田悅唱亂之始
에 氣盛力全
하고 恒趙靑齊
가 迭爲脣齒
注+① 田悅傳 “建中二年, 鎭州李惟岳․淄靑李納求襲節度, 不許, 悅爲請, 不答, 遂合謀同叛. 納分兵佐悅. 會幽州兵討惟岳, 悅乃以兵五千助惟岳. 自將兵數萬繼進, 又使楊朝光攻臨洺將張伾. 伾固守.” 左傳僖五年 “晉侯復假道於虞以伐虢. 宮之奇諫曰 ‘諺所謂輔車相依, 脣亡齒寒者, 其虞․虢之謂也.’” 今恒․趙․靑․齊更相黨援, 故亦以脣齒爲喩.로되
陛下가 特詔馬燧하사 委之專征하시고 抱眞李芃으로 聲勢相援하시니
于時에 士吏畏法하고 將帥感恩하여 俱蘊勝殘盡敵之誠하고 未有爭功邀利之釁이라
故能累摧堅陣
하고 深抵窮巢
하여 元惡
이 幸脫於俘囚
하고 兇徒幾盡於鋒刃
注+② 德宗詔河東馬燧․河陽李芃與昭義李抱眞救張伾. 燧乃自壺關鼓而東, 戰雙岡, 擒賊大將盧子昌, 而楊朝光. 悅遁保水, 李納․李惟岳合三萬救悅, 淄靑軍其左, 常冀軍其右. 燧引神策將李晟夾攻悅, 悅大敗, 死傷二萬計, 引壯騎數十, 夜奔魏州.하니
臣이 故曰 剋敵之要는 在乎將得其人이요 馭將之方은 在乎操得其柄이라하노니 此其明效也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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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열田悅이 난을 일으킨 초기에 기세가 왕성하고 병력이 온전하였으며,
항주恒州,
조주趙州,
청주靑州,
제주齊州가 서로 협력하며 의지하고 있었지만,
注+① 田悅唱亂之始……迭爲脣齒:≪新唐書≫ 〈田悅傳〉에 “建中 2년(781)에 鎭州 李惟岳과 淄靑 李納이 節度使의 세습을 요구하였으나 조정에서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田悅의 요청에 대해서도 답을 주지 않자, 결국 이들은 다 같이 모의하여 함께 모반하였다. 이납이 병력을 나누어 전열을 도왔다. 마침 조정에서 幽州의 병력으로 이유악을 토벌하자 전열이 이에 병사 5천으로 이유악을 돕게 하였다. 그런 다음 전열이 직접 병사 수만을 이끌고 뒤따라갔으며, 또 楊朝光으로 하여금 臨洺의 守將 張伾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장비가 굳게 지키었다.”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僖公 5년에 “晉侯가 다시 虞나라에 길을 빌려 虢나라를 치려고 하였다. 宮之奇가 다음과 같이 諫하였다. ‘속담에 「덧방나무와 바퀴는 서로 떨어질 수 없듯,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말은 우나라와 괵나라를 두고 한 말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제 恒州, 趙州, 靑州, 齊州가 번갈아 서로 한 편이 되어 도와주고 있으므로 또한 입술과 이로 비유한 것이다.
폐하께서 특별히
마수馬燧에게 조서를 내려 정벌의 모든 권한을 위임하시고,
이포진李抱眞과
으로 하여금 서로 호응하여 돕게 하셨습니다.
이때에 사리士吏는 법을 두려워하고 장수는 성은에 감복하여 모두들 잔인하고 포학한 적들을 남김없이 무찌르려는 마음을 품었으며, 공을 다투거나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려는 불화는 없었습니다.
때문에 적들의 견고한 진영을 여러 차례 쳐부수고 소굴까지 깊숙이 다다를 수 있었으니,
수괴首魁는 운 좋게도 포로가 되는 상황에서 벗어났지만 흉도들은 칼날에 거의 쓰러졌습니다.
注+② 故能累摧堅陣……兇徒幾盡於鋒刃:德宗이 河東의 馬燧, 河陽의 李芃과 昭義의 李抱眞에게 조서를 내려 張伾를 구원하게 하였다. 마수가 이에 壺關에서 북을 치며 동쪽으로 진격하여 雙岡에서 전투를 벌여 적의 대장 盧子昌을 사로잡고, 楊朝光을 베었다. 田悅은 洹水로 달아나 버티자 李納과 李惟岳이 3만 병력을 합해 전열을 구원하여, 淄靑은 좌측에 진을 치고, 常冀는 우측에 진을 쳤다. 마수가 神策軍의 장수 을 데리고 전열을 협공하자 전열이 대패하였는데, 죽고 다친 이들이 2만을 헤아렸으며, 용맹한 기병 수십 명만 이끌고 야밤중에 魏州로 달아났다.
신은 그러기에 적을 이기는 요체는 장수가 적임자인가에 달려 있고, 장수를 다루는 방도는 병권을 장악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하였던 것이니, 이것이 명백한 증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