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始皇이 據崤函之固하고 藉雄富之業하여 専力農戰하여 廣收材豪일새 故能芟滅暴强하고 宰制天下러니
功成志滿하여 自謂有泰山之安이라하고 貪欲熾然하여 以爲六合이 莫予違也라하여
於是에 發閭左之戍하고 徵太半之賦하여 進諫者를 謂之宣謗이라하고 恤隱者를 謂之收恩이라할새
故徵發
이 未終而宗社
가 已泯
注+① 食貨志 “始皇幷天下, 內興功作, 外攘夷狄, 收太半之賦, 發閭左之戌. 竭天下之資財, 猶未足以贍其欲也. 海內愁怨, 遂用潰畔.”하고 漢武帝
는 遇時運理平之會
하며 承文景勤儉之積
하여 內廣興作
하고 外張甲兵
하여 侈汰無窮
하여 遂至殫竭
하니
大搜財貨
호되 筭及舟車
注+② 食貨志 “武帝時, 商賈人軺車二筭, 船五丈以上一筭. 匿不自占, 占不 戍邊一歲, 沒入緡錢.”하니 遠近
이 騷然
하여 幾至顚覆
이러니
頼武帝가 英姿大度라 付任以能하고 納諫無疑하고 改過不吝하여
下哀痛之詔
하여 罷征伐之勞
하고 封丞相爲富民侯
하여 以示休息
注+③ 食貨志云.하니 邦本
이 揺而復定
하고 帝祚
가 危而再安
하며
隋氏
는 因周室平齊之資
注+④ 周乃後周, 即宇文泰之後. 齊乃北齊, 即高歡之後. 齊至後主, 爲周師所擒.하여 府庫
가 充實
하고 開皇之際
에 理尙
하니 是時
에 公私
가 豐饒
하여 議者
가 以比漢之文景
이러니
煬帝
가 嗣位
에 肆行驕奢
하여 竭耗生靈
호되 不知止息
일새 海內怨叛
하여 以至於亡
注+⑤ 隋食貨志 “文帝既平江表, 躬先儉約. 開皇十七年, 中外倉庫, 無不盈積, 至積於廊廡之下, 遂停此年賦, 以賜黎元. 煬皇嗣位, 肆情騁志, 窮極麗. 鑾和歲動, 從行宮掖, 常千萬人, 皆仰給縣官. 租賦之外, 一切斂. 不顧元元. 於是盜賊充斥, 天下大亂.”하니
此三君者는 其所憑藉가 豈不豐厚哉리오마는 此皆以縱欲殘人으로 竟致蹙喪하니 是所謂不節則雖盈이나 必竭之效也라
秦隋는 不悟而遂滅하고 漢武는 中悔而獲存하니 乃知懲與不懲과 覺與不覺이 其於得失에 相遠하고 復有存滅之殊하니
12-2-11 진秦 시황始皇은 험고한 효산崤山과 함곡관函谷關에 의거하고 부유한 기업을 바탕으로 삼아서, 농업과 전쟁에 온 힘을 쏟고, 널리 인재와 호걸들을 수용하였기 때문에, 능히 포악하고 강대한 나라를 섬멸하고 천하를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적이 이루어지고 뜻이 채워지자 스스로 천하가 태산처럼 안정되었다고 여겼고, 탐욕이 일어나자 천하 안에 나의 뜻을 거스를 자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에
를 징발하여 수자리를 살게 하고
간언을 올리는 자를 두고 ‘비방을 퍼뜨린다.’고 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자를 두고 ‘은혜를 모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징발이 끝나기도 전에 종묘사직이 사라졌습니다.
注+① 秦始皇……宗社已泯:≪漢書≫ 〈食貨志〉에 “시황제가 천하를 합병하고서 안으로는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바깥으로는 夷狄을 물리치며, 太半이 넘는 賦稅로 거두고, 閭左를 징발하여 수자리를 살게 하고, 그 욕망을 채우는 데에 충분하지 않았다.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고 원망하여 마침내 뿔뿔이 흩어지고 반란을 일으켰다.” 하였다. 한漢 무제武帝는
시운時運이 태평한 때를 만나고
문제文帝와
경제景帝가
근검勤儉으로 모은 재물을 받아서, 안으로는 널리
역사役事를 일으키고 바깥으로는 군대를 증강하여 사치스런 허비가 끝이 없어서 마침내 재물이 고갈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재화를 크게 모았는데 세금이 배와 수레에 미치니,
注+② 漢武帝……筭及舟車:≪漢書≫ 〈食貨志〉에 “漢 武帝 때 상인이 소유한 軺車에 2을 부과하고, 선박의 경우는 5丈 이상에 대해 1算을 부과하였다. 이것을 숨기고 스스로 보고하지 않거나 보고하되 사실대로 다 보고하지 않은 자는 변경에 1년 동안 수자리를 살게 하고 緡錢을 적몰하였다.” 하였다. 원근遠近의 지역이 모두 소란스럽게 되어 거의 국가가 전복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다행히 무제의 탁월한 재능과 큰 도량에 힘입어 능력에 따라 임무를 맡기고 의심 없이 간언을 받아들이고 과실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애통哀痛해하는
를 내리고 수고롭게 정벌하는 일을 그만두었고,
휴식休息하겠다는 뜻을 보이니,
注+③ 頼武帝……以示休息:≪漢書≫ 〈食貨志〉에서 운운하였다. 국가의 근본이 흔들렸다가 다시 안정되고
제위帝位가 위태로웠다가 다시 편안하게 되었습니다.
수隋나라는
북주北周가
북제北齊를 평정하였던 바탕에 이어서
注+④ 周室平齊之資:周는 곧 後周(北周)이니, 바로 宇文泰의 후예이다. 齊는 곧 北齊이니, 바로 高歡의 후예이다. 北齊는 後主에 이르러 後周의 군사에게 사로잡혔다. 부고府庫가
충실充實하였습니다.
개황開皇 연간에는 정치는
청렴淸廉을 숭상하였으니, 이때에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풍요하여, 의론하는 자들은
한漢나라의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때에 견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수隋 양제煬帝가 제위를 계승하자 교만과 사치를 멋대로 행하여 백성들을 고갈시켰는데도 그만둘 줄을 몰랐기 때문에 천하의 사람들이 원망하고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注+⑤ ≪隋書≫ 〈食貨志〉에 “文帝가 이미 江南을 평정하고 나서 몸소 儉約을 솔선하였다. 開皇 17년(597)에 中外의 倉庫가 가득차지 않은 것이 없어서, 廊廡의 아래에까지 곡식을 쌓아두는 데에 이르렀다. 마침내 이해에 정해진 賦稅를 정지하여 백성들에게 내렸다. 煬皇(煬帝)이 제위를 이어서 제멋대로 하여 궁궐을 매우 크고 화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해마다 양제가 遊覽하였는데 수행하는 궁녀들이 늘 천 명 만 명이었다. 이들 모두 縣官에서 공급하여 租賦의 밖에서 모두 거두어들이니, 백성들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았다. 이에 도적들이 들끓어서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하였다.
이 세 군주들(진秦 시황始皇․한漢 무제武帝․수隋 양제煬帝)은 바탕으로 삼은 것이 어찌 넉넉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모두 탐욕을 멋대로 하여 백성을 해쳤기 때문에 끝내 〈바탕으로 삼은 것이〉 줄어들고 상실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절약하지 않으면 비록 재물이 가득하더라도 반드시 고갈된다.’는 증험입니다.
진秦나라와 수隋나라는 깨닫지 못하여 마침내 멸망하였고, 한漢 무제武帝는 중간에 후회하여 사직을 보존할 수 있었으니, 바로 징계하고 징계하지 못하는 것과 깨닫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 그 득실에 있어 서로 큰 차이가 있고 다시 보존하고 멸망하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