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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陸宣公奏議(1)

당육선공주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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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육선공주의(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梁岷之間 窮隘特甚하여 輦輓攸止 資奉實難하니
凡在戀主之誠 各懷徯后之志일새 是以延賞奉迎於西蜀注+① 張延賞累拜荊南․劍南․西川節度使. 德宗在奉天, 貢獻相踵于道. 及次 劍․蜀爲根本, 卽拜中書門下平章事, 見本傳.하고 韓滉 望幸於東吳注+② 本傳云 “滉爲鎭海軍節度使. 帝狩梁 獻縑十萬疋. 滉聞京都未平, 乃築石頭五城. 修塢壁, 起建業, 抵京峴, 樓雉相望. 以爲朝廷有永嘉南走事, 置館第數千於石頭城.하니 此乃臣子之常情이요 古今之通
蕭復所請 亦類於斯하니 事雖非宜 意則可恕니이다
李充 頃任御史 臣嘗與之同寮호니 其人 是故福建觀察使李椅之男이라
共承昭하여 房從已遠이요 才頗通敏하고 性亦溫恭하여 宗族之中 足稱佳器
伏願更廣詢訪하시면 方驗臣言不誣하리이다 謹奏


5-4-3 양주梁州민산岷山의 사이가 외지고 협소하기가 특히 심하여 어가가 머무르는 곳에 물자를 바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무릇 군주를 그리워하는 정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각자 우리의 임금을 기다리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연상張延賞서촉西蜀에서 받들어 맞이하고注+① 延賞奉迎於西蜀:張延賞이 荊南, 劍南, 西川의 節度使를 연이어 배수하였다. 德宗이 奉天에 있을 때 그가 바친 공물이 계속 이어졌다. 梁州에 머물렀을 때 劍南과 蜀을 의지하여 근본으로 삼았으며, 곧 中書門下平章事에 배수하였다. 이는 ≪新唐書≫ 〈張嘉貞傳〉에 보인다. 한황韓滉동오東吳에 행차하시길 바랐던 것이니,注+② 韓滉 望幸於東吳:≪新唐書≫ 〈韓滉傳〉에 “韓滉이 鎭海軍節度使가 되었을 때 황제가 梁州로 거둥하니 비단 10만 필을 바쳤다. 한황은 京都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石頭에 다섯 성을 쌓았다. 성벽을 개수하여 建業으로부터 京峴에 이르기까지 망루와 城堞이 연달았다. 조정에 과 같은 일이 곧 있을 것이라 여겨 石頭城에 관사와 주택 수천 채를 세웠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신하된 자의 일반적 정리이고 고금에 통하는 예입니다.
소복이 청한 것도 이와 유사하니, 일이 비록 마땅하진 않으나 뜻은 용서할 만합니다.
이충李充이 잠깐 어사御史를 맡았을 때 신이 일찍이 그와 동료였으니, 그 사람은 복건관찰사福建觀察使 이의李椅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승소와는 이미 먼 방계이고, 재주는 제법 통달하고 민첩하며 성품도 온화하고 공손하여 종족들 가운데 훌륭한 재목이라고 일컬을 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널리 의견을 구하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신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것입니다. 삼가 아룁니다.
평설評說건중建中 말년 이부상서吏部尙書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임명된 소복蕭復은 궁정의 일밖에 모르는 환관宦官에게 감군監軍의 역할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간했다. 또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눈치만 보는 노기盧杞의 행동을 보고 덕종德宗의 면전에서 그의 잘못을 꾸짖었다. 이 일로 덕종은 ‘소복이 자신을 무시한다.[蕭復頗輕朕]’고 여겨 마침내 이듬해(흥원興元 원년(784)) 정월 강남선무사江南宣撫使로 파견보냈다.(≪구당서舊唐書≫ 권125 〈소복전蕭復傳〉) 소복이 강남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이회광李懷光이 반란을 일으킬 움직임이 없었으며, 덕종 역시 봉천奉天을 떠나 양주梁州로 파천할 뜻도 없었다. 그 뒤 강릉江陵을 순시할 무렵에 덕종이 산남山南으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소복은 주사관奏事官 이충李充을 덕종에게 보내 강릉으로 옮길 것을 청했다. 소복이 보기에 산남은 양주梁州민산岷山 사이에 끼어 있어 지리 조건이 좋지 않고 물자도 부족한 반면에 강릉은 교통이 편리하고 물자도 풍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릉은 남조南朝소찰蕭詧서량西梁을 세운 이래 대대로 소씨蕭氏의 근거지였으므로 그 어느 곳보다 믿을 만한 곳이었다. 그러나 소복을 강남선무사로 내보낼 때부터 이미 그를 멀리하려고 작정했던 덕종은 오히려 강릉의 이러한 조건 때문에 더욱 소복을 의심하게 되었으며, 심지어 소복이 파견한 이충까지 의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로 볼 때 덕종이 “표장 속에 담긴 의도를 살펴 잘 헤아려 상주하라.”고 한 것은 상당히 의도적인 표현으로, 육지로 하여금 자신의 의중을 읽고 동의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육지는 덕종의 하문에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추형樞衡의 신분으로 사명을 받들어 선무하다가 갑자기 변고를 들었으니, 어찌 놀라고 근심하는 지경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소복이 재상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변호하였으며, 이충 역시 이승소李承昭와 무관한 인물임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덕종의 혐의가 부당한 것임을 드러냈다.


역주
역주1 (理)[禮] : 저본에는 ‘理’로 되어 있으나, ≪全唐文≫에 의거하여 ‘禮’로 바로잡았다.
역주2 (𦅀)[梁] : 저본에는 ‘𦅀’으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 〈張嘉貞傳〉에 의거하여 ‘梁’으로 바로잡았다.
역주3 (猗)[倚] : 저본에는 ‘猗’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 〈張嘉貞傳〉에 의거하여 ‘倚’로 바로잡았다.
역주4 永嘉……달아났던 것 : 西晋 永嘉 5년(311) 흉노의 침입을 피해 南京으로 천도하여 東晉이 세워진 사건을 가리킨다. 이를 역사상 ‘永嘉의 난’이라 한다. 또 대량의 이주민이 발생해 강남 지역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므로 ‘衣冠南渡’라고도 일컫는다.
역주5 (定)[州] : 저본에는 ‘定’으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 〈韓滉傳〉에 의거하여 ‘州’로 바로잡았다.

당육선공주의(1) 책은 2023.01.1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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