願陛下
는 姑務含弘
하사 普安反側
하시고 促駕遄止
하사 錄功犒勤
하시고 敷
之恩
하시며 布惟新之令
하신
然後徵韋皐楚琳
하여 俾入分文武之職
하고 擇元勳宿望
하여 命出總岐隴之師
하시면 則彼承詔欣榮
하여 奔走不暇
하리니 安敢
하여 復勞誅鉏
하리잇고
措置得宜하면 萬無一跌이니 何遽過動하여 不爲後圖리오 仰希睿聰은 試更詳慮하노이다 謹奏라
6-8-6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우선 관대함에 힘쓰시어 불순한 뜻이 있는 자들을 널리 안정시키고, 어가를 재촉하여 빨리 돌아가셔서 공적이 있는 자를 녹용하고 수고한 자를 위로하며, 사면의 은택을 베푸시고 정치를 쇄신하는 조령詔令을 내리소서.
그런 연후에
와
이초림李楚琳을 불러서 문관과 무관의 직책에 나누어 들이고 큰 공이 있는 자와 오랜 명망이 있는 자를 택하여 나가서
기岐․
농隴의 군사를 총괄하게 하신다면, 저자들은 조칙을 받들고 기뻐하고 영광으로 여겨 급히 달려오느라 겨를이 없게 될 것이니, 어찌 감히 불만을 품고서 다시 주벌을 받는 것을 근심하시겠습니까.
조치措置가 마땅하면 만에 하나도 잘못될 일이 없으니, 어찌 갑작스레 지나치게 움직여서 훗날을 위해 도모를 하지 않으십니까. 우러러 성상께서 다시 자세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아룁니다.
【평설評說】 덕종德宗은 한중漢中에 이르자마자, 즉시 혼감渾瑊으로 이초림李楚琳을 대신하게 하여 봉상鳳翔에 진수鎭守하게 하려고 하였으나, 육지陸贄는 이 주장奏狀을 올려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초림은 나라가 어려운 틈을 타서 자신의 간교를 멋대로 부리고 군주를 적으로 돌리고 자리를 찬탈하여 그 지위에 있었던 자이지만, 일단 덕종은 그에게 장수의 백모白旄와 황월黃鉞을 수여하고 은총과 영광까지 주었으며 남쪽으로 파천함에 이르러서는 힘입은 바가 있었다. 육지가 보기에 행행行幸의 위세威勢로 인하여 그의 직을 바꾸어버린다면 이는 그를 포로로 붙잡는 것이나 같다고 환기시켰다. 그리고 지난날 한漢 고제高帝가 거짓으로 외유하자 한신韓信이 체포되고 공신功臣들이 줄이어 반란하여 천하가 거의 위태롭게 되어 분분하게 정벌을 해야 했고 심지어 대代가 끊기기까지 했던 사실도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논자들은 이초림을 혼감으로 대체하는 것을 권의權宜라고 하였지만, 육지는 덕종에게 함홍含弘을 힘써서 널리 반측反側의 자들을 안주시키고, 무의식적으로 범한 죄와 실수로 지은 죄를 용서하시는 은혜를 펴시고, 국가를 쇄신하는 명령을 선포하라고 청하였다. 1725년(영조英祖 원년) 11월 7일(신축) 영조는 진수당進修堂에서 소대召對하는 자리에 참찬관參贊官 조영세趙榮世 등이 입시하여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당唐 덕종본기德宗本紀〉를 진강하여, 이초림의 문제를 논하였다. 참찬관 조영세 이외에, 시독관侍讀官 이병태李秉泰, 검토관檢討官 권적權𥛚, 가주서假注書 윤득화尹得和, 기사관記事官 조명택趙明澤ㆍ박필현朴弼賢이 입시한 자리였다. 영조가 “육지가 이초림에 대해 논하였는데 유신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이병태는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역逆이나 순順의 논리로 따져 말한다면 이초림은 분명 역이므로 덕종이 마음으로 그를 미워하는 것도 실로 괴이할 것은 없습니다. 육지의 논의는 권도權道에 가까우므로 일절 도리에 응한 것이 아닌 듯하지만 당시 번진藩鎭에 대한 대우는 이적夷狄을 다스리는 방책과 같았습니다. 기미羈縻의 정책을 쓸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는 요컨대 일을 성공하는 것이 주가 되어야 하니, 이것이 곧 시의時義입니다. 하물며 관중關中의 적은 여전히 남아 있고, 이초림은 서촉西蜀의 목구멍에 해당하는 지역에 자리하고 있는데 거기다 더욱 배척하고 물리쳐 환란을 생각하는 마음을 돋운다면, 안팎으로 적을 맞아들이는 셈이 되어 나라가 장차 위험해질 것이니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육지의 방책은 실로 때의 기미를 살피고 반측反側하는 무리를 안심시키기 위한 데서 나온 것으로 변란에 대처하는 도리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합니다.” 영조는 “내가 육지의 말이 고식지계姑息之計에 가까운 것이 아닌지 의심하여 물은 것인데 유신의 말이 옳다.”라고 하였다. 이병태가 “신이 말씀드렸듯이, 육지의 말은 권도에서 나온 것인데, 이초림을 임시로 빌려 변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 한 것으로 그 당시의 시세가 실로 일절 도리가 행해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처리하는 것도 경도經道에 어긋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자, 영조가 이르기를 “육지가 이처럼 일에 대해 염려하는 것이 실로 깊으니 다른 사람이 따라갈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