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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陸宣公奏議(2)

당육선공주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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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육선공주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陛下 若謂臣說體迂闊하여 有異軍機하며 引喩乖疎하여 不同事實이어든 臣請指陳汴宋一管近代成敗之跡皆陛下之所經見者하여 以爲殷鑑이니 惟陛下 覽而察之하소서
往者田神功 作鎭河南하여 領汴宋徐泗兗鄆曹濮八州之地하여 兵食兼足하고 職貢備修注+① 藩鎭傳 “田神功, 冀州人. 天寶末, 賊以爲平盧兵馬使. 率衆歸朝後, 拜鴻臚卿. 劉展反, 賊圍宋州急, 李光弼奏神功往救, 賊解去. 徒河南節度汴․宋八州觀察使. 大二年, 來朝, 復還軍. 八年, 力疾入朝, 卒.”하여
左肅青齊하며 右弭滑魏하고 南控淮淛하며 北輔滎瀍하여 殷如長城하여 不震不聳하니
此由制置 得可安之地하며 付授 得可濟之材 其爲利宜 斯謂大矣러니
及神功 入覲하여 遘厲不還하니 先皇帝示眷悼之優崇하시며 貪因循之便易하사 知神玉 才不勝任이로되 排衆議而竟授之러니
旣而維御無方하고 經略失制하여 權歸豪將하니 勢散列城하여 禍機一興 內叛外破하여
委三軍於暴帥하며 陷五郡於匪人注+② 神功卒, 代宗詔其弟曹州刺史神玉知汴州留事, 復以爲汴․宋節度留後. 神玉卒, 都虞候李靈曜殺兵馬使濮州刺史孟鑑, 北結田承嗣爲援, 朝廷以爲汴宋留後. 靈曜益驕慢, 悉以其黨爲管內八州刺史․縣令, 欲效河北諸鎭. 詔命馬燧等討之. 更勝迭負, 田承嗣遣田悅將兵救靈曜. 悅衆大潰. 靈曜開門夜遁, 汴州平, 竟斬靈曜於京師. 平盧節度使李正己先有淄․青․齊․海․登․萊․沂․密․德․棣十州之地. 及靈曜之亂, 諸道合兵攻之, 所得之地, 各爲己有, 正己又得曹․濮․徐․兗․鄆五州, 故云 陷五郡於匪人.하여 轉輸所經 塗路亟阻하니 此由制置於必危之地하며 付授於必躓之才 其爲敗傷 亦已甚矣


10-4-4 폐하陛下께서 만약 사체事體를 논설한 것이 우활하여 군기軍機에 동떨어진다고 여기시고 비유譬喩한 것이 어긋나고 엉성하여 사실事實과는 다르다고 여기신다면, 근대에 있었던 일대의 성패成敗의 사적은 폐하께서 모두 몸소 겪으신 것이니, 이 청컨대 이를 하나하나 진술하여 은감殷鑑으로 삼고자 합니다. 부디 폐하께서는 잘 살펴주십시오.
지난날 전신공田神功하남河南을 설치하고 등 8의 땅을 거느려서 군병과 식량이 둘 다 풍족하고 조공朝貢을 제대로 시행하였습니다.注+① 往者田神功……職貢備修:≪新唐書≫ 〈藩鎭傳〉에 “田神功은 冀州 사람이다. 天寶 말에 逆賊(董秦)이 平盧兵馬使를 삼았는데, 전신공이 무리를 이끌고 조정에 귀의한 이후에 鴻臚卿에 제수되었다. 劉展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역적(유전)이 宋州를 포위하여 위급해지자, 李光弼이 上奏하여 전신공이 가서 구원하니 역적이 포위를 풀고 떠났다. 이에 河南節度使 汴․宋八州觀察使로 옮겼다. 大曆 2년(767) 來朝하고 다시 군진으로 돌아갔다. 大曆 8년(773)에 질병을 무릅쓰고 入朝하고서 죽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왼쪽으로는 청주青州제주齊州를 평정하고 오른쪽으로는 활주滑州위주魏州를 막으며, 남쪽으로는 회수淮水절강浙江 지역을 통제하고 북쪽으로는 형수滎水전수瀍水 지역을 보호하니, 성대한 장성長城처럼 지켜주어서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조치한 것이 편안할 만한 땅을 얻고 맡긴 일이 이룰 만한 인재를 만난 데서 연유한 것이니, 그 이롭고 마땅함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신공이 입조入朝하였다가 역질에 걸려 돌아가지 못하니, 선황제先皇帝(대종代宗)께서 융숭하게 애도하는 뜻을 보이시고 편이하게 예전의 습속을 따르는 것을 바라시어, 전신옥田神玉의 재주가 임무를 감당하지 못함을 아셨지만 중론을 물리치고 끝내 그에게 그 직책을 제수하시었습니다.
얼마 후 제어하는 데 아무 방도가 없고 경략經略하는 데 절제함을 잃어서 권한이 호장豪將들에게 돌아가고 세력이 여러 으로 분산되어, 화기禍機가 한 번 일어나자 안으로는 반란이 일어나고 바깥으로는 군대가 격파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포악한 장수에게 삼군三軍을 맡겨서 바르지 못한 자에게 다섯 고을이 함락되어,注+② 及神功入覲……陷五郡於匪人:田神功이 죽자, 代宗은 조서를 내려 그 아우 曹州刺史 田神玉을 知汴州留事로 삼았다가, 다시 汴․宋節度留後로 삼았다. 전신옥이 죽자, 都虞候 李靈曜가 兵馬使 濮州刺史 孟鑑을 살해하고 북쪽으로 田承嗣와 결탁하여 원조로 삼으니, 朝廷은 汴宋留後로 삼았다. 이영요는 더욱 驕慢해져서 자기의 黨與를 모두 管內의 8州의 刺史와 縣令으로 삼아서 河北의 諸鎭을 본받으려고 하니, 조칙을 내려 馬燧 등에게 토벌하게 하였다. 이기고 지는 것을 번갈아 하였는데, 전승사가 田悅을 파견하여 군병을 이끌고 이영요를 구하게 하였는데, 전열의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이영요가 성문을 열고 밤에 도망가니 汴州가 평정되었다. 마침내 이영요를 京師에서 斬하였다. 平盧節度使 李正己가 앞서 淄․青․齊․海․登․萊․沂․密․德․棣 등 10州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영요의 난에 여러 道가 병사를 합하여 그를 공격하여 얻은 땅은 각각 자기 소유로 삼았는데, 이정기는 다시 曹․濮․徐․兗․鄆 등 5州를 차지하였다. 그러므로 ‘바르지 못한 자에게 다섯 고을이 함락되었다.’고 한 것이다. 물자를 운송하는 도중에 도로가 자주 막혔으니, 이는 반드시 위태로운 땅에 조치하고 반드시 실패할 인재에게 일을 맡긴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그 패하고 손상함이 역시 심하였습니다.


역주
역주1 (歷)[曆] : 저본에는 ‘歷’으로 되어 있으나, ≪新唐書≫ 〈藩鎭傳〉에 의거하여 ‘曆’으로 바로잡았다.

당육선공주의(2) 책은 2023.01.1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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