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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陸宣公奏議(1)

당육선공주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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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육선공주의(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朝鮮
嘗觀歷代論事之臣 未易悉數 就其傑然者한대 若漢之賈誼晁錯魏相 唐之馬周魏徵 及陸宣公 其人也
然彼五人者 遇治世而事明主하니 宜其盡言不諱也 吾陸宣公則不然하니
建中貞元之際 藩戎繼逆하여 乘輿播越하니 天下之勢 可謂岌岌矣 而德宗亦非文宣太宗之流也
公徒以忠誠仁義 孤立于其間하여 遇事而諫하고 隨問而對하니 雖在倉卒이나 每從容反覆하여 排比偶儷하며 揣合低昂 累累然至千萬言而不窮하니
要之一言一策 無不中於事機하고 感於人情이라
自翰林至爲宰相 常如一日하여 雖以帝之忌刻으로도 而往往聽用其言하여 唐之宗社 旣危而復安하니
雖云天命未絶이나 亦由公𦇯縫匡贊之力也
由是觀之컨대 公之道德文章 漢唐以來一人而已
惜夫大難纔夷하여 而追咎盡言이러니 裴延齡之徒 得以擠之하여 竟斥南賓하여 齎志以歿焉이라
彼晁賈數子 遭時得君하니 千一之幸也로되 而猶有長沙東市之寃하니 無惑乎公之不終也로다
悠悠千載之下 豈無思齊者乎리오 今河東府院君鄭公麟趾 五朝之元老也 平日陳謨進諫할새 動以公爲法이라
嘗相三宗하여 身致大平한대 晩年 得公之制誥奏議若干卷하여 手之而不釋焉이라 今監司金公永濡之來也 付以斯集하여 將欲繡諸梓而廣其傳이라
公承稟惟謹하여 分刊諸邑한대訖工이라
念惟盛朝 文運 方亨하여 購求遺書 猶恐不及하니
倘此書幸而得徹于淸讌하면 則乙覽之餘 必有所默契如與贄前席而談議하여 開發聖性하고 資助治功하리니 東方之人 將蒙至治之澤矣리라
苟然則河東公思齊之志 監司公承稟之事 其利不亦博乎리오
成化甲午十月旣望 中直大夫 行咸陽郡守 金宗直謹跋하다


발 문
일찍이 살펴보건대, 역대로 정사를 논한 신하들은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렵지만, 그 가운데 걸출한 이를 꼽자면 나라의 가의賈誼조조晁錯위상魏相나라의 위징魏徵, 그리고 육선공陸宣公이 그 사람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저 다섯 사람은 치세를 만나 명철한 군주를 섬겼으니 꺼리거나 감추지 않고 모두 말하는 것이 당연하였다고 하겠지만, 우리 육선공은 그렇지 않았다.
이 연달아 반역하여 황제가 몽진하였으니 천하의 형세가 몹시 위태로웠다고 할 만하며, 덕종德宗 또한 한나라의 문제文帝선제宣帝, 당나라의 태종太宗과 같은 부류가 아니었다.
공은 단지 충성忠誠인의仁義로 그 사이에 외로이 서서 일에 맞닥뜨릴 때마다 간언하고 자문할 때마다 대책을 내놓았는데, 비록 창졸간일지라도 늘 차분하게 반복해 자구를 짝지어 배열하고 음률을 헤아려 맞춘 것이 천언만언千言萬言에 이르러도 다함이 없었다.
요컨대 한 마디 한 계책도 일의 기미에 들어맞고 인정을 감동시키지 않음이 없었다.
한림학사翰林學士로부터 재상宰相에 이르기까지 늘 하루같이 변함이 없었으므로, 비록 시기심 많고 각박한 황제로서도 때로는 그의 말을 들어 나라의 종묘와 사직이 위태로워졌다가 다시 안정되었다.
비록 하늘의 명이 아직 끊어지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하지만 이 역시 공이 혼란을 수습하고 도와 바로잡은 데 힘입은 것이라 할 것이다.
이로 보건대 공의 도덕과 문장은 이래 으뜸이라고 할 것이다.
애석하게도 몹시 어려운 상황이 겨우 진정되자마자 뒤늦게 극언極言했던 일을 허물하였는데, 배연령裴延齡의 무리가 이를 틈타 배척하여 마침내 으로 쫓겨나서, 큰 뜻을 품은 채 죽고 말았다.
조조晁錯가의賈誼 등 몇몇 사람은 알맞은 때를 만나고 좋은 군주를 얻었으므로 천에 하나 정도나 있을 행운이라 하겠지만, 그러함에도 장사長沙로 좌천되거나 동시東市에서 죽임을 당하는 원통함이 있었으니, 육선공陸宣公과 같은 분이 선종善終하지 못함은 의혹할 것이 없다 하겠다.
아득한 천 년 뒤에 어찌 이들이 없겠는가. 지금 하동무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는 다섯 임금을 섬긴 원로元老로서 평소 국책을 진달하고 간언을 올릴 때마다 번번이 공을 법으로 삼았다.
일찍이 을 도와 몸소 태평한 시절을 일구었으며, 늘그막에 공의 제고制誥주의奏議 몇 권을 얻고 나서는 항상 손에서 내려놓은 적이 없었는데, 현 감사 가 부임한 뒤 이 문집을 그에게 맡겨 상재上梓하여 널리 전해지도록 하였다.
이에 김 공이 품부하신 바를 삼가 받들어 여러 고을에 나누어 간행토록 하여 이제 마무리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생각건대 성대한 조정의 문운文運이 한창 형통한 추세여서 공의 유서遺書를 구득함에 있어서도 오히려 구하지 못할까 염려하듯이 하고 있다.
그러하니 혹여라도 이 책을 하신 여가에 반드시 육지陸贄와 더불어 마주 앉아 담론하듯 묵묵히 계합하시어 성군聖君의 자품을 개발하시고 치세治世의 공을 이루시는 데 이바지할 것이니, 우리나라의 사람들이 지치至治의 은택을 입게 될 것이다.
진실로 이와 같다면 육지의 행실을 닮기를 생각했던 하동공河東公(정인지)의 뜻과 품부를 받들어 완수한 감사공監司公(김영유)의 사업이야말로 그 이로움이 또한 넓다 하지 않겠는가.
성화成化 갑오년(1474, 성종成宗 5년) 10월 기망旣望중직대부中直大夫 행함양군사行咸陽郡守 김종직金宗直이 삼가 발문을 쓰다.


역주
역주1 : 본 跋文은 저본에 수록된 것이 아니라, ≪唐陸宣公集≫ 10行17字本(朝鮮 成宗 5년(1474) 慶尙監司 金永濡 간행, 木版本, 연세대학교 소장)에 수록된 것이다. ≪당육선공집≫이 우리나라에 수용될 때 학자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기에 본서에 수록하였다.
역주2 金宗直 : 본관은 善山, 자는 孝盥․季昷, 호는 佔畢齋, 시호는 文忠이다. 金叔滋의 아들로, 鄭夢周와 吉再의 학통을 계승하여 金宏弼, 趙光祖로 이어지게 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申從濩 등과 함께 ≪東國輿地勝覽≫을 編次하였으며, 戊午士禍의 원인이 된 〈弔義帝文〉에서는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世祖의 왕위찬탈을 비난하였다. 金宏弼․鄭汝昌․金馹孫․兪好仁․南孝溫․曺偉 등의 제자를 배출, 당시 학자들의 정신적인 영수가 되었다. 위의 글은 1474년 함양군수로 재직할 때 작성된 것이다.
역주3 馬周 : 唐 太宗 때의 재상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고아로 자란 탓에 젊은 시절에는 放浪不羈하여 존경을 받지 못했다. 太宗이 百官에게 朝政의 득실을 담론하는 상서를 짓도록 하였을 때 눈에 띄어 門下省에서 봉직하게 된 이래 여러 차례 간언을 올려 ‘貞觀之治’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上太宗疏〉․〈陳時政疏〉․〈請勸賞疏〉․〈諫公主晝婚疏〉․〈請簡擇縣令疏〉 등의 주의문이 전한다.
역주4 建中……藩鎭 : 建中과 貞元은 바로 唐 德宗의 연호로 덕종의 시기를 가리킨 것이다. 藩鎭은 唐나라 후기부터 宋나라 초기에 節度使를 중심으로 한 지방 지배체제를 말한다. 번진은 安史의 난 직전에 설치되기 시작되었다가 안사의 난 이후에 唐朝의 지방에 대한 통치권이 약화되면서 지방의 행정과 군사권, 경제권을 장악한 절도사가 반독립적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역주5 南賓 : 지금의 重慶市 石柱縣의 옛 이름이다. 唐나라 武德 2년(619)에 설치되었다가 天寶 初年(742)에 南賓郡으로 고쳐졌고 당나라 乾元 初年(758)에 다시 忠州로 개칭되었다.
역주6 그를……하는 : 원문의 ‘思齊’는 ≪論語≫ 〈里仁〉의 “見賢思齊(어진 이의 행실을 보면 그와 같아지기를 생각한다.)”에서 온 말로, 이 글에서는 陸贄와 언행을 본받고자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역주7 三宗 : 太宗․世宗․文宗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정인지는 1411년(태종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4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禮賓寺主簿에 제수되었다. 이후 成宗까지 일곱 왕을 섬겼으나, 癸酉政變에 협조한 공으로 靖難功臣에 책록된 점과 그 이후의 행력을 감안하면 端宗 이후까지 지칭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역주8 金永濡 : 본관은 慶州, 자는 澤夫, 시호는 恭平이다. 金自粹의 손자로, 1447년(세종 29)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했으며, 세조 즉위 후 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74년(성종 5) 이듬해 동지중추부사 겸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어 왜적 토벌에 공을 세웠는데, 이때 鄭麟趾의 뜻에 따라 ≪陸宣公奏議≫를 간행하였다.
역주9 임금께서……있다면 : 본문의 ‘得徹于淸讌’에서 ‘淸讌’은 한가함, 편안함을 뜻하는 말로 태평성세를 비유한 말이다. 여기서는 군신간에 밤늦도록 토론하고 대화하는 자리를 가리키는데, 즉 임금의 여가를 말한 것이다. 다만 뒤에 ‘乙覽之餘’의 번역과 중첩되는 부분이 있어 이렇게 번역하였다.
역주10 乙覽 : ‘乙夜之覽’의 준말로 임금의 讀書를 이르는 말이다. 임금이 政務를 끝내고 취침하기 전인 10시경에 독서를 하는 데서 연유한 말이다.
역주11 : 저본에는 글자가 빠졌는데, 문맥상 ‘今始訖工(지금 비로소 마무리 짓다.)’의 의미로 보인다.

당육선공주의(1) 책은 2023.01.1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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