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者劉元佐가 驅攘巨猾하고 底復大梁하여 即鎭於兹가 幾將十載라
雖不能勤身節用하여 以撫疲甿하며 畢力竭誠하여 以揚丕烈이나
然尙號令由己하며 部屬畏威하여 緝修戎旅하고 振耀聲勢하여 遠邇談矚에 且爲完軍이라 制持東方에 猶有所倚러니
及元佐殂沒
에 朝廷
이 命吴湊代之
注+① 藩鎭傳 “大中, 李靈曜據汴州反, 劉元佐乘其無備, 襲取宋州, 朝廷以爲刺史. 德宗初, 大破李納兵, 斬首萬餘級, 東南饟漕始通. 又破李希烈之衆. 入朝, 復兼涇原四鎭. 性豪縱, 輕財好厚賞, 故下益困.” 吳湊傳 “宣武劉元佐死, 以湊領節度使, 馳往代之. 未至, 汴軍亂, 立元佐子士寧. 湊還爲右金吾衛大將軍.”하시니 士寧兇頑
이 輙敢眦睚
하니
素非得衆이요 且甚不材라 緩之旬時면 必自離沮니 隨機制馭에 指顧可平이어늘
陛下가 念深黎元하사 姑務容養하사 適使姦徒得計하며 庸豎作狂하여 但肆醜厲之詞하니 豈懷任置之恵리오
運路幾絶하며 生人重殘하여 殷然垣翰之軍이 鞠爲汙染之俗하니
追思致患之本이면 豈不失於苟且哉아 今若又授萬榮이면 則與士寧何異리오
負力而取면 誰曰不然이며 邀取而除면 孰爲非據리오
苟邀則不順이요 苟允則不誠이니 君臣之間에 勢必嫌阻라
與其圖之於滋蔓으론 不若絶之於萌芽니 忘久遠而樂因循이 固非英主의 御天下長筭遠慮之計也니이다
10-4-5 최근에
가 매우 교활한 자(
이령요李靈曜)를 몰아내고
대량大梁을 수복하고는 곧바로 여기에
진수鎭守한 것이 거의 10년이 됩니다.
비록 맡은 일에 힘쓰고 비용을 절감하여 지친 백성들을 위로하고 힘과 정성을 다하여 큰 공적을 드날릴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호령號令이 자기에게서 연유하고 부속部屬이 위엄을 두려워하여, 융려戎旅를 잘 정돈하고 성세聲勢를 떨쳐서, 원근의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바라보는 사이에 거의 완전한 군대가 되어 동방東方을 통제하는 데 오히려 의지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원좌가 죽자
조정朝廷에서는
에게 그를 대신하게 하였는데,
注+① 朝廷命吴湊代之:≪新唐書≫ 〈藩鎭傳〉에 “大曆 연간에 李靈曜가 汴州를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劉元佐가 그 무방비 상태를 틈타서 宋州를 습격하여 취하였으므로 朝廷은 그를 刺史로 삼았다. 德宗 초에 李納의 병사를 크게 격파하고 1만여 級을 참수하여 동남쪽으로 식량을 조운하는 길이 비로소 통하게 되었다. 다시 李希烈의 무리를 격파하였다. 입조하고 다시 涇原의 4개 군진을 겸하였다. 유원좌가 성격이 호방하고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군사들에게〉 후한 상을 내리를 좋아하였기에 백성들이 더욱 곤궁해졌다.”고 하였다. 〈吳湊傳〉에 “宣武軍節度使 유원좌가 죽자 吳湊에게 선무군절도사를 겸하게 하고 달려가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도착하기 전에 汴州의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유원좌의 아들 劉士寧을 세웠다. 오주는 돌아와 右金吾衛大將軍이 되었다.” 하였다. 유사영劉士寧이란 흉한 자가 곧바로 감히 원한을 품고 흘겨보았습니다.
유사녕이 평소 민심을 얻은 것이 아니고, 또 매우 재능이 없어 임명하는 시일을 열흘만 늦추었다면 필시 저절로 분열되었을 것이니, 이 기회를 따라 제어하면 잠깐 사이에 평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백성들을 깊이 생각하시어 우선 용납하여 길러주는 것에 힘쓰셔서 마침 간악한 무리로 하여금 계책을 이루게 하고 용렬한 자로 하여금 미친 짓을 하게 하여, 다만 추악한 언사를 마음대로 지껄이게 하였으니, 어찌 성상이 직책을 맡겨준 은혜를 생각하였겠습니까.
물자를 운송하는 길이 거의 끊어지고 생민들이 매우 쇠잔해져서,
군사가 모두 오염된 풍속에 물들게 되었습니다.
환란을 이룬 근본을 생각해보면 어찌 구차한 데서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만약 이만영에게 제수한다면 유사녕의 일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직책을 감당할 능력을 지닌 사람을 취한다면 누가 옳지 않다고 말할 것이며, 〈알맞은 사람을〉 찾아서 제수한다면 누가 그 자리가 걸맞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구차하게 요구한다면 순수하지 못하고 구차하게 윤허한다면 진실하지 못한 것이니, 군주와 신하 사이에 정황상 필시 혐의가 있게 될 것입니다.
무성한 뒤에 도모하는 것은 싹이 틀 때에 잘라버리는 것만 못하니, 장구한 계책을 잊어버리고 예전의 습속을 따르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은 진실로 영명하신 군주가 천하를 다스리는 심모원려深謀遠慮한 계책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