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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陸宣公奏議(2)

당육선공주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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議汴州逐劉士寧事狀
右希顔 奉宣聖旨호되 適得李萬榮奏하니 劉士寧 因出遊獵이라가 三軍將士 遂閉城門不放入하고 發遣令赴朝廷일새 萬榮 安撫軍州하여 今已寧帖이라하니 卿等 宜知悉者


3. 변주汴州을 축출한 일에 대하여 의론하는 주장奏狀
10-3-1 희안希顔성지聖旨를 받들어 선유宣諭하기를, “마침 주장奏狀을 받아보니, ‘유사영劉士寧이 나가서 노닐며 사냥을 하는 틈에 삼군三軍장사將士가 마침내 성문城門을 닫아걸고 멋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내쫓아서 조정朝廷으로 달아나게 하였기에 이만영이 군주軍州안무安撫하여 지금 이미 안정되었다고 하였는데, 들은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역주
역주1 劉士寧 : 宣武軍節度使 劉玄佐의 아들이다. 貞元 8년(792)에 劉玄佐가 죽자 유사녕이 지위를 이었는데, 음란하고 잔인하였다. 都知兵馬使 李萬榮이 人心을 얻자 유사녕은 그를 경계하여 병권을 빼앗고 이만영으로 하여금 汴州로 가게 하였다. 하루는 유사녕이 사냥하러 나갔는데, 三軍의 將士들이 성문을 닫고 유사녕을 쫓아버리자 유사녕은 달아나서 京師로 돌아갔다. 德宗은 이만영에게 留後를 제수하니, 이후 宣武軍이 점점 교만하고 방자하게 되어, 네 차례나 군사 변란을 일으켰다.
역주2 李萬榮 : ?~796. 貞元 9년(793)에 宣武都知兵馬使 李萬榮이 兵變을 일으켜 劉士寧을 축출하였는데, 德宗은 즉시로 이만영을 留後로 삼았다. 貞元 12년(796) 6월에 이만영이 죽자 그 아들 李迺가 난리를 일으켰으므로, 都虞候 鄧惟恭과 監軍 宦官 俱文珍이 그를 체포하여 京師로 압송하였다. 조정은 東都留守 董晉을 宣武軍節度使에 임명하였다.

당육선공주의(2) 책은 2023.01.1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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