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文喜之討
에 涇上之瘡痛
이 未平
注+① 朱泚傳云 “建中初, 以李懷光代段秀實兼節度涇原. 涇士聞懷光暴, 更相恟懼, 留後劉文喜因劫衆以叛. 詔懷光與朱泚討之. 其裨將劉海賓與其徒殺文喜.”하고 崇義之征
에 漢南之芟夷
가 繼甚
注+② 叛臣傳 “梁崇義爲羽林射生, 事來瑱於襄陽. 瑱誅, 遂摠其軍. 代宗因就拜節度使. 擧七州兵二萬, 與田承嗣․李正己等相結, 遂拒詔不朝. 德宗命李希烈討之, 崇義兵大敗, 乃赴井死, 傳首京師.”하니
阻命之帥를 非不誅也며 伐叛之師가 非不克也며 介焉之斷이 非不堅也며 赫斯之怒가 非不逞也언마는
然以人不見恤하고 惟戮是聞일새 有辜無辜를 不敢自保하여
是以抱釁反側者는 懼鈇鉞之次加하고 畏禍危疑者는 慮猜譖之旋及하여 遂乃螽結以拒討하고 狼顧以背恩하여 彌兩河而亘淮夷하고
盪三輔而盜京邑할새 鑾輅가 爲之再駕하고 行宮이 至於合圍하니
于時에 海內大搖하고 物情幾去하여 天命이 莫保于寸晷하고 王威가 不出於一城하니
邦國之杌陧艱屯이 綿綿聯聯하여 若包桑綴旒하여 幸而不殊者가 屢矣니 勢之危窘이 實足寒心이라
6-9-4 이는 어째서겠습니까. 건중建中의 난리에서 그 일을 징험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유감이 쌓여 너그럽게 포용하지 못하였고, 혹은 이기는 데 조급하여 전쟁하는 것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유문희劉文喜를 토벌함에
경원涇原의 장사將士들의 불만이 안정되지 못하였고注+① 文喜之討……未平:≪新唐書≫ 〈朱泚傳〉에 “建中 초에 李懷光으로 段秀實을 대신하여 涇原節度使를 겸하게 하였다. 涇原의 군사들은 이회광이 난폭하다는 소문을 듣고 서로 두려워하자, 留後 劉文喜가 이를 틈타 군중을 겁박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德宗은 이회광에게 조칙을 내려 朱泚와 함께 토벌하게 하였다. 그 裨將 劉海賓이 그 무리와 함께 유문희를 살해하였다.” 하였다. 양숭의梁崇義를 정벌함에
한수漢水 남쪽 지역에 대한 토벌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注+② 崇義之征……繼甚:≪新唐書≫ 〈叛臣傳〉에 “梁崇義는 羽林射生으로, 襄陽에서 來瑱을 섬겼다. 내진이 주살당하자 마침내 그 군사를 총괄하였다. 代宗은 이에 현지에서 그를 절도사에 임명하였다. 양숭의는 일곱 州의 병사 2만으로 거병하여, 田承嗣․李正己 등과 서로 결집하여 마침내 조칙을 거부하고 입조하지 않았다. 德宗이 李希烈에게 명령하여 그를 토벌하게 하자, 양숭의의 군사가 크게 패배하니, 양숭의는 마침내 우물에 투신하여 죽었고, 이희열은 그의 머리를 京師에 보냈다.” 하였다.
천자의 명을 거역한
장수將帥(유문희와 양숭의)를 주살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반란군을 정벌한 군사가 승리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결연한 판단이 확고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며,
폐하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았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구휼을 받지 못하고 오로지 살육의 소리만 들렸으므로 죄가 있든 죄가 없든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죄가 있는 불순한 자들은 부월鈇鉞이 차례로 가해질 것을 두려워하고, 화가 내릴까 두려워하여 불안해하는 자들은 시기와 참소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마침내 결집하여 토벌에 저항하고 이리가 돌아보듯이 두려워하며 은혜를 저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역적이 하남河南과 하북河北에 넘쳐나고 회이淮夷(회하淮河)에 뻗쳤습니다.
그리고 역적이 삼보三輔를 분탕질하고 경읍京邑을 도적질할 적에 어가가 두 번이나 이 때문에 파천하였고 행궁(봉천奉天)은 포위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때에 해내海內가 크게 동요하고 민심이 거의 떠나가서 천명天命은 촌음의 시각도 보장하지 못했고, 왕의 위엄이 한 성城 밖으로 나가지를 못했습니다.
방국邦國의
과 어려움이 면면히 이어져서 마치
이나
와 같아서, 요행히 죽지 않은 것이 여러 번이었으니, 형세의 위태로움과 군색함이 실로
한심寒心할 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