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陸宣公奏議(1)

당육선공주의(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육선공주의(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田悅唱亂之始 氣盛力全하고 恒趙靑齊 迭爲脣齒注+① 田悅傳 “建中二年, 鎭州李惟岳․淄靑李納求襲節度, 不許, 悅爲請, 不答, 遂合謀同叛. 納分兵佐悅. 會幽州兵討惟岳, 悅乃以兵五千助惟岳. 自將兵數萬繼進, 又使楊朝光攻臨洺將張伾. 伾固守.” 左傳僖五年 “晉侯復假道於虞以伐虢. 宮之奇諫曰 ‘諺所謂輔車相依, 脣亡齒寒者, 其虞․虢之謂也.’” 今恒․趙․靑․齊更相黨援, 故亦以脣齒爲喩.로되
陛下 特詔馬燧하사 委之專征하시고 抱眞李芃으로 聲勢相援하시니
于時 士吏畏法하고 將帥感恩하여 俱蘊勝殘盡敵之誠하고 未有爭功邀利之釁이라
故能累摧堅陣하고 深抵窮巢하여 元惡 幸脫於俘囚하고 兇徒幾盡於鋒刃注+② 德宗詔河東馬燧․河陽李芃與昭義李抱眞救張伾. 燧乃自壺關鼓而東, 戰雙岡, 擒賊大將盧子昌, 而楊朝光. 悅遁保水, 李納․李惟岳合三萬救悅, 淄靑軍其左, 常冀軍其右. 燧引神策將李晟夾攻悅, 悅大敗, 死傷二萬計, 引壯騎數十, 夜奔魏州.하니
故曰 剋敵之要 在乎將得其人이요 馭將之方 在乎操得其柄이라하노니 此其明效也


1-1-11 전열田悅이 난을 일으킨 초기에 기세가 왕성하고 병력이 온전하였으며, 항주恒州, 조주趙州, 청주靑州, 제주齊州가 서로 협력하며 의지하고 있었지만,注+① 田悅唱亂之始……迭爲脣齒:≪新唐書≫ 〈田悅傳〉에 “建中 2년(781)에 鎭州 李惟岳과 淄靑 李納이 節度使의 세습을 요구하였으나 조정에서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田悅의 요청에 대해서도 답을 주지 않자, 결국 이들은 다 같이 모의하여 함께 모반하였다. 이납이 병력을 나누어 전열을 도왔다. 마침 조정에서 幽州의 병력으로 이유악을 토벌하자 전열이 이에 병사 5천으로 이유악을 돕게 하였다. 그런 다음 전열이 직접 병사 수만을 이끌고 뒤따라갔으며, 또 楊朝光으로 하여금 臨洺의 守將 張伾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장비가 굳게 지키었다.”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僖公 5년에 “晉侯가 다시 虞나라에 길을 빌려 虢나라를 치려고 하였다. 宮之奇가 다음과 같이 諫하였다. ‘속담에 「덧방나무와 바퀴는 서로 떨어질 수 없듯,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말은 우나라와 괵나라를 두고 한 말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제 恒州, 趙州, 靑州, 齊州가 번갈아 서로 한 편이 되어 도와주고 있으므로 또한 입술과 이로 비유한 것이다.
폐하께서 특별히 마수馬燧에게 조서를 내려 정벌의 모든 권한을 위임하시고, 이포진李抱眞으로 하여금 서로 호응하여 돕게 하셨습니다.
이때에 사리士吏는 법을 두려워하고 장수는 성은에 감복하여 모두들 잔인하고 포학한 적들을 남김없이 무찌르려는 마음을 품었으며, 공을 다투거나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려는 불화는 없었습니다.
때문에 적들의 견고한 진영을 여러 차례 쳐부수고 소굴까지 깊숙이 다다를 수 있었으니, 수괴首魁는 운 좋게도 포로가 되는 상황에서 벗어났지만 흉도들은 칼날에 거의 쓰러졌습니다.注+② 故能累摧堅陣……兇徒幾盡於鋒刃:德宗이 河東의 馬燧, 河陽의 李芃과 昭義의 李抱眞에게 조서를 내려 張伾를 구원하게 하였다. 마수가 이에 壺關에서 북을 치며 동쪽으로 진격하여 雙岡에서 전투를 벌여 적의 대장 盧子昌을 사로잡고, 楊朝光을 베었다. 田悅은 洹水로 달아나 버티자 李納과 李惟岳이 3만 병력을 합해 전열을 구원하여, 淄靑은 좌측에 진을 치고, 常冀는 우측에 진을 쳤다. 마수가 神策軍의 장수 을 데리고 전열을 협공하자 전열이 대패하였는데, 죽고 다친 이들이 2만을 헤아렸으며, 용맹한 기병 수십 명만 이끌고 야밤중에 魏州로 달아났다.
신은 그러기에 적을 이기는 요체는 장수가 적임자인가에 달려 있고, 장수를 다루는 방도는 병권을 장악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하였던 것이니, 이것이 명백한 증거입니다.


역주
역주1 李芃 : 字는 茂初, 赵郡 사람이다. 李勉의 휘하에서 李靈曜의 반란을 막는 데 공을 세웠으며, 德宗 즉위 후 檢校太常少卿兼禦史中丞에 임명되었다. 懷州節度觀察使가 되었을 때 魏博節度使 田悅이 謀叛하자 이봉으로 하여금 토벌하게 하였다. 이에 이봉이 新鄉과 共城을 함락하고 衛州를 포위하였으며, 河東節度使 馬燧 등과 함께 洹水에서 전열을 대파하였다. 그 공으로 檢校兵部尙書에 오르고 開陽郡王에 봉해졌다. 貞元 원년(785) 사망 후 太子太保에 추증되었다.(≪舊唐書≫ 〈李芃傳〉)
역주2 李晟 : 字는 良器, 洮州 臨潭(지금의 甘肅省 臨潭縣) 사람이다. 西平郡王에 봉해졌으므로 李西平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원래 邊鎮의 裨將이었으나 여러 차례 戰功을 세워 右金吾大將軍․北庭都知兵馬使에 올랐고, 入朝 후에는 右神策軍都將에 임명되었다. 建中 2년(781) 神策軍의 선봉에서 河朔三鎮의 반군을 토벌하였으며, 建中 4년(783), 涇原兵變이 발발하자 奉天으로 가서 勤王하여, 尙書左僕射․同中書門下平章事에 올랐다. 興元 원년(784), 長安을 수복하고 朱泚의 난을 평정한 후 鳳翔․隴右․涇原三鎮의 節度使를 겸임하였다. 貞元 9년(793), 사망 후 太師에 추증되었으며 諡號는 忠武다.(≪舊唐書≫ 〈李晟傳〉)
역주3 (救)[斬] : 저본에는 ‘救’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 〈藩鎭魏博傳〉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역주4 (亘)[洹] : 저본에는 ‘亘’으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 〈藩鎭魏博傳〉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당육선공주의(1) 책은 2023.01.1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