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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陸宣公奏議(1)

당육선공주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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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육선공주의(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興元論解姜公輔狀
本傳云 “公輔素有高材. 德宗幸奉天, 擢爲諫議大夫同中書門下平章事.
帝徙梁, 長女唐安公主道薨. 主性仁孝, 許下嫁韋宥, 以播遷未克也.
帝悼之甚, 詔厚其葬. 公輔諫曰, 卽平賊, 主必歸葬, 今宜從儉, 以濟軍興.
帝怒其賣直, 欲罷公輔, 故贄力救解之, 帝終不聽, 遂下遷太子左庶子.”


1. 에서 강공보姜公輔의 의혹을 해명하여 논하는 주장奏狀
신당서新唐書≫ 〈강공보전姜公輔傳〉에 이르기를 “는 평소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덕종德宗봉천奉天으로 거둥한 후 그를 간의대부諫議大夫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발탁하였다.
황제가 양주梁州로 행재소를 옮길 때 장녀인 가 도중에 죽었다. 공주는 성품이 인효仁孝하여 위유韋宥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했지만 파천으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다.
황제가 몹시 슬퍼하여 공주의 장례를 후하게 치르도록 조서를 내렸다. 강공보가 간하기를 ‘적을 평정하고 난 뒤에 공주의 영구를 반드시 모시고 장안으로 돌아가 장례를 지내야 할 것이니, 지금은 마땅히 검소하게 하시어 군비를 조달하는 데 보태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강공보가 고 진노하여 그를 파직하고자 하였다. 때문에 육지가 힘써 구제하여 해명하였으나 황제가 끝내 듣지 않고 마침내 태자좌서자太子左庶子로 좌천시켰다.”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興元 : 梁州의 다른 이름으로 朱泚의 난을 피해 奉天으로 달아났던 德宗이 재차 梁州로 피신하였는데, 長安으로 돌아온 784년에 楊朱興元府로 개칭하고 연호도 興元이라 고쳤다. 여기에서는 연호가 아니라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역주2 姜公輔 : 字는 德文, 愛州의 속현인 日南(지금의 베트남 타잉화(Thanh Hóa), 중국 지명으로는 淸化) 출신이다. 建中 4년(783), 朱泚가 반군을 이끌고 奉天을 공격했을 때 護駕한 공으로 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그 뒤 德宗이 봉천에서 梁州로 피신하던 도중 가장 아끼던 唐安公主가 병사하였는데, 厚葬하라는 덕종의 지시에 반하는 간언을 올렸다가 ‘강직함을 팔아 명예를 취하고자 한다.[賣直取名]’고 지목되어 左庶子로 강등되었다가 右庶子로 옮겨졌으며, 泉州別駕로 좌천되었다. 順宗이 즉위한 뒤 吉州刺史에 배수되었으나 임소로 가는 도중에 죽었다.(≪舊唐書≫ 〈姜公輔傳〉)
역주3 唐安公主 : 德宗의 딸로, 모친은 昭德皇后 王氏이고, 顺宗의 여동생, 남편은 韦宥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효성스러워 덕종의 사랑을 받았다. 朱泚이 난을 피해 梁州로 가던 중 병사하자 상심한 덕종이 후하게 장례 지내고 唐安寺를 세워 기렸다. 贞元 15년(799) 공주로서는 최초로 韩国贞穆公主에 追谥되었다.
역주4 충직함을……한다 : 원문의 ‘賣直’을 풀이한 것으로, 陸贄의 〈又答論姜公輔狀〉에 그 용례가 처음 나온다.

당육선공주의(1) 책은 2023.01.1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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