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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陸宣公奏議(2)

당육선공주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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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육선공주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近者劉元佐 驅攘巨猾하고 底復大梁하여 即鎭於兹 幾將十載
雖不能勤身節用하여 以撫疲甿하며 畢力竭誠하여 以揚丕烈이나
然尙號令由己하며 部屬畏威하여 緝修戎旅하고 振耀聲勢하여 遠邇談矚 且爲完軍이라 制持東方 猶有所倚러니
及元佐殂沒 朝廷 命吴湊代之注+① 藩鎭傳 “大中, 李靈曜據汴州反, 劉元佐乘其無備, 襲取宋州, 朝廷以爲刺史. 德宗初, 大破李納兵, 斬首萬餘級, 東南饟漕始通. 又破李希烈之衆. 入朝, 復兼涇原四鎭. 性豪縱, 輕財好厚賞, 故下益困.” 吳湊傳 “宣武劉元佐死, 以湊領節度使, 馳往代之. 未至, 汴軍亂, 立元佐子士寧. 湊還爲右金吾衛大將軍.”하시니 士寧兇頑 輙敢眦睚하니
素非得衆이요 且甚不材 緩之旬時 必自離沮 隨機制馭 指顧可平이어늘
陛下 念深黎元하사 姑務容養하사 適使姦徒得計하며 庸豎作狂하여 但肆醜厲之詞하니 豈懷任置之恵리오
運路幾絶하며 生人重殘하여 殷然垣翰之軍 鞠爲汙染之俗하니
追思致患之本이면 豈不失於苟且哉 今若又授萬榮이면 則與士寧何異리오
負力而取 誰曰不然이며 邀取而除 孰爲非據리오
苟邀則不順이요 苟允則不誠이니 君臣之間 勢必嫌阻
與其圖之於滋蔓으론 不若絶之於萌芽 忘久遠而樂因循 固非英主 御天下長筭遠慮之計也니이다


10-4-5 최근에 가 매우 교활한 자(이령요李靈曜)를 몰아내고 대량大梁을 수복하고는 곧바로 여기에 진수鎭守한 것이 거의 10년이 됩니다.
비록 맡은 일에 힘쓰고 비용을 절감하여 지친 백성들을 위로하고 힘과 정성을 다하여 큰 공적을 드날릴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호령號令이 자기에게서 연유하고 부속部屬이 위엄을 두려워하여, 융려戎旅를 잘 정돈하고 성세聲勢를 떨쳐서, 원근의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바라보는 사이에 거의 완전한 군대가 되어 동방東方을 통제하는 데 오히려 의지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원좌가 죽자 조정朝廷에서는 에게 그를 대신하게 하였는데,注+① 朝廷命吴湊代之:≪新唐書≫ 〈藩鎭傳〉에 “大曆 연간에 李靈曜가 汴州를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劉元佐가 그 무방비 상태를 틈타서 宋州를 습격하여 취하였으므로 朝廷은 그를 刺史로 삼았다. 德宗 초에 李納의 병사를 크게 격파하고 1만여 級을 참수하여 동남쪽으로 식량을 조운하는 길이 비로소 통하게 되었다. 다시 李希烈의 무리를 격파하였다. 입조하고 다시 涇原의 4개 군진을 겸하였다. 유원좌가 성격이 호방하고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군사들에게〉 후한 상을 내리를 좋아하였기에 백성들이 더욱 곤궁해졌다.”고 하였다. 〈吳湊傳〉에 “宣武軍節度使 유원좌가 죽자 吳湊에게 선무군절도사를 겸하게 하고 달려가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도착하기 전에 汴州의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유원좌의 아들 劉士寧을 세웠다. 오주는 돌아와 右金吾衛大將軍이 되었다.” 하였다. 유사영劉士寧이란 흉한 자가 곧바로 감히 원한을 품고 흘겨보았습니다.
유사녕이 평소 민심을 얻은 것이 아니고, 또 매우 재능이 없어 임명하는 시일을 열흘만 늦추었다면 필시 저절로 분열되었을 것이니, 이 기회를 따라 제어하면 잠깐 사이에 평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백성들을 깊이 생각하시어 우선 용납하여 길러주는 것에 힘쓰셔서 마침 간악한 무리로 하여금 계책을 이루게 하고 용렬한 자로 하여금 미친 짓을 하게 하여, 다만 추악한 언사를 마음대로 지껄이게 하였으니, 어찌 성상이 직책을 맡겨준 은혜를 생각하였겠습니까.
물자를 운송하는 길이 거의 끊어지고 생민들이 매우 쇠잔해져서, 군사가 모두 오염된 풍속에 물들게 되었습니다.
환란을 이룬 근본을 생각해보면 어찌 구차한 데서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만약 이만영에게 제수한다면 유사녕의 일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직책을 감당할 능력을 지닌 사람을 취한다면 누가 옳지 않다고 말할 것이며, 〈알맞은 사람을〉 찾아서 제수한다면 누가 그 자리가 걸맞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구차하게 요구한다면 순수하지 못하고 구차하게 윤허한다면 진실하지 못한 것이니, 군주와 신하 사이에 정황상 필시 혐의가 있게 될 것입니다.
무성한 뒤에 도모하는 것은 싹이 틀 때에 잘라버리는 것만 못하니, 장구한 계책을 잊어버리고 예전의 습속을 따르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은 진실로 영명하신 군주가 천하를 다스리는 심모원려深謀遠慮한 계책이 아닙니다.


역주
역주1 劉元佐 : 즉 刘玄佐(735~792)로, 원래 이름은 刘洽이다. 河南 匡城(현 长垣县 서남쪽) 사람이다. 唐 代宗 때 永平军 牙将이 되고, 汴宋都虞候 李靈曜가 汴州를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永平节度使 李勉의 명으로 宋州를 습격하여 탈환한 공으로 宋州刺史가 되었다. 建中 2년(781) 宣武军节度使가 되고, 그해 平卢节度使 李正己가 죽은 후 그 아들 李纳이 모반하자 平卢 叛军을 격파하였다. 淮西节度使 李希烈이 반란한 이후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그 후 懷德郡王에 이르렀다. 建中 4년(783) 德宗이 ‘泾原兵变’으로 奉天으로 망명하자, 회서절도사 이희열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유흡이 이면과 淮南节度使 陈少游, 东都汝州节度使 哥舒曜 등과 함께 이희열을 포위하였다. 12월에 이희열이 汴州를 함락시키고 곧바로 襄邑을 함락시키고 寧陵으로 진군하였으나 유흡의 部下 刘昌이 寧陵을 굳게 지켜 반군을 물리쳤다. 兴元 원년(784) 정월, 德宗이 유흡에게 汴, 滑, 宋, 亳의 都统副使를 겸하게 하고, 3월에는 检校尙书左僕射 同中书门下平章事를 더하였다. 이때 이희열이 또 부하 翟崇晖를 보내 陈州를 공격하게 하였다. 윤10월에 유흡은 유창 등을 파견하여 陈州를 구하였다. 11월에 유창이 적숭휘를 생포하고서 유흡은 汴州를 수복하였다. 贞元 원년(785) 3월에 덕종이 유흡에게 检校司空을 더하고, 5월에 陈州诸军行营都統을 더하고 刘玄佐란 이름을 특별히 내렸다. 6월에 汴州刺史를 겸임하였다. 贞元 2년(786) 4월, 이희열이 部将 陈仙奇에게 독살 당하자, 朝廷에서 论功하여 유현좌의 한 아들을 正员官으로 삼았다. 11월, 유현좌는 입조하여, 泾原四镇北庭等道兵马副元帅 检校司徒에 증직되었다. 左僕射 张延赏이 大将 李晟을 中傷하자, 덕종이 유현좌와 镇海军节度使 韩滉에게 중재시키라고 하였다. 한황의 추천으로 유현좌는 군사를 거느리고 河湟 지역을 수복하였다. 贞元 3년(787) 한황이 죽은 후 宰相에 오른 张延赏 때문에 이성의 兵权이 제거되자 유현좌는 원망하여 조정에 협력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의리를 존중하였으나, 말기에는 宣武軍 士卒이 더욱 교만하게 되었다. 贞元 8년(792) 58세로 세상을 떠난 후, 太傅에 추증되고 ‘壮武’의 시호를 받았다.
역주2 吳湊 : 吴漵의 아우이자, 章敬皇后의 아우로 濮州 濮阳 사람이다. 寶曆 연간에 형과 함께 开府하고 太子詹事를 제수받고 함께 濮阳郡公에 봉해졌다. 오주는 兄弟가 3品이었지만 낮은 관직을 청하여 检校太子宾客이 되고 太子家令을 겸하였다. 거듭 전직하여 左金吾卫大将军이 되었다. 大曆 연간에 滑州의 장수 令狐彰과 汴州의 장수 田神功이 차례로 죽고 藩鎭의 군사들이 교만하자, 代宗이 오주에게 抚慰하도록 명하였다. 宰臣 元载가 권력을 농단하자 오주가 대종의 밀지를 받들어 간언을 올렸다. 建中 초에 右卫将军이 되고 通州刺史를 겸하였다. 贞元 초에 太子宾客이 되었다가 福州刺史로 나가 御史中丞 福建观察使를 지냈다. 이어서 陝州大都督府长史 陝虢观察使가 되었다. 이때 刘玄佐가 죽자, 检校兵部尙书 汴州刺史 御史大夫 宣武军节度使가 되었다. 이때 汴州의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牙将 曹金岸과 县令 李迈을 죽이고 유현좌의 아들 劉士寧을 세우려고 하였다. 대종이 오주를 파견하려 하였으나 窦参이 저지하였으므로 오주를 불러 右金吾卫大将军을 주고 梁宋의 节度를 유사녕에게 맡겼다. 贞元 14년(798) 한발로 곡식이 귀하고 백성들이 流亡하자 오주가 京兆尹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오주는 德宗의 老舅로서, 贞元 이후 中外의 显贵를 거쳤다. 贞元 16년 4월에 졸하였는데, 尙书左僕射에 추증되었다.
역주3 성대한……같은 : 원문 ‘殷然垣翰’은 일련번호 10-4-4의 ‘殷如長城’과 같은 말이다. ‘垣翰’ ≪詩經≫ 〈大雅 板〉에 “大德의 사람은 나라의 울타리이며 많은 무리는 나라의 담이며, 큰 제후국은 나라의 병풍이며 大宗은 나라의 정간이며, 덕으로 은혜롭게 함은 나라를 편안히 하는 것이며 宗子는 나라의 성이다.[价人維藩 大師維垣 大邦維屛 大宗維翰 懷德維寧 宗子維城]”라고 하였다. 이후 ‘垣翰’은 屏障이나 重臣을 비유하게 되었다.
역주4 (歷)[曆] : 저본에는 ‘歷’으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 〈藩鎭傳〉에 의거하여 ‘曆’으로 바로잡았다.

당육선공주의(2) 책은 2023.01.1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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