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설評說】이 글은
주도朱滔․
전열田悅․
이희열李希烈 등의
번진藩鎭이 반란을 일으킴으로 인해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동원된
경원涇原의 군대가 병란을 일으켜
봉천奉天(현
섬서성陝西省 건현乾縣)으로
당唐 덕종德宗이 피신하게 된 ‘
봉천지난奉天之難’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덕종 재위 기간(779~805)은 중국문학사에서
중당中唐으로 분류되는 시기다. 당시
당唐나라는
안사安史의
난亂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했던
절도사節度使들이 병권을 장악하며 종래의 중앙집권체제가 약화된 상황이었다.
토호土豪와
상인商人들이
번진藩鎭과 결탁하여 황권을 위협하였으며, 특히 화북 지방은 오랫동안 반독립적 상황이 계속되었다. 덕종은 즉위 이후 번진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건중建中 2년(781)
성덕절도사成德節度使 이보신李寶臣이 죽은 후 부친의 지위를 세습해줄 것을 요구한
이유악李惟岳의 요청을 거절하자 이유악이
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 전열田悅,
치청절도사淄靑節度使 이정기李正己,
산남동도절도사山南東道節度使 양숭의梁崇義 등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더욱 혼란스러운 상황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건중建中 4년(783),
회서절도사淮西節度使 이희열李希烈이
양성襄城을 공격하자 덕종이
가서요哥舒曜를 보내 토벌케 하였으나 오히려 위기에 빠지자 재차
경원涇原의 군대를 파견하여 구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오랜 전쟁과 푸대접에 지친 경원의 병사들이 명령에 따르지 않고
장안長安을 약탈하였으며, 반군들은
주자朱泚 아우
주도朱滔의 모략으로
경성京城에 연금되어 있던 주자를 떠받들어 우두머리로 삼았다. 이에 덕종이 봉천으로 피신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경원涇原의 병란이다. 이 당시
주도朱滔,
왕무준王武俊,
전열田悅,
이납李納 네 사람이 왕으로 참칭하고
주자朱泚와
이희열李希烈이 각각
진제秦帝와
초제楚帝로 참칭하였으므로 ‘
이제사왕二帝四王의
난亂’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
논양하급회서이해장論兩河及淮西利害狀〉은 바로 가서요의 진압작전이 무위로 돌아가고
양성襄城을 잃을 위기에 처한
건중建中 4년(783)에 작성된
주장奏狀으로, 적합한 장수를 구하고 병권을 장악할 것, 사태의 경중을 살펴 대처할 것으로 요약되며, 이 두 가지 주장을 위해 반군의 형세와 전장의 상황 등을 적재적소에 거론하였다. 특히 올바른 장수를 구할 것과 병권을 장악하여야 한다는 뜻에서 언급한 “삼가 생각건대, 적을 이기는 요체는 장수가 적임자인가에 달려 있고, 장수를 다루는 방도는 병권을 장악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장수가 적임자가 아니라면 병졸이 아무리 많더라도 믿을 것이 못 되고, 병권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장수가 아무리 인재라 하더라도 쓸모가 없습니다. 병졸이 믿을 만하지 못하다면 병졸이 없는 것과 같고, 장수가 쓸모가 없으면 장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장수가 병졸을 지휘하지 못하며 나라가 장수를 다루지 못한다면 물자를 허비하고 적을 우습게 여기는 폐단에 그칠 뿐만 아니라 또한
군무軍務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여 자멸하는 재앙을 초래하게 될 것이니, 예로부터
화란禍亂의 불씨가 어찌 일찍이 여기에서 연유하지 않았겠습니까.”와 “사람이 나라의 근본이고 재물은 사람의 마음이며 군사는 재물을 좀먹는 벌레이다.[人者 邦之本也 財者 人之心也 兵者 財之蠹也]”라고 한 구절은 후인들에도 깊은 인상을 끼쳤다. 예를 들어
남송南宋의
명대 중기의 학자
또한
이처럼 육지의 〈
논양하급회서이해장論兩河及淮西利害狀〉는 작게는 군정의 문제로부터 크게는 왕도와 패도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의 논거로 활용되며 후대의 논평과 저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