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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陸宣公奏議(1)

당육선공주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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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육선공주의(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臣初奉使諭旨 本緣糧賜不均注+① 晟本傳 “懷光謀沮撓晟軍, 卽奏言 ‘神策兵給賜比方鎭獨厚, 衆皆以爲言. 惟陛下裁處.’ 懷光欲晟自削其軍, 則易撓. 帝遣陸贄詔懷光, 令與晟議. 懷光曰 ‘廩賜不均, 軍何以戰.’ 贄數顧晟, 晟曰 ‘公乃元帥, 軍政得專之. 晟將一軍, 唯公所命.’ 懷光計塞, 乃止.”이러니
偶屬移軍하여 事相諧會하고 又幸懷光 詭對하여 且無阻絶之言하니 機宜合幷하여 若有幽贊하니
一失其便하면 後何悔追리오 伏望聖聰 速垂裁斷하소서 謹奏


4-5-4 이 처음에 사명使命을 띠고 가서 선유宣諭한 것은 본시 식량과 하사품이 균평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注+① 臣初奉使諭旨 本緣糧賜不均:≪新唐書≫ 〈李晟傳〉에 “李懷光은 모략을 써서 李晟의 군대를 저상시키고 동요시키려 하여, 곧바로 상주하여 말하기를 ‘神策軍의 병사에게 급여하고 하사하는 물품이 方鎭의 군사에 비해 유독 후하여서, 군사들이 모두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부디 폐하께서 재결하여 처리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이회광은 이성이 직접 자기의 군사들에게 주는 물품을 감삭하게 하면 군사들이 원망하여 쉽게 동요하리라 여겼다. 황제는 陸贄를 보내서 이회광에게 조칙을 내리고, 그에게 이성과 상의하게 하였다. 이회광은 말하기를 ‘봉록과 하사품이 같지 않거늘, 군사들이 어찌 싸우겠는가?’라고 하였다. 육지가 거듭 이성을 돌아보자, 이성은 말하기를 ‘공은 元帥이므로, 軍政을 총괄하시고 저는 그 한 軍을 거느리고 있으므로 오로지 공이 명하는 바를 따르겠습니다.’ 하자, 이회광은 계략이 막혀 마침내 그만두었다.” 하였다.
마침 군사를 옮기는 때를 당하여, 일이 서로 딱 맞았고, 또 다행히 이회광李懷光이 거짓말로 대답하여 장차 거절하는 말이 없었으니, 기회와 사의事宜가 모두 어우러져서, 마치 이 있는 듯합니다.
한 번 그 유리한 시기를 놓친다면, 뒷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부디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속하게 재결하소서. 삼가 아룁니다.
평설評說】 ≪자치통감資治通鑑≫의 기록에 따라 육지陸贄의 상소가 있게 된 전후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회광李懷光산동山東에서 난리에 달려와 자주 사람들에게 노기盧杞조찬趙贊백지정白志貞의 간사하고 아첨함을 말하고 “내가 을 뵈면 마땅히 이들을 죽일 것을 청하겠다.” 하였다. 이후 이회광은 봉천奉天의 포위가 풀리자 자신의 공을 자랑하여 이 반드시 특별한 예로 대접할 것이라고 여겼다. 혹자가 이회광의 말을 노기에게 고하자 노기가 두려워하여 에게 “만약 이회광으로 하여금 승세를 타고서 장안長安을 탈취하게 한다면 일거에 적을 섬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들어와 조회하도록 허락한다면 반드시 잔치를 베풀어서 여러 날 동안 머물게 될 것이니, 적으로 하여금 경성京城에 들어가서 조용히 대비하게 한다면 도모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다. 덕종德宗은 그 말에 따라 이회광에게 군대를 이끌고 편교便橋에 주둔하여 이건휘李建徽이성李晟과 함께 기일을 정해서 장안長安을 취하도록 명하였다. 이회광은 서운해하며 “내 이제 이미 간신의 배척을 당하였으니, 앞으로의 일을 알 만하다.” 하고는 군대를 이끌고 떠나 노점魯店에 이틀을 머물다가 길을 떠났다. 이회광이 군대를 주둔하여 장안長安으로 전진하지 않고 여러 번 표문表文을 올려 노기 등의 죄악을 폭로하자 여론이 비등하였다. 덕종은 부득이하여 12월에 노기를 신주사마新州司馬로, 백지정을 은주사마恩州司馬로, 조찬을 파주사마播州司馬로 좌천시켰다. 다음 해(갑자, 784) 연호를 흥원興元으로 바꾸었는데, 그 2월에 이회광이 조정을 협박하여 노기 등을 축출시킨 뒤에 자신의 처지에 불안을 느껴 딴마음을 품고, 또 이성이 성공할까 두려워해서 이성의 군대와 연합할 것을 조정에 주청奏請하니, 덕종이 조서를 내려 허락하였다. 이회광이 함양咸陽에 주둔하여 여러 날 머물면서 은밀히 주자朱泚와 서로 공모하다가 이러한 사실이 탄로가 났다. 이성은 “이회광이 변고가 있어서 군대가 그에게 합병될까 두려우므로, 군대를 동쪽 위교渭橋로 옮길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덕종은 그의 말을 따랐다. 정묘일丁卯日(2월 26일)에 이회광이 그의 장수 조승란趙昇鸞을 보내어 봉천성奉天城을 침입하였다. 혼감渾瑊이 덕종에게 사실을 아뢰고 급히 어가御駕를 남쪽 양주梁州로 행차하게 할 것을 청하자, 덕종이 그의 말을 따랐다. 이성을 하중동강절도사河中同絳節度使에 제수하고 평장사平章事를 가하였다. 이성은 장수와 속관들에게 이르기를 “장안長安종묘宗廟가 있는 곳이고 천하의 근본이니, 만약 제장諸將들이 모두 황제를 따라 가면 누가 적을 섬멸한단 말인가.” 하고는 마침내 해자垓子를 수리하고 갑옷과 병기를 수선하여 경성京城을 수복할 계책을 하였다. 이때 이회광과 주자가 병력을 연합하여 성세聲勢가 매우 성하였다. 이성은 안으로는 물자와 군량이 없고 밖으로는 구원하는 세력이 없었으나 단지 충의忠義로써 장병들을 감동시키고 격려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군대가 비록 형세가 고단하고 힘이 약하였으나 예기銳氣가 쇠하지 않았다. 이회광의 군세가 약화되자, 주자가 이회광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신하의 예로 대하고 또 그의 군대를 징발하였다. 이회광은 안으로는 휘하들이 변란을 일으킬까 걱정하고 밖으로는 이성이 습격할까 염려하여, 군영을 불태우고 동쪽 하중河中으로 도망하였다.


역주
역주1 신명의……도움 : ≪陸贄集≫(中華書局, 2006) 石川安貞(日本)의 註에 “幽贊은 神의 도움이란 뜻이다.” 하였다. ≪周易≫ 〈說卦傳〉에 “옛날에 성인이 易을 만들 적에 그윽이 신명을 도와 시초를 내었다.[昔者 聖人之作易也 幽贊於神明而生蓍]”라고 하였다.
역주2 (上意)[士怨] : 저본에는 ‘上意’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 〈李晟傳〉에 의거하여 ‘士怨’으로 바로잡았다.
역주3 (往)[臨] : 저본에는 ‘往’으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 〈李晟傳〉에 의거하여 ‘臨’으로 바로잡았다.

당육선공주의(1) 책은 2023.01.1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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