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宗始年
에 亦親聽納
이라 故當時翕然歸美
하여 以爲有貞觀之風
注+① 高宗永徽元年, 上召朝集使謂曰 “朕初卽位, 事有不便於百姓者, 悉宜陳. 不盡者, 更封奏.” 自是月引刺史十人入閤, 問以百姓疾苦及其政治. 長孫無忌與褚遂良同心輔政, 上亦尊禮二人, 恭己以聽之, 故永徽之政, 百姓阜安, 有貞觀之遺風.이라하고 兼賴遺澤在人
하며 先範垂裕
하니
幸無改作하여 俗以阜康하니 數十年間에 天下無事러니
承平之業이 滋久에 倦勤之意가 頗彰하사 燕居益深하시고 接下彌簡하시니
前哲之
이 浸遠
하고 中宮之威柄
이 潛移
하여 卒有嗣聖臨朝
하고 天授革命
注+② 則天紀云 “高宗自顯慶後, 多苦風疾, 后遂參豫國政, 上不能制. 高宗崩, 皇太子卽位, 是爲中宗. 光宅元年正月癸未, 改元聖, 三月戊午, 廢中宗爲廬陵王, 幽之. 己未, 立豫王旦爲皇帝, 皇太后仍臨朝稱制. 天授元年九月壬午, 改國號曰周, 加尊號曰聖神皇帝, 降皇帝爲皇(似)[嗣], 賜姓武氏, 立武氏七廟于神都.”하니
豈不以經邦之道가 闕疇咨於大猷하고 宴樂之懷가 溺偏信於近狎하여 馴致禍變하여 幾將傾邦하니
弊俗一靡
하니 餘風遂流
하여 訖神龍景雲之間
토록 皆嬖倖亂朝
注+③ 中宗神龍二年, 改元景龍. 時韋皇后․安樂公主․昭容等用事, 皆私賣官, 行墨勅斜封.하고 聰明不達
이러니
2-3-10
고종高宗의 처음에 역시 친히
청납聽納하셨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찬미하여
정관貞觀 연간의 풍모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注+① 貞觀之風:高宗 永徽 원년(650)에 上이 를 불러서 말하기를 “짐이 갓 즉위하였으니, 일 가운데 백성에게 불편한 것이 있으면 빠짐없이 모두 진술하라. 다 진술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다시 封書로 上奏하라.”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다달이 刺史 10인을 불러다 하게 하여 백성의 疾苦와 그 지역의 정치에 대해 물었다. 長孫無忌는 褚遂良과 한마음이 되어 정치를 보좌했으므로, 상도 역시 두 사람을 존중하고 예우하여 스스로를 낮추어 공손한 태도로 그들의 말을 들었다. 그러므로 永徽의 정치에 백성들이 부유해지고 편안하여 貞觀의 遺風이 있었다. 게다가 선대에 남긴 은택이 백성에게 있고 선대에 남긴 법에 힘입었습니다.
다행히 이를 고치지 않아서 백성들이 풍요롭고 안락하였습니다. 이에 수십 년 사이에 천하에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武后
그러나 태평한 기업이 점점 오래되어 근정勤政에 게을리하는 뜻이 자못 드러나서 침전에 거처하는 일이 더욱 많아지고 신하를 인견하는 일이 더욱 적어졌습니다.
선대
현군賢君의 밝은 빛이 차츰 멀어지고,
의 권력이 은밀히 옮겨와서 마침내 〈
무후武后가〉 황위를 이어
하고 하늘을 받들어
명命을 바꾸니,
注+② 卒有嗣聖臨朝 天授革命:≪新唐書≫ 〈則天紀〉에 “高宗은 연간 이후로 풍질을 심하게 앓는 일이 많았다. 武后가 마침내 국정에 참여하였는데, 상이 제어할 수가 없었다. 고종이 붕어하자 황태자가 즉위했는데, 이가 바로 中宗이다. 光宅 원년(684) 정월 癸未日에 嗣聖으로 改元하고, 3월 戊午日에 중종을 폐위하여 廬陵王이라 하고 유폐하였다. 己未日에 豫王 李旦을 皇帝로 세웠으나 皇太后가 여전히 하였다. 天授 원년(690) 9월 壬午日에 국호를 周로 바꾸고, 尊號를 더하여 聖神皇帝라고 하고는, 황제를 강등하여 皇嗣로 삼고, 武氏의 성을 하사하고, 武氏七廟를 神都(洛陽)에 건립했다.” 하였다.
국가를 경영하는 방도가 신하들에게 방책을 묻는 일을 결여하게 되고 연회를 즐기려는 마음이 친압하는 무리를 믿는 데서 점점 깊어져서 화란禍亂에 임박하여 거의 장차 나라를 전복시킨 것이 어찌 아니겠습니까.
비록 〈현재의〉 난리가 이로부터 일어난 것이 아니지만 그 잘못은 똑같습니다.
퇴폐한 풍속이 한 번 일어나자 남은 풍속이 마침내 유전되어
․
의 연간에 이르도록 모두
폐행嬖倖이 조정을 어지럽혀서
注+③ 嬖倖亂朝:中宗 神龍 2년(706), 景龍으로 改元하였다. 이때 ․․ 등이 권세를 부려, 모두 사사로이 官爵을 팔고 을 행하였다. 임금의
총명聰明이 사방에 도달하지 못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