嘗觀歷代論事之臣이 未易悉數나 就其傑然者한대 若漢之賈誼晁錯魏相과 唐之馬周魏徵과 及陸宣公이 其人也라
然彼五人者는 遇治世而事明主하니 宜其盡言不諱也라 吾陸宣公則不然하니
建中貞元之際에 藩戎繼逆하여 乘輿播越하니 天下之勢가 可謂岌岌矣요 而德宗亦非文宣太宗之流也라
公徒以忠誠仁義로 孤立于其間하여 遇事而諫하고 隨問而對하니 雖在倉卒이나 每從容反覆하여 排比偶儷하며 揣合低昂이 累累然至千萬言而不窮하니
自翰林至爲宰相히 常如一日하여 雖以帝之忌刻으로도 而往往聽用其言하여 唐之宗社가 旣危而復安하니
惜夫大難纔夷하여 而追咎盡言이러니 裴延齡之徒가 得以擠之하여 竟斥南賓하여 齎志以歿焉이라
彼晁賈數子는 遭時得君하니 千一之幸也로되 而猶有長沙東市之寃하니 無惑乎公之不終也로다
悠悠千載之下에 豈無思齊者乎리오 今河東府院君鄭公麟趾는 五朝之元老也니 平日陳謨進諫할새 動以公爲法이라
嘗相三宗하여 身致大平한대 晩年에 得公之制誥奏議若干卷하여 手之而不釋焉이라 今監司金公永濡之來也에 付以斯集하여 將欲繡諸梓而廣其傳이라
念惟盛朝는 文運이 方亨하여 購求遺書에 猶恐不及하니
倘此書幸而得徹于淸讌하면 則乙覽之餘에 必有所默契如與贄前席而談議하여 開發聖性하고 資助治功하리니 東方之人이 將蒙至治之澤矣리라
苟然則河東公思齊之志와 監司公承稟之事는 其利不亦博乎리오
成化甲午十月旣望 中直大夫 行咸陽郡守 金宗直謹跋하다
일찍이 살펴보건대, 역대로 정사를 논한 신하들은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렵지만, 그 가운데 걸출한 이를 꼽자면
한漢나라의
가의賈誼․
조조晁錯․
위상魏相과
당唐나라의
․
위징魏徵, 그리고
육선공陸宣公이 그 사람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저 다섯 사람은 치세를 만나 명철한 군주를 섬겼으니 꺼리거나 감추지 않고 모두 말하는 것이 당연하였다고 하겠지만, 우리 육선공은 그렇지 않았다.
이 연달아 반역하여 황제가 몽진하였으니 천하의 형세가 몹시 위태로웠다고 할 만하며,
덕종德宗 또한 한나라의
문제文帝나
선제宣帝, 당나라의
태종太宗과 같은 부류가 아니었다.
공은 단지 충성忠誠과 인의仁義로 그 사이에 외로이 서서 일에 맞닥뜨릴 때마다 간언하고 자문할 때마다 대책을 내놓았는데, 비록 창졸간일지라도 늘 차분하게 반복해 자구를 짝지어 배열하고 음률을 헤아려 맞춘 것이 천언만언千言萬言에 이르러도 다함이 없었다.
요컨대 한 마디 한 계책도 일의 기미에 들어맞고 인정을 감동시키지 않음이 없었다.
한림학사翰林學士로부터 재상宰相에 이르기까지 늘 하루같이 변함이 없었으므로, 비록 시기심 많고 각박한 황제로서도 때로는 그의 말을 들어 당唐나라의 종묘와 사직이 위태로워졌다가 다시 안정되었다.
비록 하늘의 명이 아직 끊어지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하지만 이 역시 공이 혼란을 수습하고 도와 바로잡은 데 힘입은 것이라 할 것이다.
이로 보건대 공의 도덕과 문장은 한漢․당唐 이래 으뜸이라고 할 것이다.
애석하게도 몹시 어려운 상황이 겨우 진정되자마자 뒤늦게
극언極言했던 일을 허물하였는데,
배연령裴延齡의 무리가 이를 틈타 배척하여 마침내
으로 쫓겨나서, 큰 뜻을 품은 채 죽고 말았다.
저 조조晁錯․가의賈誼 등 몇몇 사람은 알맞은 때를 만나고 좋은 군주를 얻었으므로 천에 하나 정도나 있을 행운이라 하겠지만, 그러함에도 장사長沙로 좌천되거나 동시東市에서 죽임을 당하는 원통함이 있었으니, 육선공陸宣公과 같은 분이 선종善終하지 못함은 의혹할 것이 없다 하겠다.
아득한 천 년 뒤에 어찌
이들이 없겠는가. 지금
하동무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는 다섯 임금을 섬긴
원로元老로서 평소 국책을 진달하고 간언을 올릴 때마다 번번이 공을 법으로 삼았다.
일찍이
을 도와 몸소 태평한 시절을 일구었으며, 늘그막에 공의
제고制誥와
주의奏議 몇 권을 얻고 나서는 항상 손에서 내려놓은 적이 없었는데, 현 감사
가 부임한 뒤 이 문집을 그에게 맡겨
상재上梓하여 널리 전해지도록 하였다.
이에 김 공이 품부하신 바를 삼가 받들어 여러 고을에 나누어 간행토록 하여 이제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생각건대 성대한 조정의 문운文運이 한창 형통한 추세여서 공의 유서遺書를 구득함에 있어서도 오히려 구하지 못할까 염려하듯이 하고 있다.
그러하니 혹여라도 이 책을
하신 여가에 반드시
육지陸贄와 더불어 마주 앉아 담론하듯 묵묵히 계합하시어
성군聖君의 자품을 개발하시고
치세治世의 공을 이루시는 데 이바지할 것이니, 우리나라의 사람들이
지치至治의 은택을 입게 될 것이다.
진실로 이와 같다면 육지의 행실을 닮기를 생각했던 하동공河東公(정인지)의 뜻과 품부를 받들어 완수한 감사공監司公(김영유)의 사업이야말로 그 이로움이 또한 넓다 하지 않겠는가.
성화成化 갑오년(1474, 성종成宗 5년) 10월 기망旣望에 중직대부中直大夫 행함양군사行咸陽郡守 김종직金宗直이 삼가 발문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