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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陸宣公奏議(1)

당육선공주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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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육선공주의(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然而可託以爲解者 必曰 王師雖益이나 賊黨亦增하니 曩獨田悅寶臣注+① 本傳云 “李寶臣本范陽內屬 後歸朝, 爲成德節度使, 遂有常․定․易․趙․深․冀六州地, 馬五千, 步卒五萬, 財用豐衍, 益招來亡命, 雄冠山東. 與薛嵩․田承嗣․李正己․梁崇義相姻嫁, 急熱爲表裏.” 惟岳乃其子也.이러니 今兼朱滔武俊이라하리니 臣請再詰하여 以塞其辭하리이다
曩之田悅寶臣 皆蓄銳養謀하여 劇賊之方彊者也러니 尋而田悅 喪敗하고 寶臣 殲夷注+② 寶臣旣蓄異志, 引妖人作讖 置金匜․玉斝, 猥曰 “內産甘露神酒.” 寶臣大悅. 旣而畏事露且誅, 詐曰 “公飮甘露液, 可與天神接.” 密寘堇于液. 寶臣已飮卽瘖, 三日死. 時建中年也.하니
雖復朱滔武俊 加於前이나 亦有孝忠日知乘其後注+③ 張孝忠本李寶臣麾下, 寶臣死, 子惟岳反, 乃歸朝, 爲成德節度使. 時三分成德地, 詔定州置軍, 名義武, 以孝忠爲節度, 易․定․滄等州觀察使. 後滔與武俊遣蔡雄說之, 復啖以金帛, 皆不受. 易․定介二鎭間, 乘城固守, 卒全其軍. 康日知少事李惟岳, 惟岳反, 日知與別駕李濯及部將百人共盟歸朝. 惟岳遣王武俊攻之, 日知紿爲臺檢示曰 “使者齎詔喩中丞, 中丞柰何負天子, 從小兒跳梁哉.” 武俊悟, 引兵還, 斬惟岳以獻. 德宗美其謀, 擢爲深․趙觀察使. 會武俊拒命, 遣將攻趙州, 日知復破其軍.하니 是則賊勢 不滋於曩日이며 王師 有溢於昔時 又明矣
曩以太原澤潞河陽三將之衆注+④ 太原謂馬燧, 澤潞謂李抱眞, 河陽謂李으로 當田悅朱滔武俊三寇之兵이러니 今朱滔 遁歸하고 武俊 退縮하고 唯此田悅 假息危城하니
設使我師 悉歸라도 彼亦纔能自守어든 況留抱眞馬燧 足得觀釁討除 是則減兵東征 勢必無患 又明矣
留之則彼爲冗食이요 徙之則此得長城하여 化危爲安하며 息費從省하여 擧一而兼數利 惟陛下圖之하소서 謹奏


1-1-20 그러나 〈병사가 많은 것에〉 의탁하여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들은 반드시 “조정의 군대가 비록 늘어났으나 적당賊黨도 늘어났고, 전에는 전열田悅이보신李寶臣뿐이었는데注+① 寶臣:≪新唐書≫ 〈藩鎭鎭冀傳〉에 “李寶臣은 본디 范陽에 內屬된 奚族인데, 후에 조정으로 귀순하여 成德節度使가 되어 결국 常州, 定州, 易州, 趙州, 深州, 冀州 여섯 개 州의 땅을 차지하였으며, 말이 5천 필, 보병이 5만으로, 재용이 풍부한데다가 더욱 망명객들을 불러 모아 山東에서 세력이 제일 강하였다. 田承嗣, 와 서로 혼인을 맺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라고 하였다. 李惟岳은 바로 그의 아들이다. 지금은 주도朱滔왕무준王武俊까지 합세하였다.”라고 둘러댑니다. 신은 재차 반박하여 그 변명을 막아보겠습니다.
예전에 전열과 이보신은 정병精兵모사謀士를 양성하여 사나운 도적 가운데 한창 강한 축에 속한 자들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열은 패배하고 이보신은 섬멸되었습니다.注+② 寶臣殲夷:李寶臣이 딴마음을 먹고 난 뒤, 妖人을 불러다 讖兆를 만들도록 하였다. 妖人이 금주전자와 옥잔을 놓고 외람되이 “안에서 甘露와 神酒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라고 하니, 이보신이 크게 기뻐하였다. 그런데 얼마 뒤에 일이 탄로나 처벌을 받게 될까 두려워지자 거짓으로 “공께서 甘露液을 드시면, 天神과 交接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고는 액체에 몰래 烏頭를 넣었다. 이보신이 마시고 나자 곧바로 벙어리가 되어 사흘 만에 죽었다. 그때가 建中 2년(781)이었다.
비록 다시 주도와 왕무준이 앞에서 적들에게 가담하였지만 장효충張孝忠가 그 뒤에 승세를 타고 있으니,注+③ 孝忠日知乘其後:張孝忠은 본디 李寶臣의 휘하였는데, 이보신이 죽고 아들 李惟岳이 모반하자 조정으로 귀순하여 成德節度使가 되었다. 당시 成德의 땅을 셋으로 나누어 조서를 내려 定州에 군대를 두고, ‘義武’라 명명하여 장효충을 節度使로 삼았으며, 易州, 定州, 滄州 등의 觀察使로 임명하였다. 후에 朱滔와 王武俊이 蔡雄을 보내어 그를 설득하고, 다시 금과 비단으로 꾀였으나 모두 받지 않았다. 易州와 定州가 두 藩鎭 사이에 끼어 있었지만 성을 지키기를 굳건히 하여 끝까지 그 군대를 온전히 하였다.
康日知는 젊었을 때 이유악을 섬겼는데, 이유악이 모반하자 강일지는 別駕 李濯 및 部將 백 명과 함께 맹세하고 조정으로 귀순하였다. 이유악이 왕무준을 보내어 그를 공격하였는데, 강일지가 거짓으로 조정의 公文을 작성해 보여주며 “使者가 中丞(왕무준)을 曉喩하는 조서를 가지고 왔는데, 중승은 어떻게 천자를 배반하고 小兒를 따라다니며 멋대로 구는가.”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왕무준이 각성하여 병사를 이끌고 돌아가 이유악을 베어 바쳤다. 덕종이 강일지의 계략을 가상히 여겨 深州와 趙州의 관찰사로 삼았다. 마침 왕무준이 抗命하고, 장수를 보내어 조주를 공격하였는데, 강일지가 다시 그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는 적의 기세가 예전보다 늘지 않았으며 조정의 군대가 전보다 늘었다는 또 하나의 명백한 증거입니다.
예전에는 태원太原, 택로澤潞, 하양河陽 지역의 세 장수의 군대로注+④ 太原澤潞河陽三將之衆:太原은 馬燧, 澤潞는 李抱眞, 河陽은 李芃을 말한다. 전열, 주도, 왕무준 세 도적의 병졸을 상대하였지만, 이제 주도는 달아났고 왕무준은 위축되었으며, 오직 전열만이 위태로운 성에서 겨우 연명하고 있습니다.
설령 우리 군대가 모조리 돌아가더라도 저들은 또한 겨우 스스로를 지키는 수준이니, 이포진과 마수만을 남겨두더라도 빈틈을 관찰하여 토벌해서 제거하기에 충분합니다. 이것이 병력을 줄여 동쪽을 친다고 해도 형세상 반드시 근심할 것이 없음이 또한 분명합니다.
불필요한 병력을 남겨두면 저들은 하는 일 없이 밥이나 축내겠지만 병력을 옮기면 이들은 장성長城이 될 것입니다. 위기를 안정으로 바꾸고 지출을 줄여 절약함으로써 하나를 시행하면 여러 가지 이익을 아우를 수 있으니, 부디 폐하께서는 이를 헤아리소서. 삼가 아룁니다.
평설評說】이 글은 주도朱滔전열田悅이희열李希烈 등의 번진藩鎭이 반란을 일으킴으로 인해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동원된 경원涇原의 군대가 병란을 일으켜 봉천奉天(현 섬서성陝西省 건현乾縣)으로 덕종德宗이 피신하게 된 ‘봉천지난奉天之難’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덕종 재위 기간(779~805)은 중국문학사에서 중당中唐으로 분류되는 시기다. 당시 나라는 안사安史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했던 절도사節度使들이 병권을 장악하며 종래의 중앙집권체제가 약화된 상황이었다. 토호土豪상인商人들이 번진藩鎭과 결탁하여 황권을 위협하였으며, 특히 화북 지방은 오랫동안 반독립적 상황이 계속되었다. 덕종은 즉위 이후 번진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건중建中 2년(781) 성덕절도사成德節度使 이보신李寶臣이 죽은 후 부친의 지위를 세습해줄 것을 요구한 이유악李惟岳의 요청을 거절하자 이유악이 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 전열田悅, 치청절도사淄靑節度使 이정기李正己, 산남동도절도사山南東道節度使 양숭의梁崇義 등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더욱 혼란스러운 상황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건중建中 4년(783), 회서절도사淮西節度使 이희열李希烈양성襄城을 공격하자 덕종이 가서요哥舒曜를 보내 토벌케 하였으나 오히려 위기에 빠지자 재차 경원涇原의 군대를 파견하여 구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오랜 전쟁과 푸대접에 지친 경원의 병사들이 명령에 따르지 않고 장안長安을 약탈하였으며, 반군들은 주자朱泚 아우 주도朱滔의 모략으로 경성京城에 연금되어 있던 주자를 떠받들어 우두머리로 삼았다. 이에 덕종이 봉천으로 피신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경원涇原의 병란이다. 이 당시 주도朱滔, 왕무준王武俊, 전열田悅, 이납李納 네 사람이 왕으로 참칭하고 주자朱泚이희열李希烈이 각각 진제秦帝초제楚帝로 참칭하였으므로 ‘이제사왕二帝四王’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논양하급회서이해장論兩河及淮西利害狀〉은 바로 가서요의 진압작전이 무위로 돌아가고 양성襄城을 잃을 위기에 처한 건중建中 4년(783)에 작성된 주장奏狀으로, 적합한 장수를 구하고 병권을 장악할 것, 사태의 경중을 살펴 대처할 것으로 요약되며, 이 두 가지 주장을 위해 반군의 형세와 전장의 상황 등을 적재적소에 거론하였다. 특히 올바른 장수를 구할 것과 병권을 장악하여야 한다는 뜻에서 언급한 “삼가 생각건대, 적을 이기는 요체는 장수가 적임자인가에 달려 있고, 장수를 다루는 방도는 병권을 장악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장수가 적임자가 아니라면 병졸이 아무리 많더라도 믿을 것이 못 되고, 병권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장수가 아무리 인재라 하더라도 쓸모가 없습니다. 병졸이 믿을 만하지 못하다면 병졸이 없는 것과 같고, 장수가 쓸모가 없으면 장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장수가 병졸을 지휘하지 못하며 나라가 장수를 다루지 못한다면 물자를 허비하고 적을 우습게 여기는 폐단에 그칠 뿐만 아니라 또한 군무軍務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여 자멸하는 재앙을 초래하게 될 것이니, 예로부터 화란禍亂의 불씨가 어찌 일찍이 여기에서 연유하지 않았겠습니까.”와 “사람이 나라의 근본이고 재물은 사람의 마음이며 군사는 재물을 좀먹는 벌레이다.[人者 邦之本也 財者 人之心也 兵者 財之蠹也]”라고 한 구절은 후인들에도 깊은 인상을 끼쳤다. 예를 들어 남송南宋 명대 중기의 학자 또한 이처럼 육지의 〈논양하급회서이해장論兩河及淮西利害狀〉는 작게는 군정의 문제로부터 크게는 왕도와 패도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의 논거로 활용되며 후대의 논평과 저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역주
역주1 康日知 : 선조는 西域 康國(지금의 사마르칸트(Samarqand)) 사람이다. 靈州로 이주하여 籍貫을 삼았다. 祖父 康植은 開元 9년(721)에 朔方大總管 王睃을 따라 突厥 토벌에 참가한 공으로 玄宗에게서 左武衛大將軍에 임명되었다. 康日知는 李寶臣 휘하의 軍官이었는데, 建中 2년(781) 李惟岳이 이보신의 뒤를 이어 成德節度使를 세습해달라고 요청하다가 거절당한 후 李正己․田悅 등과 연합해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지 않고 趙州를 수비하였다. 이유악의 명에 따라 조주를 공격한 王武俊을 달래어 오히려 이유악을 죽이게 만들었다. 또한 왕무준이 조정과 반군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고 朱滔․田悅 등과 반기를 들어 스스로 왕으로 참칭하며, 강일지를 공격하였으나 이를 막아냈다. 興元 원년(784) 檢校尙書左僕射와 會稽郡王에 봉해졌고, 사후 太子太師에 추증되었다.(≪新唐書≫ 〈康日知傳〉)
역주2 薛嵩 : 右威衛大將軍 薛仁貴의 손자로 安史의 叛軍에 가담하여 鄴郡節度使에 임명되었으나, 패배 후에는 조정에 투항하여 昭義節度使에 봉해졌다. 반란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舊唐書≫ 〈薛嵩傳〉)
역주3 李正己 : 본명은 懷玉으로 고구려 출신의 藩鎭 首將이다. 營州(지금의 遼寧省 朝陽)에서 태어나 平盧軍의 裨將이 되었다. 節度使 王玄志가 죽은 뒤 고모의 아들인 侯希逸을 절도사로 추대하였으며, 군인들의 신뢰를 잃은 후희일이 축출되자 그를 대신하여 절도사로 추대되었다. 조정에서도 이를 승인하여 平盧淄靑節度觀察使로 임명하고 正己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산동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 가장 강성할 때는 淄․靑․齊․海․登․萊․沂․密․德․棣․曹․濮․徐․兗․鄆 등 15州를 장악한 최대 번진으로 성장했다. 781년 자신의 아들 李納에게 지위를 물려주려고 했던 계획이 무산될까 우려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갑자기 등창이 나 죽었다. 이납은 당나라 조정의 거부에도 부친의 지위를 세습한 후 국호를 齊라 하였다가, 세습을 인정받은 후 귀순함에 따라 이정기도 太尉에 추증되었다.(≪舊唐書≫ 〈李正己傳〉)
역주4 梁崇義 : 長安 사람으로 힘이 장사였다. 羽林軍의 射生으로 來瑱을 따라 襄陽에 진주하고 여러 번 승진하여 右兵馬使가 되었다. 내진이 살해당한 후 장수로 추대되었는데, 조정에서 토벌하지 못하고 마침내 襄州刺史로 임명하였다. 田承嗣․李正己․薛嵩․李寶臣 등과 연합하여 襄州․鄧州․均州․房州․復州․郢州의 여섯 州를 점거하고 병력 2만 명을 보유하였다. 建中 원년(781), 淮西節度使 李希烈이 토벌할 것을 누차 주청하자 두려움을 품고 請罪하였다. 조정에서는 同平章事에 임명하여 신임의 뜻을 보였으나 의심하여 조정의 뜻에 따르지 않다가 이희열의 군대에 대패하였으며, 휘하의 장수 翟暉과 杜少誠이 항복한 후에도 襄陽에서 항전하다가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하였다.(≪舊唐書≫ 〈梁崇義傳〉)
역주5 (羌)[奚] : 저본에는 ‘羌’으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 〈藩鎭鎭冀傳〉에 의거하여 ‘奚’로 바로잡았다. 羌族은 四川 지역의 소수민족이고, 奚族은 鮮卑族 계열의 북방 소수민족으로, 唐 太宗이 高句麗를 공략할 때 공을 세워 크게 번성하였으며, 李氏 姓을 하사받았다.
역주6 (非)[兆] : 저본에는 ‘非’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 〈藩鎭鎭冀傳〉에 의거하여 ‘兆’로 바로잡았다.
역주7 (三)[二] : 저본에는 ‘三’으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 〈藩鎭鎭冀傳〉에 의거하여 ‘二’로 바로잡았다.
역주8 (危)[芃] : 저본에는 ‘危’로 되어 있으나, ≪陸贄集≫(中華書局, 2006)에 의거하여 ‘芃’으로 바로잡았다.
역주9 汪應辰(1118~1176)은……하였으며 : ≪宋史≫ 〈汪應辰傳〉에 보인다.
역주10 邱濬(1421~1495)도……것이다 : ≪大學衍義補≫ 권130에 보인다.
역주11 成海應(1769~1839)처럼……하다 : ≪硏經齋全集≫ 권12 〈讀陸宣公奏議〉에 보인다.

당육선공주의(1) 책은 2023.01.1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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