臣
은 謂幽燕恒魏之寇
는 勢緩而禍輕
注+① 此謂田悅等.하고 汝洛滎汴之虞
는 勢急而禍重
注+② 此謂李希烈.하니
緩者는 宜圖之以計어늘 今失於屯戍太多하고 急者는 宜備之以嚴이어늘 今失於守禦不足하니 何以言其然也오
自
稱亂
하여 首起薊門
注+③ 逆傳 “安祿山, 營州柳城胡也, 明皇天寶十載冬十一月, 反范陽.”으로 中興已來
에 未暇芟蕩
하여 因其降將
하여 卽而撫之
하니
朝廷
이 置河朔於度外
가 殆三十年
注+④ 藩鎭傳 “安․史亂天下, 至肅宗大難略平, 君臣皆幸安, 故瓜分河北地, 付授叛將田承嗣等, 護養孽萌, 以成禍根. 亂人乘之, 遂擅署吏, 以賦稅自私, 不朝獻于廷. 效戰國肱髀相依, 以土地傳子孫.” 故朝廷置之度外. 自肅宗至德迄寶應凡七年, 自代宗廣德迄大曆凡十七年, 至德宗建中四年共二十六年, 故云殆三十年.이니 非一朝一夕之所急也
요
田悅
은 累經覆敗
에 氣沮勢羸
하여 偸全餘生
하여 無復遠略
注+⑤ 悅旣敗于雙岡, 復敗于水, 乃卑辭厚禮, 結好于朱滔․王武俊. 悅恃救至, 使康愔督兵與王師戰御河上, 大敗, 棄甲走城, 蹈藉死塹中者甚衆.하고
武俊
은 蕃種
이라 有勇無謀
注+⑥ 本傳 “武俊本出契丹, 善騎射, 與張孝忠齊名.”하고 朱滔
는 卒材
라 多疑少決
注+⑦ 本傳 “滔性變詐, 多端倪.”하여 皆受田悅誘陷
하여 遂爲猖狂出師
注+⑧ 田悅傳 “悅旣敗, 未幾, 王武俊殺李惟岳, 而深州降朱滔, 滔分兵守之. 德宗授武俊州刺史, 以康日知爲深․趙二州觀察使. 武俊恨賞薄, 滔怨不得深州, 悅知二將可間, 乃儳路使王侑․許則說滔合從, 滔大喜, 使侑先還告師期. 滔因使王郅說武俊, 武俊亦喜, 卽日使使報滔. 於是滔率兵二萬屯寧晉, 武俊以兵萬五千會之.”하나
事起無名에 衆情不附라 進退惶惑하며 內外防虞할새
所以纔至魏郊에 遽又退歸巢穴하여 意在自保요 勢無他圖하고
加以洪河太行이 禦其衝하며 幷汾洺潞가 壓其腹하니 雖欲放肆나 亦何能爲리오
又此郡兇徒가 互相劫制하여 急則合力하고 退則背憎하니 是皆苟且之徒라 必無越軼之患이니
希烈
은 忍於傷殘
하며 果於呑噬
하여 據蔡許富全之地
하고 益鄧襄鹵獲之資
注+⑨ 本傳 “希烈資慘害, 臨戰陣殺人, 血流於前, 而飮食自若也. 建中四年, 旣取汝州, 執李元平, 卽北侵汴州, 南略鄂州, 留其將姚憺戍鄧州, 復以兵圍襄城.”하여 意殊無厭
하고 兵且未衄
이라
東寇則轉輸將阻요 北窺則都城或驚이니 此臣所謂汝洛滎汴之虞는 勢急而禍重이니이다
1-1-16 신이 생각하기에
기세가 느려서 끼치는 화가 가볍고,
注+① 幽燕恒魏之寇 勢緩而禍輕:이는 田悅 등을 말한다. 여주汝州,
낙양洛陽,
형양滎陽,
변주汴州의 근심은 기세가 급하여 끼치는 화가 무겁습니다.
注+② 汝洛滎汴之虞 勢急而禍重:이는 李希烈을 말한다.
느린 것은 대책을 생각해야 하는데 지금 둔병屯兵이 너무 많은 데서 실책을 범하였고, 급한 것은 엄중하게 방비해야 하는데 지금 수비 병력이 부족한 데서 실수를 범하였으니, 어째서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호갈胡羯이 난(
안사安史의 난)을 일으켜 맨 처음
계문薊門(
계주薊州)에서 시작한 뒤로,
注+③ 胡羯稱亂 首起薊門:≪新唐書≫ 〈逆臣傳〉에 “安祿山은 營州의 柳城의 胡人이다. 玄宗 天寶 14년(755) 겨울 11월에 范陽에서 모반하였다.”라고 하였다. 국가가 중흥한 이래 섬멸할 겨를이 없어서 항복한 장수를 통해 나아가 달래었습니다.
조정에서
하삭河朔을 도외시한 지가 거의 30년이니,
注+④ 置河朔於度外 殆三十年矣:≪新唐書≫ 〈藩鎭傳〉에 “安祿山과 史思明이 천하를 어지럽혔는데, 肅宗 때 이르러 큰 난리를 그럭저럭 평정하여 군신이 모두 安存하게 되었다. 때문에 하북의 땅을 분할하여 叛將인 田承嗣 등에게 주었는데, 재앙의 싹을 길러서 화근을 이룬 것이다. 亂人들이 이에 편승하여 결국엔 멋대로 관리를 두어 사사로이 세금을 거두고 조정에는 바치지 않았다. 戰國時代의 제후들이 팔뚝과 넓적다리처럼 서로 도와서 토지를 자손에게 전한 것을 흉내내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 〈어쩌지 못하여〉 그들을 도외시하였는데, 그 기간이 肅宗 至德부터 寶應까지 도합 7년, 代宗 廣德부터 大曆까지 도합 17년, 德宗 建中 4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26년이기 때문에 ‘거의 30년’이라 말한 것이다. 하루아침에 급히 여긴 것이 아닙니다.
전열田悅은 여러 번 패배를 맛본 뒤에 기세가 꺾이고 세력이 약해져 구차하게 남은 목숨을 보전하느라 더는 심원한 모략이 없습니다.
注+⑤ 田悅……無復遠略:田悅은 雙岡에서 패하고 나서 다시 洹水에서 패하고 나자 겸손한 언사와 두터운 예물을 써서 朱滔, 王武俊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전열이 그들이 구하러 올 것이라는 것을 믿고 康愔으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조정의 군대와 御河 가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패하여 갑주를 버리고 성으로 달아나다 서로 짓밟고 垓子에 떨어져 죽은 이들이 매우 많았다.
왕무준王武俊은 오랑캐의 종자라서 용맹하지만 지략은 없고,
注+⑥ 武俊蕃種 有勇無謀:≪新唐書≫ 〈藩鎭鎭冀傳〉에 “王武俊은 본디 契丹(거란) 출신으로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것을 잘하여 과 함께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라고 하였다. 주도朱滔는 병졸이나 할 만한 자질이라서 의심이 많고 우유부단한 자로,
注+⑦ 朱滔卒材 多疑少決:≪新唐書≫ 〈藩鎭盧龍傳〉에 “朱滔는 속임수를 잘 썼고 눈치가 빨라 예측을 잘하였다.”라고 하였다. 모두 전열에게 유혹당하여 결국 미치광이(전열)를 위하여 출병하였습니다.
注+⑧ 皆受田悅誘陷 遂爲猖狂出師:≪新唐書≫ 〈田悅傳〉에 “田悅이 패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王武俊이 李惟岳을 죽였는데, 深州가 朱滔에게 항복하자 주도가 병력을 나누어 심주를 지켰다. 德宗이 왕무준에게 恒州刺史를 제수하고, 康日知를 深州와 趙州의 관찰사로 삼았다. 왕무준은 상이 박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고, 주도는 심주를 차지하지 못한 것에 원한을 품었다. 전열은 두 장수를 조정과 사이를 벌릴 수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이에 지름길로 王侑와 許士則(허사칙)을 보내어 주도에게 연합하자고 유세하였다. 주도가 크게 기뻐하여 왕유로 하여금 먼저 돌아가 출병한 날짜를 알리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주도가 王郅로 하여금 왕무준을 설득하게 하였는데, 왕무준도 크게 기뻐하여 그날로 사자를 보내 주도에게 알렸다. 이리하여 주도는 병사 2만을 거느리고 寧晉에 주둔하였고, 왕무준은 병사 1만 5천으로 그와 만났다.”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명분 없이 일을 벌인지라 사람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으니, 나아가고 물러나는 데에 두렵고 당혹해하며 안팎으로 근심을 막기 바쁩니다.
때문에 겨우 위주魏州의 교외에 이르렀지만 갑자기 다시 소굴로 물러나서 스스로 보존하는 데 뜻을 두고 있으니, 형세상 다른 것을 꾀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황하黃河와 태항산太行山이 그 길목을 막고, 병주幷州, 분주汾州, 명주洺州, 노주潞州가 앞을 누르고 있으니, 아무리 활개를 치고자 하더라도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이 고을의 흉도는 서로 간에 무력으로 유지되어 급하면 힘을 합치다가도 물러나면 뒤에서 미워하니, 이들은 모두 구차한 무리들로서, 이곳을 벗어날 염려는 절대로 없습니다.
이것이 신이 언급한 “유주, 연주, 항주, 위주의 도적은 기세가 느려서 끼치는 화가 가볍다.”는 것입니다.
이희열李希烈은 잔인하게 해치고 과감하게 집어삼켜서
채주蔡州와
허주許州의 부유하고 온전한 땅에 근거하고
등주鄧州와
양주襄州에서 노획한 물자를 더하여
注+⑨ 希烈……益鄧襄鹵獲之資:≪新唐書≫ 〈逆臣傳〉에 “李希烈은 품성이 慘酷하고 잔인하여 軍中에서 사람을 죽여 눈앞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태연하게 먹고 마셨다. 建中 4년(783)에 汝州를 취한 뒤 李元平을 사로잡고서 곧장 북쪽으로 汴州을 침범하였으며 남쪽으로 鄂州를 공략한 다음 그의 장수인 姚憺을 남겨두어 鄧州를 지키도록 하고, 다시 병사를 거느리고 襄城을 포위하였다.”라고 하였다. 뜻은 전혀 만족을 모르고 군병들은 또 기세가 꺾이지 않았습니다.
동쪽을 침범하면 수송이 막히게 되고, 북쪽을 엿보면 도성이 놀라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신이 언급한 “여주, 낙주, 형양, 변주의 근심은 기세가 급하여 끼치는 화가 무겁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