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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陸宣公奏議(2)

당육선공주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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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육선공주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面承深旨하고 又奉密宣호니 皆以社稷爲言하시고 又知根尋已審하니
敢不上同憂憤하고 內絶狐疑 豈願遲廻하여 更貽念慮리오마는
但以嘗經重任 斯謂大臣이니 進退之間 猶宜有禮하고 誅戮之際 不可無名이니
劉晏 久掌貨財하여 當時 亦招怨讟하나 及加罪責 事不分明하여 叛者 旣得以爲辭하고 衆人 亦爲之懷愍注+① 本傳 “建中元年七月, 詔中人賜晏死. 後十九日, 賜死詔書乃下, 且暴其罪. 天下以爲冤. 淄靑節度使李正己表‘誅晏太暴, 不加驗實, 先誅後詔, 天下駭惋, 請還其妻子.’ 不報.”하니
用刑曖昧 損累不輕이라 事例未遙하니 所宜重愼이니이다


9-2-2 신이 심오한 성지聖旨를 대면하여 받들고 또한 은밀히 선유하신 뜻을 받들어 보니, 모두 사직社稷을 일컬으셨고 또한 근원을 캐내어 그 정황을 파악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감히 위로 근심과 분노를 함께하고 안으로는 를 끊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망설여서 다시 근심을 끼쳐드리겠습니까.
그러나 〈두참竇參은〉 일찍이 중임을 역임하여 대신이라 일컬어졌으니, 진퇴하게 할 때도 오히려 예로써 해야 하는데 주벌할 때에 명분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반도叛徒가 이미 구실로 삼았으며 사람들 또한 그를 가엾게 여겼습니다.注+① ≪新唐書≫ 〈劉晏傳〉에, “建中 원년(780) 7월에 中人에게 조서를 내려 유안을 사사하였다. 19일이 지난 뒤에야 사사하는 조서가 하달되었으며 또한 그의 죄상을 폭로하니, 천하가 이를 원망하였다. 淄靑節度使 李正己가 표문을 올리기를 ‘유안을 너무 급작스럽게 죽여 그 실정을 살피지 아니하고 먼저 죽인 뒤에 조서를 내렸으니 천하 사람들이 놀라고 한탄하여 을 청합니다.’ 하였으나, 회보하지 않았다.
형벌을 사용함이 애매할 경우에 그 피해가 가볍지 않습니다. 사례가 멀지 않으니, 마땅히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역주
역주1 여우처럼……태도 : 원문의 ‘狐疑’를 풀이한 말이다. 의심이 많아 결행하지 못함을 비유할 때 흔히 쓰이는 표현으로, 屈原의 〈離騷〉에 “마음은 머뭇머뭇 의심도 많아서[心猶豫而狐疑兮]”라고 하였다.
역주2 劉晏이……탓에 : 劉晏은 字가 士安이고, 曹州 南華(지금의 山東省 菏澤市) 사람으로, 理財에 매우 밝아 안사의 난 이후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렸으며 吏部尙書․同平章事․領度支 등을 역임하고 彭城縣開國伯에 봉해졌다. 建中 원년(780) 참소를 당해 自盡하였으며, 후일 鄭州刺史에 추증되고 司徒로 임명되었다. 본문의 내용은 劉晏과 楊炎 사이에 있었던 오랜 정쟁과 관련되어 있다. 유안이 이부상서로 있을 때 侍郞이었던 양염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양염은 자신의 인척이었던 元載가 죄를 얻어 죽게 되자 그 배경에 유안의 역할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덕종 즉위 이후 오랫동안 이권을 차지하게 된 유안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자 양염은 유안이 代宗의 后妃를 세우는 과정에 개입했다는 풍문을 근거로 문제를 제기하였다가 ‘사안이 분명치 않고 이미 사면된 일’이라는 崔祐甫의 반론에 막혔다. 이에 이부상서에게 집중된 이권을 분산해야 한다고 건의하여 유안을 忠州刺史로 죄천시켰다. 또한 荊南節度使 庾準이 양염의 뜻에 따라 유안이 朱泚와 내통하였다고 고변하자 덕종은 결국 유안에게 自盡하도록 하였는데, 천하가 그 일을 원통하게 생각하였다.(≪新唐書≫ 〈劉晏傳〉, 〈楊炎傳〉)
역주3 그의 처자를……것 : ≪新唐書≫ 〈楊炎傳〉에 따르면 유안이 죽은 뒤 그의 처자를 嶺表로 이주시켰다고 하였다.

당육선공주의(2) 책은 2023.01.1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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