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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陸宣公奏議(2)

당육선공주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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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齊暎齊抗官狀
本傳 “映, 瀛州高陽人. 擧進士, 博學宏辭中之. 鳳翔張鎰辟爲判官.
會德宗出奉天, 鎰懦緩不知兵, 部將李楚琳者, 欲爲亂. 映與齊抗請先事誅之, 鎰不從, 爲楚琳所殺, 映遂奔奉天.”


3. 제영齊暎제항齊抗의 관작을 논하는 주장奏狀
신당서新唐書≫ 〈제영전齊映傳〉에 영주瀛洲 고양高陽 사람이다. 진사進士에 올라 박학굉사과博學宏辭科에 합격했다. 봉상鳳翔장일張鎰벽소辟召하여 판관判官으로 삼았다.
마침 덕종德宗봉천奉天으로 파천했을 때, 장일은 유약하여 군사의 일을 알지 못했는데, 부장部將 이초림李楚琳이 난을 일으키고자 하자, 제영이 과 함께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를 주벌하기를 청하였는데도, 장일이 따르지 않았다가 이초림에게 살해당하니, 제영이 마침내 봉천으로 달아났다.” 하였다.


역주
역주1 齊暎 : 747~795. 齊映으로도 표기한다. 瀛州 齐氏로, 瀛州 高阳(지금의 河北 高阳) 사람이다. 大曆 4년(769) 己酉科에 状元을 하였다. 처음에 河南府参军을 제수받았고, 뒤에 令狐彰, 马燧, 张镒의 幕府属官을 지냈다. 관직은 中书舍人에 이르렀다. 贞元 2년(786) 中书侍郞 同平章事를 담당하여 宰相이 되었다. 재상으로 있은 지 한 해 만에 张延赏과 不睦하여 夔州刺史로 좌천되었다. 뒤에 衡州刺史, 桂管观察使, 江西观察使를 지냈다. 贞元 11년(795) 병으로 죽으니, 향년은 48세였다. 禮部尙书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忠 혹은 恭懿이다. 建中 4년(783) 泾原兵变이 있을 때, 凤翔将领 李楚琳이 기회를 엿보아 난을 일으켰는데, 제영은 同僚 齐抗과 함께 변고가 있음을 살펴, 장일에게 하루빨리 이초림을 제거하라고 권하였다. 하지만 장일은 그 말을 듣지 않았는데, 이초림이 습격하여 장일을 죽이고 叛軍에 响应하였다. 제영은 간신히 奉天으로 탈출하여, 御史中丞에 제수되었다. 兴元 원년(784) 덕종이 梁州(지금의 陝西 汉中)로 달아나자, 제영은 沿路置顿使에 임명되어, 연로의 숙식을 제공하는 일을 맡아, 양주에 이른 후에는 给事中에 배수되었다. 이해 7월, 官军이 반란을 평정하자, 제영은 어가를 호종하여 서울로 돌아갈 때 연로에서 덕종을 좌우에서 시종하고, 때로는 어가의 前導를 맡아 中书舍人에 改任되었다. 贞元 2년(786), 제영은 左散骑常侍 刘滋, 给事中 崔造와 함께 宰相의 반열에 들어, 中书舍人 同平章事를 맡았으며, 뒤에 中书侍郞에 개임되고 河间县男에 봉해졌다. 곧이어 덕종이 재상들에게 六部의 사무를 분담하게 했는데, 제영은 兵部를 관장했다. 당시 左僕射 张延赏이 늘 정무에 간섭하고 친속을 위해 관직을 구하였으나, 제영은 거절했다, 이에 장연상은 원한을 품고 덕종에게 제영에게는 재상의 재주가 없다고 공언하여, 덕종은 마침내 제영의 재상직을 면하였다.
역주2 齊抗 : 740~804. 字는 遐举로, 瀛州 高阳(지금의 河北省 高阳) 사람이다. 监察御史, 侍御史, 户部员外郞, 仓部郞中 등을 역임했다. 뒤에 德宗이 불러서 中书侍郞 同中书门下平章事에 제수되었다. 정무는 지극히 정밀함을 추구하였으나 远智와 大略은 없었다. 이후 파직되어 太子宾客이 되었다. 同族인 齐映과 같은 시기에 재상을 지냈다. 시호는 成이다. 글씨에 능하여 〈唐缑氏赵道光碑〉를 썼다.

당육선공주의(2) 책은 2023.01.1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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