하고 物情幾去하여 天命 莫保于寸晷하고 王威 不出於一城하니
邦國之杌陧艱屯 綿綿聯聯하여 若包桑綴旒하여 幸而不殊者 屢矣 勢之危窘 實足寒心이라


6-9-4 이는 어째서겠습니까. 건중建中의 난리에서 그 일을 징험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유감이 쌓여 너그럽게 포용하지 못하였고, 혹은 이기는 데 조급하여 전쟁하는 것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유문희劉文喜를 토벌함에
경원涇原장사將士들의 불만이 안정되지 못하였고注+① 文喜之討……未平:≪新唐書≫ 〈朱泚傳〉에 “建中 초에 李懷光으로 段秀實을 대신하여 涇原節度使를 겸하게 하였다. 涇原의 군사들은 이회광이 난폭하다는 소문을 듣고 서로 두려워하자, 留後 劉文喜가 이를 틈타 군중을 겁박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德宗은 이회광에게 조칙을 내려 朱泚와 함께 토벌하게 하였다. 그 裨將 劉海賓이 그 무리와 함께 유문희를 살해하였다.” 하였다. 양숭의梁崇義를 정벌함에 한수漢水 남쪽 지역에 대한 토벌이 계속 이어졌습니다.注+② 崇義之征……繼甚:≪新唐書≫ 〈叛臣傳〉에 “梁崇義는 羽林射生으로, 襄陽에서 來瑱을 섬겼다. 내진이 주살당하자 마침내 그 군사를 총괄하였다. 代宗은 이에 현지에서 그를 절도사에 임명하였다. 양숭의는 일곱 州의 병사 2만으로 거병하여, 田承嗣․李正己 등과 서로 결집하여 마침내 조칙을 거부하고 입조하지 않았다. 德宗이 李希烈에게 명령하여 그를 토벌하게 하자, 양숭의의 군사가 크게 패배하니, 양숭의는 마침내 우물에 투신하여 죽었고, 이희열은 그의 머리를 京師에 보냈다.” 하였다.
천자의 명을 거역한 장수將帥(유문희와 양숭의)를 주살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반란군을 정벌한 군사가 승리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결연한 판단이 확고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며, 폐하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았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구휼을 받지 못하고 오로지 살육의 소리만 들렸으므로 죄가 있든 죄가 없든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죄가 있는 불순한 자들은 부월鈇鉞이 차례로 가해질 것을 두려워하고, 화가 내릴까 두려워하여 불안해하는 자들은 시기와 참소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마침내 결집하여 토벌에 저항하고 이리가 돌아보듯이 두려워하며 은혜를 저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역적이 하남河南하북河北에 넘쳐나고 회이淮夷(회하淮河)에 뻗쳤습니다.
그리고 역적이 삼보三輔를 분탕질하고 경읍京邑을 도적질할 적에 어가가 두 번이나 이 때문에 파천하였고 행궁(봉천奉天)은 포위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때에 해내海內가 크게 동요하고 민심이 거의 떠나가서 천명天命은 촌음의 시각도 보장하지 못했고, 왕의 위엄이 한 밖으로 나가지를 못했습니다.
방국邦國과 어려움이 면면히 이어져서 마치 이나 와 같아서, 요행히 죽지 않은 것이 여러 번이었으니, 형세의 위태로움과 군색함이 실로 한심寒心할 만하였습니다.


역주
역주1 涇原의……이어졌습니다 : 德宗 建中 원년(780)에 原州에 성을 쌓고자 하여 李懷光에게 이를 감독하게 하였다. 이에 원주의 將士들이 성을 쌓는 데 불만을 품고 또 장수들은 이회광이 여러 장수들을 무고하게 죽인 것을 두려워하였는데, 劉文喜가 원주를 점거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朱泚와 이회광을 보내 평정하게 하였는데, 유문희가 항전하여 오랫동안 함락하지 못하였다. 유문희의 사신으로 온 劉海賓에게 덕종 이를 용서하지 않을 뜻을 보이자 유해빈이 돌아가 유문희를 죽였다. 그러나 덕종은 원주에 성을 쌓지 못하였다. 이러한 원주의 將士들의 불만은 783년 涇原의 변란으로 이어졌다.
梁崇義는 襄州를 거점으로 하던 藩鎭으로 비록 李正己 등의 藩鎭들과 연대하였지만 병사가 적고 세력이 약하여 조정에 예를 차렸다. 그러나 德宗의 入朝하라는 명령은 거절하였다. 이에 建中 2년(781)에 淮寧節度使 李希烈이 양숭의를 자신이 토벌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덕종이 이를 허락하였는데, 당시 대신이었던 楊炎이 양숭의가 없으면 이희열을 통제할 수 없다고 하여 이를 반대하였으나 덕종이 이를 강행하였다. 이희열이 양숭의를 토벌하고 양주를 크게 약탈한 뒤 돌아갔다. 이후 이희열이 양주를 계속 공격하자 덕종은 哥舒曜를 파견하여 가서요가 양주에 진주하였다. 이희열이 양주를 포위하게 되었고, 덕종이 가서요를 구원하기 위해 경원의 군대를 동원하였다가 변란을 당하게 된다. 이후 이희열은 양주를 함락시켰으며 이 지역의 전쟁이 계속 이어졌다.
역주2 혁연하게 : 원문의 ‘赫斯’를 풀이한 말이다. 赫斯는 王赫斯怒의 준말로, ≪孟子≫ 〈梁惠王 下〉에 “왕이 혁연하게 노하여 군대를 정비했다.[王赫斯怒 爰整其旅]”라는 ≪詩經≫ 〈皇矣〉의 말을 인용하면서, 周나라의 文王과 武王이 “한 번 노하여 천하의 백성들을 안정시켰다.[一怒而安天下之民]”라고 찬양한 말이 있다.
역주3 위태로움 : 원문의 ‘杌隉’을 풀이한 말이다. ≪書經≫ 〈周書 秦誓〉에 “나라의 위태로움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으며, 나라의 영광도 거의 한 사람의 경사이다.[邦之杌隉 曰由一人 邦之榮懷 亦尙一人之慶]”라고 하였다.
역주4 包桑 : ‘우북하게 자란 뽕나무 뿌리’라는 뜻으로, ‘苞桑’으로도 쓴다. ≪周易≫ 否卦 九五爻辭에 “혹시 망하지 않을까 늘 우려하여야 국가가 우북한 뽕나무에 매인 듯 편안하다.[其亡其亡 繫于苞桑]”라고 한 데서 유래하여, ‘국가가 안전함’을 의미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위 육지의 글에서는 단단해보이지만 언제 뽑힐지 모를 ‘위태로움’을 비유하고 있다. 明나라 楊愼도 ≪丹鉛總錄≫ 〈花木 包桑〉에서 “뽕나무 뿌리가 어떻게 단단한 물건일 수 있는가. 대개 옛사람들의 ‘썩은 줄의 六馬’, ‘범 꼬리와 봄날의 살얼음’과 같은 類라 할 것이다.[包桑豈固結之物乎 蓋古人朽索六馬虎尾春冰之類也]”라고 한 바 있다.
역주5 綴旒 : 晉나라 劉琨의 〈勸進表〉에 “나라의 위태로움이 旒를 매단 듯하다.[國家之危 有若綴旒]” 하였다. 旒는 구슬을 꿰어 관에 매다는 줄로, 旒가 관에 매달려 흔들리듯이 위태롭다는 뜻이다.
역주6 (槃)[螽] : 저본에는 ‘槃’으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 〈梁崇義傳〉에 의거하여 ‘螽’으로 바로잡았다.

당육선공주의(1) 책은 2023.01.1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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