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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陸宣公奏議(2)

당육선공주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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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量處置竇參事體狀
本傳 “參無學術, 多立親黨, 尤愛族子申. 參與吳通兄弟, 幷申舅嗣虢王則之, 皆與陸贄有隙, 遂共譖贄.
帝得其姦, 逐申爲道州司馬, 參州別駕. 宣武劉士寧餉參絹五千, 湖南觀察使李巽以狀聞, 又中人爲之驗左.
帝大怒, 以爲外交戎臣, 欲殺之. 贄雖怨, 然亦以殺之太重, 乃貶驩州別駕, 逐其男, 沒入貲産奴婢.”


2. 을 처분하는 사체事體상량商量하여 올린 주장奏狀
신당서新唐書≫ 〈두참전竇參傳〉에 “두참竇參은 학술이 없고 친당親黨을 많이 세웠으며 더욱이 족자族子을 아꼈다. 두참과 오통현吳通玄 형제 및 두신의 외삼촌인 가 모두 육지陸贄와 틈이 벌어지자 마침내 함께 육지를 참소하였다.
덕종德宗은 그들의 간악함을 깨달아 두신을 도주사마道州司馬로, 두참을 침주별가郴州別駕로 내쫓았다. 선무절도사宣武節度使 유사영劉士寧이 두참에게 비단 5천 필을 뇌물로 주었는데, 호남관찰사湖南觀察使 이손李巽은 이 일을 알렸으며 또한 중인中人(환관)들이 그를 위해 증언을 하였다.
황제가 크게 노하여 밖으로 무장들과 내통하였다고 하여 두참을 죽이려 하였다. 육지는 비록 두참을 원망하였지만 또한 그를 죽이는 일은 너무 무겁다고 하니, 황제가 이에 환주별가驩州別駕로 폄적하고 그의 자식을 내쫓았으며 자산과 노비를 몰수하였다.”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竇參 : 字는 时中, 雍州 平陵(지금의 陝西省 咸阳市) 사람이다. 蔭職으로 관직에 나아가 中書侍郞同平章事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음험하고 강퍅하였으며 조정에 親黨을 만들어 권세를 믿고 탐욕을 부렸으며, 郴州別駕로 폄직되었다. 이때 宣武軍節度使 劉士寧으로부터 비단을 받은 일로 덕종의 노여움을 사서 사사될 뻔했다가 陸贄가 구원해준 덕분에 목숨을 구하였지만 결국 竇申의 일에 연좌되어 賜死되었다.(≪舊唐書≫ 〈竇參傳〉)
역주2 竇申 : 宰相 竇參의 族子로 蔭職으로 관직에 올라 給事中에 이르렀다. 두참의 총애를 받아 관직을 제수할 때 함께 의논하는 일이 잦았으므로 당시 관리들은 두신이 방문하면 ‘喜鵲’이 왔다고 하였다고 한다. 이를 안 덕종의 노여움을 사 道州司馬로 좌천되었다가 두참이 사사된 뒤 杖殺되었다.(≪舊唐書≫ 〈竇申傳〉)
역주3 嗣虢王 : ‘嗣王’은 당나라 때 처음 만들어진 封爵制度로, 郡王보다는 높고 親王보다는 낮다. 唐나라의 爵位는 親王․嗣王․郡王․國公․郡公․縣公․縣侯․縣伯․縣子․縣男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國公 이하로는 모두 앞에 ‘開國’이라는 호칭이 덧붙었다. 李則之의 집안은 증조부 李邕이 虢王 李鳳의 뒤를 이어 嗣王에 봉해진 이래 누대에 걸쳐 사왕에 봉해졌다.(≪舊唐書≫ 〈李居傳〉)
역주4 李則之 : 唐나라의 宗室로, 高祖 李淵의 후손이며 嗣虢王 李巨의 아들이다. 학문을 좋아하여 50여 세의 나이에도 太學에 나아가 강의를 듣는 것을 본 嗣曹王 李皋의 추천으로 左金吾衛大將軍이 되었다. 이로부터 외조카인 竇申과 가깝게 지내다 昭州司馬로 폄직되었다.(≪舊唐書≫ 〈李則之傳〉)
역주5 (元)[玄] : 저본에는 ‘元’으로 되어 있다. 宋나라는 시조의 이름인 玄朗을 피휘하여 元으로 썼는데, 여기서는 ‘玄’으로 바로잡았다.
역주6 [郴] : 저본에는 ‘郴’이 없으나, ≪新唐書≫ 〈竇參傳〉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당육선공주의(2) 책은 2023.01.1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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